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차원의 틈새, 무림의 부름
김민준은 삐걱거리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눈앞의 엑셀 시트 대신 휴대폰 화면을 힐끗거렸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숫자들의 향연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는 듯했고, 그의 손에 들린 휴대폰은 마치 마지막 남은 도피처처럼 느껴졌다. 웹소설 앱에 떠 있는 ‘무림 최고수, 환생하다!’라는 제목은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크으… 이 맛에 산다니까.”
나직이 중얼거리며 민준은 주인공이 절세무공을 펼쳐 강적을 물리치는 장면을 읽어 내려갔다. 현실은 퇴근 시간만 목 빠지게 기다리는 3년 차 평범한 직장인일 뿐이지만, 소설 속에서는 언제든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심장은 소설 속 검풍과 권기에 맞춰 함께 뛰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무실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쿵! 하는 굉음과 함께 천장의 형광등이 번쩍이더니, 일순간 모든 전기가 나간 듯 암전이 찾아왔다. 비명과 함께 혼란스러운 탄식들이 터져 나왔다.
“뭐야, 뭐야! 지진인가?!”
“정전이에요! 비상등 켜세요!”
민준 역시 당황하여 휴대폰을 꽉 쥐었다. 주변의 어둠 속에서 동료들의 그림자가 허둥지둥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기묘한 빛이 들어왔다. 그의 휴대폰 화면에서 시작된 그 빛은 점차 강해지더니, 이내 사무실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회오리처럼 솟아올랐다.
회오리는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영롱한 빛을 뿜어냈고, 민준은 마치 그 빛에 홀린 듯 눈을 뗄 수 없었다. 빛은 점차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거대한 문이었다. 고대 유적에서나 볼 법한,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석문이 공중에 떠서 회전하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공포가 사무실 전체를 지배했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러나 몸은 이미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회전하던 석문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눈을 가릴 틈도 없이 강렬한 빛이 민준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마치 거대한 손이 자신을 낚아채는 듯한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
***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민준은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방금 전까지 그가 있었던 사무실과는 너무도 달랐다. 울창한 숲이었다. 키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멀리서는 낯선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기가 어디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마치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온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분명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는 꿈이라 생각하며 눈을 비볐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숲은 사라지지 않았다.
“젠장… 꿈이 아니잖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누워있던 곳은 두터운 낙엽이 쌓인 풀밭이었다. 입고 있는 옷은 평소 출근할 때 입던 평범한 와이셔츠와 슬랙스였다. 그러나 옷깃은 찢어져 있었고, 곳곳에 흙먼지가 묻어 있었다.
‘설마… 이세계?’
웹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인지,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이세계’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그는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휴대폰은?’
주머니를 뒤져보니, 다행히 휴대폰은 그대로였다. 그러나 액정은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아무리 전원 버튼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망했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살폈다. 숲은 고요했다. 바람 소리와 새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불길한 침묵이었다. 일단은 이 숲을 벗어나야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민준은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목은 타들어 가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때, 멀리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이곳이 맞으시오? 천년 비령초가 여기서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쉿! 조용히 하게. 혹시라도 다른 문파의 무인들이 먼저 와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문파? 무인?’
민준은 재빨리 몸을 덤불 뒤에 숨겼다. 두 사람이 나타났다. 그들의 차림새는 평범한 등산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 명은 검은색 도포를 입고 허리에 장검을 차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푸른색 도복 차림에 커다란 권갑을 끼고 있었다. 둘의 분위기는 사뭇 진지했고, 주변을 경계하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봐, 저 숲속에 뭔가가 움직이는 것 같지 않나?”
권갑을 낀 사내가 숲 쪽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민준은 숨을 죽였다. 들키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웹소설 속에서만 보던 ‘무인’들을 실제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감은 화면 너머의 글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후훗, 쓸데없는 걱정일세. 이곳은 아직 우리 정파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니, 마교의 잔당들이 감히 발을 들일 리 없지.”
검을 찬 사내가 오만하게 코웃음을 쳤다. 민준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정말로 무협 소설 속의 세계로 넘어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 민준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덤불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의 바로 코앞에, 마치 누군가 일부러 놓아둔 것처럼 보이는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있었다. 누군가 휘갈겨 쓴 듯한 글씨가 눈에 띄었다.
‘제3차 천하제일무도회, 참가 자격자에게 고함.’
민준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천하제일무도회? 그는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
두루마리의 내용은 경악 그 자체였다.
[존경하는 이세계의 방문자이자 새로운 시대의 주역에게,
그대는 차원의 틈을 넘어 이 강호에 당도하였도다. 혼돈에 빠진 천하를 구원할 단 하나의 길, 그것은 바로 ‘천하제일무도회’를 통해 새로운 무림의 패자를 가리는 것이다.
제3차 천하제일무도회는 세상을 덮친 ‘암흑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무너진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개최된다. 대회의 우승자는 ‘천하제일인’의 칭호와 함께, 이 강호의 운명을 좌우할 절대적인 권능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그대의 몸에는 이미 이 세계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허나, 그 힘을 깨우는 것은 온전히 그대의 몫이다. 새로운 시련에 맞서 강해지라. 그리고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 참가하라.
세상의 운명이 그대의 손에 달려 있다.
– 무림맹주 서한.]
민준은 두루마리를 든 손을 덜덜 떨었다. ‘암흑의 그림자’, ‘천하제일인’, ‘절대적인 권능’. 마치 자신이 읽던 웹소설의 프롤로그를 직접 겪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주인공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던 행인 1의 입장으로 말이다.
“젠장… 내가 왜 이런 곳에…”
그는 절망감에 주저앉을 뻔했지만, 이내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이 두루마리가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정보이자, 어쩌면 희망일지도 몰랐다.
그의 눈은 다시 두루마리 속 글귀로 향했다.
‘그대의 몸에는 이미 이 세계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허나, 그 힘을 깨우는 것은 온전히 그대의 몫이다.’
민준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정보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의 안에 존재했던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완벽하게 새로운 감각이었다.
<시스템 메시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시작합니다.>
<기본 무공 ‘초식’이 활성화됩니다.>
<경맥이 확장됩니다. (0.01%)>
<체득 완료! ‘무명보법(無名步法)’을 습득합니다.>
눈을 뜨자,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숲의 나무들 사이를 흐르는 미세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의 몸속에서는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꿈틀거렸다. 어쩐지 몸이 가벼워진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이… 이건 대체…”
민준은 손을 뻗어 자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막이 그의 주위를 감싸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 막 너머로 숲의 기운과 자신이 연결되어 있는 듯한 묘한 감각.
그는 문득 자신이 읽던 웹소설 속 주인공이 무림에 떨어진 후 각성하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그 순간의 짜릿함과 경이로움이 지금 그에게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천하제일무도회라…”
나직이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 반,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 반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직장인 김민준이 아니었다. 이 미지의 강호에서 살아남아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무도회에 참가해야 하는, 새로운 운명을 부여받은 자였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모든 것이 막막했지만, 그의 심장은 이제 퇴근 시간만을 기다리던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격렬한 박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밤하늘 아래, 멀리 떨어진 숲속에서 들려오는 늑대 울음소리가 그의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이세계의 하늘 아래, 김민준의 두 번째 삶이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