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하늘 아래, 세상은 거대한 무덤과 같았다. 먼지와 폐허가 뒤섞인 대지 위에서, 살아있는 모든 것은 희미한 잔상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무영은 그 흔들림 속에 서 있었다. 그의 등에는 낡고 해진 검 한 자루가 묵묵히 매달려 있었고, 얼굴은 찢어진 천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다. 드러난 눈빛은 언제나처럼 차갑고 무심했다.

바람이 불었다. 모래와 재가 뒤섞인 칼날 같은 바람이었다. 귓가에는 죽어버린 도시의 낮은 신음처럼 쇠락한 건물들이 내는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때 높이 솟아 인류의 위대함을 자랑하던 강철과 콘크리트의 탑들은 이제 뼈대만 남아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은 무영과 같은 유랑객들, 그리고 이 세상이 뒤틀린 후 나타난 이형(異形)의 존재들이었다.

사흘째, 목구멍은 바싹 말라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신 물은 며칠 전 폐허가 된 지하수로에서 겨우 찾아낸 고인 물이었다. 이제는 그것마저 바닥났다. 식량은 사냥한 들쥐 한 마리가 전부였다. 이런 세상에서 무공은 생존의 도구일 뿐, 과거 강호에서 말하던 의협이니 도리니 하는 것들은 모두 바람에 흩어진 먼지가 된 지 오래였다.

무영은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널브러진 자동차 잔해들은 녹슨 뼈대만 남아 이 세상의 파멸을 웅변하는 듯했다. 그는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겼다. 날카로운 잔해에 발이 베이면 그게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상처는 덧나기 마련이고, 이 척박한 땅에서 치료는 사치였다.

“쉿.”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무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수십 년간 죽음의 경계에서 단련된 그의 감각이 불길한 기척을 포착했다. 바람에 실려 오는 비릿한 냄새, 그리고 아주 미세한 진동. 저 멀리, 무너진 백화점 건물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는 즉시 자세를 낮추고, 잔해물 뒤로 몸을 숨겼다. 등 뒤의 검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철제 파이프와 무너진 벽돌 사이로 백화점 내부를 살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는 그림자. 두 마리였다. 굶주림에 미쳐버린 들개들 같았다. 하지만 이 세상의 들개들은 평범하지 않았다. 잿빛 털은 부분적으로 딱딱한 비늘처럼 변해 있었고, 이빨은 보통의 맹수보다 훨씬 길고 날카로웠다. 보통 ‘변종견’이라 불리는 놈들이었다.

놈들은 죽은 동물의 뼈를 물어뜯고 있었다. 뼈에서 나는 둔탁한 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무영은 숨소리마저 죽였다. 변종견들은 후각과 청각이 극도로 발달해 있었다. 그는 조용히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거리가 너무 멀었다. 검을 뽑기엔 너무 가까이 다가가야 했다.

조심스럽게, 숨쉬는 것조차 잊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 같았다. 먼지 한 톨 일으키지 않고, 그림자처럼 건물 잔해 사이를 파고들었다. 내공을 발끝에 집중하여 미세한 소리조차 흡수했다. 스윽. 그의 그림자가 들개들에게로 다가갔다.

첫 번째 들개는 뼈를 씹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무영은 그대로 놈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단검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척추와 심장을 단번에 꿰뚫는 일격. 놈은 끽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동시에 두 번째 들개가 고개를 들었다. 피 냄새와 동족의 죽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이다. 놈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영에게 달려들었다. 사나운 이빨이 턱을 노렸다. 무영은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하고, 놈의 등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발이 놈의 목덜미를 강하게 짓눌렀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놈의 비명은 채 터져 나오지도 못하고 끊겼다.

“젠장.”

무영은 놈들의 털가죽을 대충 훑었다. 뼈다귀만 앙상하게 남은 몸. 쓸만한 고기는 없었다. 물도, 특별한 약초도 보이지 않았다. 헛수고였다. 놈들을 처리하느라 기운만 뺐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밤이 오면 이 폐허는 더욱 위험한 지옥으로 변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알 수 없는 괴물들의 기척, 그리고 더 위험한 인간 사냥꾼들. 밤은 피해야만 했다.

무영은 그날 밤을 보낼 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기 위해 무너진 백화점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가장 높은 곳에 올라야 주변을 살피고 잠시나마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과 붕괴된 통로를 조심스럽게 지나며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 도착하자, 잿빛 노을이 스산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피빛으로 물들었고, 지평선 너머의 죽은 산맥은 핏빛 실루엣을 이루었다. 그 풍경은 아름답기보다는 절망적이었다.

