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서른다섯, 이방인의 밤

김현우는 서른다섯이었다. 번화가의 고층 빌딩 숲, 그중에서도 가장 평범한 외관을 자랑하는 오피스텔 1204호에 살고 있었다. 퇴근 후 그의 일상은 고독만큼이나 견고했다. 식지 않은 편의점 도시락, 늘 보던 TV 드라마, 그리고 알 수 없는 피로감. 오늘도 다를 바 없었다.

“흐음….”

미지근한 맥주 캔을 따며 현우는 낡은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불치병에 걸린 연인을 향해 절규하고 있었지만, 현우의 눈길은 어느새 식탁 위에 놓인 리모컨에 가 있었다. 분명히 소파 옆에 두었는데.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잦았다. 안경은 화장실 선반에, 지갑은 신발장 위에. 마치 제자리를 잃은 물건들이 저마다의 반항이라도 하는 듯했다.

“나이를 먹었나. 건망증인가.”

중얼거리는 현우의 목소리는 공허한 실내에 메아리쳤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식탁으로 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에 닿는 순간, 짧은 정전이라도 된 듯 TV 화면이 순간적으로 일렁였다.

“…뭐야?”

고장인가 싶어 리모컨을 두어 번 눌러보았지만, TV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선명한 화면을 송출하고 있었다. 그저 오래된 가전제품의 노화 현상이겠지. 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의 삶은 고장 난 부품들을 제때 갈아 끼우는 일련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오피스텔은 묘한 기운에 잠겼다. 창밖 도시는 여전히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냈지만, 현우의 방은 마치 심해처럼 고요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 늘 하던 대로 욕실로 향했다. 칫솔을 들고 거울을 바라보던 현우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수도꼭지가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물방울이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져 세면대에 옅은 원을 만들고 있었다. 현우는 분명히 수도꼭지를 잠그고 나왔다. 그는 강박적일 정도로 완벽하게 잠그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실수했나….”

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수도꼭지를 완전히 잠갔다. 다시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시작하는데,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찬 숨을 불어넣은 듯한 섬뜩한 감각이었다.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욕실 타일 벽이 그의 놀란 얼굴을 비출 뿐이었다.

“젠장,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피로가 극에 달하면 나타나는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심장은 쉬지 않고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평소라면 코를 골며 잠들었을 현우는 그날 밤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건너편 집의 TV 소리, 층간 소음, 그리고 알 수 없는, 아주 작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의 소리가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다음 날 아침, 현우는 푹 자지 못한 얼굴로 겨우 출근 준비를 마쳤다. 문을 나서려는데, 현관문 잠금쇠가 유난히 뻑뻑했다. 평소 같으면 부드럽게 돌아가던 손잡이가 헛도는 느낌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돌린 끝에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휴… 정말 뭐가 씌었나.”

그는 투덜거리며 현관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잠금쇠가 ‘철컥’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현우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깊게* 잠기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안에서 잠긴 듯한. 그는 불안한 기분에 다시 손잡이를 잡아 돌려보려 했다. 하지만 이미 잠겨 있었다.

점점 더 기괴한 일들이 현우의 일상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퇴근하고 돌아온 현우는 현관문을 열다 또다시 이상한 경험을 했다. 분명히 잠그고 나갔는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도둑이 들었나 싶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흐트러진 물건도, 부서진 흔적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그저 문을 열어놓고 나간 듯했다.

“누가 장난을 치나?”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과 몇 번 마찰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악의적인 장난을 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찜찜한 기분으로 문을 닫고 들어섰다. 그때, 쿵, 하고 거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숨을 죽인 채 거실로 향했다. 거실 중앙에는 그가 아끼는 낡은 도자기가 깨져 있었다. 고려 시대의 것이라며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현우에게는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자기는 선반 위에 있었는데, 어째서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는 걸까?

“이, 이건…!”

그는 떨리는 손으로 깨진 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매끄러운 자기의 파편들은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단순한 도자기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살아생전 그 도자기가 집안의 기운을 다스리는 물건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물론 현우는 코웃음 쳤지만.

그때였다.
파편을 든 현우의 손에서, 그리고 깨진 도자기 파편들 사이에서, 미세하지만 분명한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오묘한 빛이었다. 마치 숨 쉬듯 희미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현우의 몸 안에서, 마치 심장이 한 번 더 뛰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한 차가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오피스텔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지진인가 싶어 현우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천장의 형광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암전된 공간 속에서, 깨진 도자기 파편에서 뿜어져 나오던 오묘한 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게… 대체….”

현우는 공포에 질린 채 넋을 잃고 주저앉았다. 사방이 어둠에 잠긴 가운데, 거실 저편에서 무언가 기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스스슥. 마치 거대한 뱀이 몸을 비비며 다가오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현우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뿜어내던 도자기 파편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린 듯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파편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이내 하나의 거대한 형체를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형체는 점점 더 커지고, 붉고 푸른빛이 번갈아 깜빡이며, 현우를 향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흐릿하지만 분명히, 섬뜩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그림자가 현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현우의 고막을 찢고 들어오는 듯한 비명이었다.

“으아아악!”

현우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등 뒤에 느껴지는 차가운 벽에 부딪혔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눈앞에서 서서히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투명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현우는 얼핏, *눈동자*를 본 것 같았다. 수천 년의 세월을 담은 듯한, 깊고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가 현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그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순간, 현우의 몸은 굳어버렸다. 입도 떼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뛰는 것을 멈췄다.

오피스텔 1204호, 현대 도시의 한가운데서, 김현우는 생전 처음으로 ‘이계(異界)’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은, 그의 모든 상식을 초월하는, 신선(神仙)의 경계에 걸쳐진 듯한 기이하고도 거대한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