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7화: 흑룡의 발톱, 섬광의 칼날
웅장한 천운각의 중심, 거대한 원형 투기장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고대의 기운이 현대의 빌딩 숲 한가운데 박혀버린 듯, 이곳은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한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수십 층 높이의 관객석은 이미 만원이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기침 한번 하지 못했다. 오직 경기장 한가운데 선 두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殺氣)와 기세만이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흑색 도포 자락이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미세하게 펄럭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날카로운 눈매는 맹수처럼 번뜩였고,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묵직한 압박감을 발산했다. 강림, 흑룡무의 계승자. 그는 천하를 뒤흔들 무(武)의 재림을 꿈꾸는 젊은 광룡(狂龍)이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상대의 영혼까지 꿰뚫어 볼 듯 강렬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없이 여리고 고요한 모습의 여인이 서 있었다. 순백의 도복이 그녀의 가냘픈 몸을 감싸고 있었으나, 허리에 찬 한 자루 검에서는 서릿발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서휘, 섬광검법의 달인. 그녀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베어낼 번개와 같은 살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결승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이 두 사람 중 오직 한 명만이 천하의 운명을 건 최종 결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강림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투기장 전체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대답할 필요 없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쓰러질 자에게는.”
서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숨을 고르며 강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 사내는 분명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강적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검객에게 있어 불안은 죽음과 동의어였다.
심판의 신호는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의 기세가 정점에 달했을 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움직였다.
콰아앙!
강림의 발이 투기장의 단단한 바닥을 부수며 폭발적인 힘을 터뜨렸다. 한 걸음 만에 수십 미터를 주파한 그의 주먹이 섬광처럼 서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었다. 주먹을 감싼 검은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흑룡의 머리처럼 보였고, 그 주변의 공기마저 압축되어 폭음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흑룡파천권(黑龍破天拳)!”
서휘의 눈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강림의 주먹을 쫓았다. 그녀의 몸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유려하게 움직였다. 강림의 주먹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가 뒤편의 강철 기둥을 박살 내는 순간, 그녀는 이미 주먹의 궤적을 벗어나 강림의 옆구리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파고들었다.
쉬이이잉!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서휘의 검은 햇빛 한 조각 없는 투기장을 섬광으로 물들였다. 칼날에 실린 냉기는 강림의 피부에 소름 돋는 감각을 선사했다. 그녀의 검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듯, 눈에 보이는 순간 이미 강림의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섬광검법, 그 이름 그대로 번개처럼 빠르고 치명적인 검술이었다.
강림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이 정도로 빠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더욱 빨랐다. 옆구리에 꽂히는 검을 온몸의 근육을 뒤틀어 간발의 차이로 비켜냈다. ‘챙!’ 하는 맑은 금속음과 함께 검날이 그의 흑색 도포를 스쳤고, 강림의 옆구리에서는 한 줄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얕은 상처였지만, 첫 공격에서 피를 보았다는 사실은 강림의 자존심을 긁었다.
“호오….”
강림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이 이전보다 더욱 이글거렸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오히려 그의 투지를 불태우는 촉매가 되었다.
“제법이군. 하지만 이걸로 날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강림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용솟음쳤다. 그의 피부 위로 검은 비늘이 돋아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투기장 바닥의 파편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검은 기운에 닿자마자 미세한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검은 아우라, 흑룡의 기운 그 자체였다.
“이제부터 진짜다, 여자.”
강림의 목소리가 흑룡의 포효처럼 투기장을 진동시켰다. 그는 팔을 크게 휘둘러 옆구리의 피를 닦아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천지를 뒤흔들 듯한 파괴적인 기세가 실렸다.
서휘는 묵묵히 검을 고쳐 잡았다. 검 끝이 강림을 향했고, 그녀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알았다. 지금부터는 단순한 기술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생사를 건 기 싸움, 영혼을 건 격돌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가슴 속 심장이 고요하지만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내 검은, 죽음을 부른다.”
서휘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섬뜩하게 울렸다. 그녀의 검 끝에서 미세한 빛의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투명한 검날이 마치 주변의 빛을 흡수하는 듯 일렁였다.
콰아아앙!
강림이 다시 한번 바닥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거대한 흑룡의 형상을 이루며 서휘를 덮쳐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다. 흑룡무의 진정한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흑룡멸파진(黑龍滅破陣)!”
투기장을 가득 채운 흑룡의 기운에 관객석의 무림 고수들조차 숨을 헐떡였다. 저 거대한 파괴력을 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을까?
하지만 서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 섬광이 번뜩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의 파동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강림의 흑룡과 정면으로 맞섰다.
“섬광뇌격참(閃光雷擊斬)!”
하얀 섬광이 흑룡의 어둠을 갈랐다. 마치 밤하늘에 떨어진 한 줄기 번개처럼, 서휘의 검은 모든 파괴력을 응축하여 흑룡의 정수리를 노렸다.
쿠구구궁!
두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자 투기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빛과 어둠이 뒤섞여 폭발했다. 먼지와 파편이 뒤섞여 시야를 가렸고, 관객들은 두려움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잠시 후, 굉음이 멎고 먼지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투기장 한가운데에는 섬광이 사라진 검을 든 서휘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녀의 도복 곳곳은 찢어지고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앞, 거대한 바닥이 움푹 파인 자리에는…
강림이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온몸을 감쌌던 흑룡의 기운은 산산이 흩어졌고, 갑옷처럼 단단하던 그의 도포는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그의 턱에는 한 줄기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적.
관객석에서는 아무도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전의 공격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의 실력이 얼마나 막상막하였는지 모두가 절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림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죽지 않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서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한번 미약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희미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결코 희미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았다. 상대가 완전히 쓰러지기 전까지는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녀의 검 끝이 다시 한번, 섬광처럼 번뜩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