## 심연의 징벌
차가운 지하 공기 속을, 눅진한 핏물이 섞인 향이 맴돌았다. 곰팡이와 낡은 나무가 뒤섞인 퀴퀴한 내음 사이로, 희미한 촛불만이 그림자를 흔들며 제 존재를 알렸다. 지훈은 웅크린 채 돌 제단 위에 놓인 형상을 응시했다. 거친 천 조각과 실타래로 조악하게 만들어진 인형, 그러나 그 안에 민준의 머리카락과 찢어진 옷 조각이 박혀 있기에, 지금 지훈에게는 그 어떤 살아있는 존재보다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의 손에는 뼈로 만든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뼈날은 빛을 흡수하듯 무광의 검은색이었고, 손잡이에는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지훈의 앙상한 손가락이 단검을 꽉 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울긋불긋 솟아올랐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하지만 그 눈빛만은 맹렬한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마치 세상의 모든 증오를 담아낸 듯한 광기 어린 시선이었다.
“민준아….”
갈라진 목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메아리조차 없는 축축한 지하에서 그 소리는 곧 흡수되어 사라졌다. 지훈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짓눌려 온 고통, 그가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장 믿었던 친구의 배신. 영혼을 팔아서라도 갚아주고 싶었던 그 빚. 이제 그 빚을 받아낼 시간이었다.
그는 제단 위 인형의 심장 부위에 단검 끝을 맞췄다. 차가운 뼈날이 천에 닿는 순간, 주변의 촛불이 일제히 흔들리며 꺼질 듯 깜빡였다. 지훈은 눈을 감고, 고대 언어로 된 주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처음에는 떨렸으나, 곧 심연에서 끌어올린 듯한 묵직하고 섬뜩한 울림으로 변해갔다. 단어 하나하나에 그의 증오와 절망, 그리고 결의가 실려 있었다.
“…피로써 맺은 계약, 배신으로 끊어졌으니, 이제 어둠의 심장이 너의 심장을 찢으리라. 고통으로 시작된 삶, 고통으로 끝나리니, 죽음조차 너에게 안식을 허락하지 않으리라….”
주문이 깊어질수록 지훈의 손목에 묶인 가죽끈이 조여들었다. 뾰족한 칼날이 그의 피부를 뚫고 검붉은 피를 흘러나오게 했다. 뚝, 뚝. 뜨거운 피방울이 인형 위에 떨어졌다. 천이 피를 흡수하자, 인형의 재질이 변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진짜 살처럼, 불길하게 붉은색으로 물드는 천 조각.
그리고, 단검이 인형의 심장을 꿰뚫었다.
쑤욱-!
마치 생살을 가르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지훈의 온몸에 격렬한 통증이 휘몰아쳤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그는 비명을 삼켰다. 이는 저주를 행하는 자가 감당해야 할 대가였다. 그 고통마저도 지훈에게는 달콤했다. 민준이 겪게 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
한편, 도심 최고층 펜트하우스. 민준은 대리석 바닥에 뒹구는 고급 와인잔을 걷어찼다. 술기운에 취해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투명한 유리창 밖을 내다봤다. 야경은 화려했고, 그의 인생은 그 야경보다 더 눈부시게 빛났다. 그를 파멸로 몰아넣으려 했던 지훈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의 세상에서는.
“하, 겨우 그딴 걸로 날 잡으려고 했어? 지훈이 너 이 병신 새끼….”
민준은 비웃듯 중얼거렸다. 그가 지훈에게서 빼앗은 건 단순히 사업 아이템이나 돈이 아니었다. 지훈이 오랜 시간 연구하고 몰두했던 고대의 비술, 금지된 지식이었다. 민준은 그 지식을 이용해 단숨에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지훈은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잃고 폐인이 되었다.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때였다.
창밖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 순간적으로 일렁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착각인가 싶어 눈을 비볐지만, 다시 돌아보니 아무 이상 없었다.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새로운 와인을 따려고 몸을 돌렸다.
끼이익-
어디선가 쇠 긁는 소리가 들렸다. 문 닫히는 소리 같기도, 오래된 가구가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민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누가 장난쳐?”
최고급 방음 시설이 된 펜트하우스에서 이런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그는 거실 중앙에 놓인 거대한 샹들리에를 올려다봤다. 수십 개의 크리스탈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샹들리에의 가장 큰 크리스탈 하나가 아무런 전조도 없이 뚝,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섬광처럼 터진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민준은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듯한 충격에 몸을 굳혔다. 술기운이 단번에 가시는 느낌이었다.
“이, 이건 또 뭐야…?”
식은땀이 등에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샹들리에를 다시 봤다. 여전히 다른 크리스탈들은 견고하게 매달려 있었다. 방금 떨어진 것은 너무나도 우연한 사고처럼 보였다.
그의 눈이 바닥에 떨어진 크리스탈 조각으로 향했다.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는 그 조각이, 순간 피처럼 붉은색으로 물드는 환영을 봤다. 아니, 환영이 아니었다. 조각 아래 바닥이 정말로 붉게 변하고 있었다. 마치 바닥 아래에서 피가 솟아나는 것처럼.
“흐읍!”
민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공포가 목구멍을 조여왔다.
환영일 리 없었다. 그가 발버둥치며 빼앗았던 지훈의 ‘그것’이 떠올랐다. 금기된 지식의 대가는 반드시 치러야 한다고 지훈은 경고했었다. 그때는 비웃어 넘겼던 그 경고가, 이제는 귓가에 맴도는 저주처럼 들렸다.
“젠장, 젠장!”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펜트하우스의 모든 사물이 갑자기 낯설고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져 그를 감싸는 듯했다.
거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거대한 거울 속으로 그의 모습이 비쳤다. 술에 취해 엉망이 된 민준의 얼굴. 그러나 그 거울 속의 자신은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피부가 창백해지고, 눈동자는 텅 빈 어둠으로 물들었다. 목덜미에는 뼈가 튀어나올 듯 앙상한 자국이 선명했다.
“커흐읍!”
민준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울 속의 민준은 이미 그가 아니었다. 뼈와 가죽만 남은 채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그건… 지훈의 얼굴이었다. 그가 폐인으로 만들어버린 지훈의, 고통으로 물든 얼굴이었다.
거울 속 지훈의 입이 열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민준은 그 입술이 무어라 말하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네가 빼앗아간 모든 것을, 이제 되돌려 받으리라.*
그와 동시에 거울 속 지훈의 얼굴이 섬뜩하게 비틀리며, 핏빛으로 물든 손이 거울 표면을 뚫고 튀어나왔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민준의 심장을 향해 뻗어왔다.
“안 돼! 안 돼!!!”
민준은 전신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공포에 질려 눈을 감았다. 살을 찢고 들어오는 듯한 차가운 감촉에, 그는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은 밤하늘에 잠식되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지훈의 그림자가 서서히 짙어지고 있었다. 복수의 시작은, 이제 막 심연의 문을 열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