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짙게 깔린 도시, 수많은 불빛이 박힌 거대한 회색 빌딩 숲 속에서, 윤세한은 자신의 좁은 아파트로 퇴근했다. 12층, 1204호.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익숙한 공간. 그는 지친 몸을 소파에 던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싸구려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데우는 동안, 식탁 위에 놓인 머그컵이 아주 미세하게,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내가 너무 피곤한가.”
세한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마 방금 열어둔 베란다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 때문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도시락을 먹으며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기사를 뒤적였다. 오늘도 별다른 특이사항 없는 하루. 그에게도, 이 세계에도.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 세한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어제 자기 전 분명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었던 탁상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협탁에서 약 한 뼘 정도 떨어진 카펫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조심스럽게 옮겨 놓은 것처럼.
“뭐지? 내가 잠결에 발로 찼나?”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잠결에 발로 찼다면 적어도 ‘떨어진’ 시계는 조금이라도 비뚤어져 있거나, 더 멀리 굴러가 있어야 했다. 그는 시계를 다시 제자리에 올려놓고 출근 준비를 했다.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간 순간, 등골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분명 어제 밤에는 멀쩡히 닫혀 있던 욕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세한은 문득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한 불쾌한 감각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젠장,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었나.”
애써 합리화하며 샤워를 마쳤다. 하지만 그 싸늘한 시선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사건은 그날 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불을 켜자, 거실 조명이 깜빡거렸다. 전구가 수명을 다했나 싶었지만, 어제까지 멀쩡했다. 며칠 전 새로 갈아 끼운 것이었다.
부엌에서 물을 마시려던 순간, 싱크대 위에 놓인 숟가락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으로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그는 얼어붙은 듯 숟가락을 내려다봤다. 그저 지진이라도 난 것인가? 고개를 들자, 벽에 걸린 액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진동은 없었다.
세한은 그제야 직감했다. 이건 평범한 현상이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집 안을 둘러봤다. 고요한 아파트. 창밖은 도시의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그의 공간만큼은 마치 심해처럼 정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무언가가 숨 쉬고 있는 듯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날 밤, 세한은 잠들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천장만 응시했다.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작은 방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작은 방은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창고처럼 쓰는 방이었다. 그곳에 놓인 낡은 카메라도 고장 난지 오래였다.
“뭐지?”
그는 조심스럽게 작은 방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질적인 공기가 느껴졌다. 마치 차가운 안개가 방 안에 스며들어 있는 듯한 싸늘함. 그리고 미약하게, 아주 미약하게, 무언가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한 단어는 아니었지만, 마치 고대에 쓰이던 어떤 주문 같은 음절들이 뒤섞인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했다.
“누구세요?” 세한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낡은 상자 위에서, 먼지가 잔뜩 앉은 컵라면 용기가 스르륵,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더니, 그대로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세한의 눈이 크게 뜨였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심장이 미친 듯이 발악했다. 꿈이 아니었다. 환각도 아니었다. 컵라면 용기는 마치 투명한 손에 들린 것처럼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희미하게, 마치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푸른빛 기운이 보였다. 마치 옅은 안개 같으면서도, 동시에 압축된 에너지처럼 느껴졌다.
“이게… 대체…”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공중에 떠 있던 컵라면 용기가 갑자기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회전 속도가 절정에 달했을 때, 용기에서 ‘팟!’ 하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세한의 심장 부근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솟아올랐다.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한 따뜻하면서도 강력한 기운이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자신도 모르게 미세한 빛이 번쩍였다. 마치 오래 닫혀 있던 문이 잠시 열린 듯한,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컵라면 용기는 팽그르르 돌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용기가 부서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 안을 가득 채우던 차가운 공기와 속삭임도 함께 사라졌다. 모든 것이 처음으로 돌아간 듯했다.
하지만 세한의 몸속에는 여전히 낯선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방금 본 푸른빛 기운의 잔상이 어른거렸다.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부서진 컵라면 용기 조각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그중 한 조각 밑, 먼지 쌓인 상자 위에 옅게 새겨진 문양을 발견했다.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세 개의 겹쳐진 원 안에 알 수 없는 상형문자가 새겨진, 마치 오래된 주술적인 심벌 같았다. 그 문양은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치 방금 사라진 그 기운이 남긴 흔적처럼.
세한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 그의 평범한 아파트에는, 평범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손님은, 단순히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어쩌면 아주 오래된 무언가를, 깨우려는 듯했다. 그의 심장 속에서 꿈틀거리는 낯선 열기처럼.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빛나는 문양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의 삶은, 이제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그의 아파트는, 더 이상 단순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미지의 영역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 첫 번째 통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이 모든 기괴한 현상과, 자신의 몸에서 깨어나는 낯선 힘의 근원을 찾아야만 했다.
밤은 깊어가고, 도시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세한의 세상은, 이제 그림자 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으로 인해 완전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