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은 끈질기게 발목을 잡았다. 찢어진 옷자락처럼 너덜너덜해진 삶의 조각들이 차가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술 취한 이들의 고성마저 비참하게 들렸다. 현우는 몸을 웅크린 채 식어버린 국밥 그릇을 멍하니 응시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은, 정확히 말하면, ‘그’였다.
“지훈아, 우리 이번 프로젝트만 성공하면 드디어 빛을 보는 거야!”
“당연하지, 현우야! 우리 둘이 뭉쳤는데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이건 네 아이디어고, 난 그걸 현실로 만드는 역할을 할 뿐이야.”
환하게 웃던 그 얼굴이, 현우의 마지막 희망을 무참히 짓밟던 그 순간의 서늘한 눈빛과 겹쳐졌다. 계약서에 찍히던 지훈의 도장,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날아든 파산 통보. 회사는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되었고, 현우의 이름은 사기와 횡령의 주범으로 낙인찍혔다. 모든 증거는 현우를 지목했고, 지훈은 완벽한 피해자로 둔갑했다. 믿었던 친구의 완벽한 배신이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현우의 쉰 목소리가 텅 빈 방 안에서 허무하게 울렸다. 복수?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거대한 절망이 현우의 심장을 짓눌렀다. 벼랑 끝에 몰린 절박함조차 사치로 느껴질 만큼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더는 바닥에 떨어진 자존심조차 주워 담을 힘이 없었다.
손가락 끝에 잡힌 차가운 조약돌. 오래전, 우연히 산속에서 주웠던 이름 모를 돌이었다. 어린 시절의 현우는 이 돌이 빛을 낸다며 신기해했지만, 성장하면서 그저 평범한 돌멩이라 치부하고 서랍 한편에 던져두었다. 이제는 그것마저 소중한 추억의 잔해가 되었다. 흙먼지가 묻은 돌멩이를 매만지던 현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차가운 돌멩이가 갑자기 따뜻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손바닥 안의 돌멩이가 옅은 푸른빛을 내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현우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었다. 눈앞이 아찔했고, 온몸의 세포가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한 기괴한 감각이 밀려왔다. 마치 수천 년의 시간이 한 순간에 압축되어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현우의 마지막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지훈… 너만큼은…’
***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뜻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온기였다. 현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선명했다. 낡은 벽지, 삐걱거리는 책상, 그리고 어지럽게 놓인 전공 서적들. 오래전, 현우가 대학생 시절을 보냈던 자취방이었다.
‘내가… 왜 여기에?’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거칠고 푸석했던 피부는 온데간데없고, 매끈하고 탄력 있는 젊은 피부가 만져졌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거울을 들어 얼굴을 확인했다. 거울 속에는 앳된 티를 벗지 못한, 하지만 분명 현우 자신인 청년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거울을 노려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달력으로 향했다.
**20XX년 5월 12일.**
그것은 지훈이 현우의 아이디어를 훔치고, 회사의 자금을 빼돌려 현우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기 정확히 1년 전의 날짜였다.
“젠장…!”
현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혼란과 충격,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환희가 뒤섞였다. 시간 여행.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눈앞의 현실이 그 증거였다. 그는 돌아왔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직전의 과거로.
“지훈… 네 이 개자식…!”
현우의 입에서 핏발 선 욕설이 터져 나왔다. 주먹을 쥐자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고통은 오히려 생생한 현실감을 주었다. 이번엔 다르다. 절대 과거처럼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이제 미래를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지훈이 어떤 방식으로 현우의 꿈을 짓밟았는지, 어떤 비열한 수법으로 현우의 모든 것을 훔쳤는지. 그 모든 것을 그는 미리 알고 있었다.
현우는 곧장 책상에 앉아 낡은 노트북을 켰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오갔다. 1년 뒤, 지훈이 성공시킬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년 뒤 전 세계를 뒤흔들 기술 동향과 투자 정보를 찾아냈다. 과거의 현우는 지훈의 말에 현혹되어 기술 특허를 지훈의 명의로 출원하고 공동 개발자로 자신을 올리는 우를 범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었다.
똑똑.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에 현우는 깜짝 놀라 노트북 화면을 껐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익숙한, 하지만 이제는 소름 끼치도록 역겨운 것이었다.
“현우야! 문 열어! 나 지훈이야! 너 아직도 자냐? 발표 준비해야지!”
현우는 눈을 감았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반갑게 문을 열었을 것이다. 함께 밤새워 연구했던 지훈의 목소리에 피로도 잊고 환하게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우에게 그 목소리는 지옥의 사자가 보내는 조롱과 같았다.
“잠깐만… 옷 좀 입고.”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숨을 고르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울을 다시 들여다봤다. 굳게 다문 입술, 칼날처럼 서늘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순진하고 무른 현우가 아니었다.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을 겪고 돌아온, 복수의 화신이었다.
문이 열리고, 해맑게 웃는 지훈의 얼굴이 나타났다. “야, 현우! 왜 이렇게 늦게 열어? 벌써부터 기대되잖아, 우리 아이디어 발표!”
그때와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투. 과거의 현우를 홀리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현우는 미소를 지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미소였다.
“그래, 지훈아. 기대되지.”
현우의 눈빛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지훈은 알 수 없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어깨를 툭 쳤다. “좋아, 그럼 가자! 오늘은 우리의 날이야!”
지훈은 활짝 웃으며 앞장섰다. 현우는 그의 뒤를 따랐다. 등 뒤에 드리워진 지훈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현우는 속으로 읊조렸다.
‘그래, 오늘은 우리의 날이겠지. 하지만 곧, 네게는 단 하루도 남지 않게 될 거야. 네가 내게서 앗아간 모든 것을, 나는 열 배, 아니 백 배로 돌려줄 테니까.’
그의 손에는 더 이상 푸른빛을 내지 않는 평범한 조약돌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현우의 가슴속에는 그 어떤 빛보다도 강렬하고 차가운, 복수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새로운 삶, 그리고 지훈의 지옥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