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행(夜行) – 1304호의 그림자
밤 11시, 이지한은 지친 몸을 이끌고 13층 자신의 아파트 1304호 문을 열었다. 삭막한 복도를 지나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서자마자, 어깨를 짓누르던 하루의 무게가 일순간 덜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안심도 잠시, 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분명 보일러를 약하게 틀어두고 나왔는데도 집안 공기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젠장, 또 보일러 고장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현관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거실의 메인 등이 켜졌다. 익숙한 풍경. 창문은 굳게 닫혀있고, 거실 테이블 위에는 어젯밤 먹다 남은 과자 봉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일상 공간. 하지만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부재 중에 이곳에 침입해 흔적을 남긴 듯한 불쾌감이었다.
지한은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퇴근하면 곧장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푹 자는 것이 유일한 낙인데, 며칠 전부터 이런 불청객 같은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이겠거니 했다. 고층이라 바람이 샐 리 없는데도 문틈에서 스며드는 듯한 냉기, 아무도 없는 밤에 복도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소리, 전원이 꺼진 TV 화면에서 스치는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들. 모두 피로와 스트레스 탓으로 돌렸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병을 꺼냈다. 컵에 물을 따르는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식기 건조대에 놓여있던 젓가락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지한은 작게 중얼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젓가락을 주워 다시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너무 바짝 붙어있어서 떨어졌나? 평소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러다 편집증 환자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가운을 걸쳤다. 개운해진 기분으로 침대에 몸을 던지려는데, 거실에서 옅은 ‘스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발을 끄는 듯한 소리.
“누구세요?”
지한은 무심코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거실 창문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피로가 가시고 정신이 맑아지자, 오감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
어둠이 드리운 거실은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촘촘히 박혀 빛나고 있었다. 13층 높이에서 보는 야경은 언제나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차갑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지한은 커튼이 흔들렸던 곳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도 없었고, 창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쳐가고 있나….”
그때였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커피잔이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듯 공중으로 떠올랐다.
지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숨이 턱 막혔다. ‘아니, 이건….’
커피잔은 잠시 공중에 멈춰 서 있는가 싶더니, 이내 거실 바닥으로 ‘쨍그랑!’ 하고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뜨거웠던 물이 쏟아지며 희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지한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널뛰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기이한 현상에 그의 이성은 마비되었다. 이건 꿈도, 착각도 아니었다. 명백한 현실이었다.
그 순간, 집안의 모든 전등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깜빡이기 시작했다. 밝았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며 거실 전체를 기괴한 스트로보 조명 아래 놓았다. 동시에 냉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지한의 몸을 꿰뚫었다. 피부에 소름이 돋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음습하고 끈적한 냉기였다.
어둠이 드리울 때마다, 지한의 시야에 뭔가가 스쳤다. 희미하고 흐릿한 형체. 마치 검은 연기가 사람의 형상을 흉내 낸 듯한. 그것은 거실 한가운데, 커피잔이 깨진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너… 너 뭐야…!”
지한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오래된 나무 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가 그의 침실에서 들려왔다. 잠시 후, 지한의 침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경첩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그리고 침실 문틈으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기어나왔다. 그것은 형태가 불분명했지만, 기이하게도 사람의 팔다리처럼 보이는 잔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바닥을 기어오는 듯 스르륵 움직이며 지한을 향해 다가왔다.
지한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림자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림자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머릿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의 비명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아우성이었다.
동시에,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며 혈관을 타고 뜨거운 피가 맹렬히 돌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력하고 낯선 힘이었다. 몸을 짓누르던 냉기가 그 뜨거운 기운과 부딪히며 ‘쉬이익’ 소리를 내는 듯했다.
그림자는 지한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 검고 깊은 심연이 비쳤다. 그리고 심연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났다. 마치 분노에 찬 눈동자처럼.
‘내… 놔….’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러나 명확히 귀에 박히는 목소리가 그의 뇌리를 직접 강타했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질렀다. 압도적인 공포 속에서, 지한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가슴속 뜨거운 기운이 마치 외부의 침입자를 막아내려는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심장이 ‘쿵, 쿵, 쿵’ 하고 고막을 울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순간, 지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릴 적, 분명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낡은 도포를 입은 백발노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손을 잡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노인의 손에서, 그의 손으로 흘러들어왔던 뜨겁고 강렬했던 어떤 기운. 그 기억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그의 의식을 흔들었다.
“꺼져…!”
지한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의 외침과 함께 가슴에서 솟구치던 뜨거운 기운이 마치 파도처럼 터져 나갔다. ‘화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는 잠시 휘청이더니 뒤로 물러섰다. 붉은 눈동자도 희미해졌다.
그림자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거실의 모든 전등이 동시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완전한 어둠이 지한을 덮쳤다. 도시의 불빛만이 창문 너머에서 흔들릴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지한은 비틀거리며 벽에 기댔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온몸을 짓누르던 냉기와 알 수 없는 압박감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귀에 명확하게 들려왔다.
‘기다려라… 나의… 그릇….’
소리는 그의 귓속을 파고들어 뇌리에서 메아리쳤다. 공포가 다시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미지의 존재와 엮여버렸다는 섬뜩한 자각이었다.
지한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전 솟구쳤던 그 뜨거운 기운의 잔열이 아직도 손끝에서 아릿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던 평범한 일상이, 방금 이 아파트 1304호에서 산산조각 났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어떤 ‘힘’이 깨어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이 모든 기이한 현상이, 어쩌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의 아파트, 1304호는 더 이상 평범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알 수 없는 존재가 드리운 그림자 아래 놓인, 거대한 미스터리의 시작점이었다.
밤은 길었다. 그리고 지한의 악몽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