그때였다.

“흐윽… 흐읍…”

희미한 신음소리. 무영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인간의 소리였다. 이 폐허에 자신 말고 또 다른 사람이 있을 줄이야. 소리는 옥상 가장자리에 쓰러진 몸뚱이에서 나는 듯했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 낡은 방수포 아래, 작고 마른 몸집의 소녀가 웅크려 있었다. 찢어진 옷은 먼지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이는 열대여섯 정도 되어 보였다. 그녀의 한쪽 다리는 끔찍하게 부어 있었고, 검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독에 물린 듯했다.

소녀는 무영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흙먼지로 뒤덮인 얼굴, 겁에 질린 눈동자.

“으… 으윽…”

겨우 신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무영은 말없이 소녀의 상처를 살폈다. 맹독사의 소행이었다. 이 세상이 뒤틀리면서 뱀들의 독은 훨씬 더 치명적으로 변했다. 소녀의 다리는 이미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터였다.

그는 망설였다. 자신도 죽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물도 없고, 식량도 부족했다. 다른 이를 돕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강호의 의리 따위는 이제 없었다. 그저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법도였다.

하지만, 소녀의 눈빛에서 그는 아주 오래전 잃어버렸던 어떤 것을 보았다. 절망 속에서도 희미하게 타오르는 생명의 불꽃. 자신과 같은 인간의 눈빛이었다.

“물, 있느냐?”

무영이 묻자 소녀는 겨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술은 갈라져 피가 배어 있었다.

“치료할 것이 있느냐?”

다시 고개를 젓는 소녀. 그녀는 이제 흐느끼기 시작했다. 고통과 절망에 찬 흐느낌이었다. 무영은 한숨을 쉬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소… 하…”

작은 목소리였다. 무영은 자신의 배낭을 내렸다. 그 안에는 다 쓴 물통, 말린 고기 몇 조각, 그리고 닳아빠진 약초 주머니가 있었다. 그 약초 주머니 속에는 아주 귀하고 희귀한, 몇 안 되는 해독초가 들어 있었다. 과거 스승이 전해준 것이었다. 비상시에만 쓰라는 엄명이 있었던 약초. 그가 이 척박한 땅에서 몇 년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이것밖에는 없다.”

무영은 말없이 해독초를 꺼내어 소녀에게 내밀었다. 소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작은 희망이 스며들었다.

“이것을… 다오?”

“네가 먹어라. 씹어서 먹고, 즙을 내어 상처에 발라라.”

무영의 말에 소하는 서툴게 약초를 받아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약초를 씹었다. 쓴맛이 강했겠지만, 그녀는 간절히 그것을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남은 즙을 아픈 다리에 발랐다. 독이 너무 깊어 효과가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왜… 왜 저를 돕는 거죠?”

소하가 겨우 힘겹게 물었다. 무영은 밤하늘을 응시했다. 무수한 별들이 차가운 빛을 뿌리는 밤이었다. 과거에는 저 별들을 보며 시를 읊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이제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이정표일 뿐이었다.

“묻지 마라. 나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답했다. 진실이었다. 왜 자신이 그녀를 돕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순간, 지나칠 수 없었을 뿐. 강호의 도리도, 그 어떤 대의명분도 없었다. 그저 하나의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의 마지막 불꽃을 꺼뜨리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밤은 깊어지고, 폐허에는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무영은 소녀 옆에 앉아 낡은 망토를 펼쳐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검을 뽑아 무릎에 올려놓았다. 날카로운 검날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오늘 밤은 잠들 수 없었다. 이 폐허의 밤은 무수한 위험으로 가득했으니까.

“무… 아저씨는… 강하네요.”

소하가 약초를 먹고 조금 기운을 차렸는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졌을 뿐.”

무영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별들처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얼어붙어 차갑게 식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직, 아주 작은 불씨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것이 희망인지, 아니면 그저 무의미한 미련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소하가 다시 물었다.

무영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멀리 떨어진 지평선,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를 향해 있었다.

“살아남아야지.”

그것이 그의 유일한 답이었다. 폐허 속에서, 절망의 그림자 아래에서, 그들은 그렇게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해가 다시 뜰 때까지, 그리고 또 그다음 날이 올 때까지, 오직 살아남는 것만이 그들의 유일한 목표였다. 무영의 검은 차가운 달빛 아래 묵묵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