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숨 막힐 듯한 도시의 밤은 늘 그랬듯 침묵과 소음의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김민준은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부터 시작된 지루함과 피로를 질질 끌고 자신의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9층, 복도식 아파트의 낡은 문은 언제나처럼 삐걱거렸고, 퀘퀘한 복도 냄새가 잠시 실내로 스며들었다 사라졌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풀고, 축 늘어진 몸을 소파에 파묻었다. TV 리모컨을 찾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컵 하나.

“응?”

방금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분명 신발장 옆 바닥에 놓여 있던 머그컵이 소파 앞 탁자 위로 옮겨져 있었다. 민준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아니면 내가 아까 잠깐 놓았었나?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피곤하면 별 생각 다 드는 법이지.

다음날 아침, 출근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향하던 민준은 다시 한번 멈칫했다. 어제 밤 분명 탁자 위에 두었던 머그컵이 식기 건조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물기가 완벽하게 말라 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 설거지까지 한 모양새였다.

“내가… 어제 설거지를 했나?”

아무리 기억을 짜내도 어제의 피곤한 몸으로 설거지를 할 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누나가 몰래 왔다 갔나? 아니, 이 시간에? 민준은 누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제 밤에 우리 집에 왔었어?’ 잠시 후 ‘미쳤냐? 나 야근했어.’라는 퉁명스러운 답장이 왔다.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분명 뭔가 착각했을 것이다. 혹은 잠결에 내가 했을 수도 있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며칠 후, 현상은 점점 기묘해지기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컴퓨터로 웹 서핑을 하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면, 분명 켜두었던 모니터가 꺼져 있거나,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 실행되어 있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는데, 거실의 스탠드 등이 스스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전기가 나갔다 들어오는 건가 싶었지만, 주변 이웃집들은 멀쩡했다.

“젠장, 이러다 전기 요금 폭탄 맞는 거 아니야?”

민준은 전기 기사라도 불러봐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물건의 이동’이었다. 열쇠는 현관 옆 열쇠걸이에 두면 다음 날 아침 베란다 창틀에 놓여 있었고, 읽던 책은 분명 침대 옆 협탁에 있었는데, 거실 바닥에 펼쳐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민준은 잠에서 깨어났다. 한밤중인데도 귀가 찢어질 듯한 고음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지만, 소리는 점점 선명해지며 민준의 아파트 안을 맴돌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웃집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까웠다. 그는 공포에 질려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휘파람 소리는 거짓말처럼 뚝 끊겼고, 대신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쾅, 쾅, 쨍그랑!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플래시를 켜자,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책들이 책장에서 쏟아져 나와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화분은 깨져 흙이 흩뿌려져 있었다. 유리 조각들이 불빛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누… 누구야?”

민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방 안을 감도는 섬뜩한 기운은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민준은 결국 휴가를 내고 지쳐 보이는 눈으로 아파트 관리실을 찾아갔다. “요즘 저희 집에서 이상한 현상들이 계속 일어나서요. 누가 침입한 흔적은 없는데, 물건들이 계속 움직이고, 소리가 나고…” 관리소 직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민준을 바라봤다. “아, 손님. 혹시 요즘 피곤해서 그러신 건 아니고요? 그런 일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지요.” 민준은 답답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집으로 돌아온 민준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집 안 곳곳에 작은 카메라를 설치했다. 핸드폰과 연결해 실시간으로 집 안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설정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거실에서 잠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밤새도록 카메라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자정을 넘어서자, 사건이 터졌다.
거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가 갑자기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액자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확인했다. 영상 속에서 액자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마치 누군가 집어 던진 것처럼 힘껏 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건… 이건 진짜야…”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였다. 부엌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 그릇들이 공중에 뜬 채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투명한 손이 그릇들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민준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멈춰! 제발, 멈춰!”

그가 소리치자, 그릇들은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났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물이 흥건하게 젖은 바닥이 민준의 발밑에서 찰박거렸다.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그때, 웅웅거리는 낮은 진동이 온 집안을 흔들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힘없이 떨어지고, 천장의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민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실 벽이었다. 평범한 흰색 벽지가 갑자기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물결이 치는 것처럼, 혹은 거울 속에 비친 상이 왜곡되는 것처럼. 벽지가 사라진 자리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돌벽이 드러났다. 돌벽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내뿜었고, 그 틈새로 알 수 없는 형태의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뭐… 뭐야… 이건 또…”

민준은 주저앉았다. 꿈일까? 악몽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진동은 더욱 강해졌고, 이제는 바닥까지 들썩이는 듯했다. 돌벽의 틈새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어딘가 축축한 냄새와 함께 섬뜩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민준의 뺨을 스쳤고, 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벌어진 틈새 너머로 보이는 것은 더 이상 그의 아파트가 아니었다. 기괴하게 솟아난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 그리고 그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보랏빛 하늘. 숲의 바닥에는 이끼인지 풀인지 알 수 없는 푸른색 식물들이 뒤엉켜 자라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이제 더 이상 장난스러운 유령의 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잇는 통로가 억지로 열리면서 생기는 부작용 같았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 틈새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강력한 중력을 느꼈다.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아파트 내부의 모든 가구들이 그 틈새를 향해 날아갔다.

“안 돼! 으아아악!”

마지막으로 그가 본 것은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푸른빛의 틈새, 그리고 아파트 벽 너머로 보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풍경이었다. 눈부신 빛과 함께 몸이 격렬하게 회전했고, 그 순간 그의 의식은 끊겼다.

민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익숙한 아파트 천장이 아닌, 기괴하게 뒤틀린 나뭇가지들이 얽혀 만든 돔 형태의 천장이 펼쳐져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축축하고 부드러운 풀들이 손에 느껴졌다. 등 뒤로는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아파트 벽의 잔해가 보였다. 하지만 그 벽은 이제 주변의 기묘한 식물들에 둘러싸여 마치 오래된 유적처럼 서 있었다.

차갑고 신비로운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보랏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 대신 떠 있는 것은 거대한 두 개의 달이었다. 하나는 창백한 은빛을, 다른 하나는 핏빛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이… 이곳은…”

익숙한 도시의 소음 대신, 정체불명의 짐승 울음소리와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민준은 온몸을 감싼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그를 이 세상으로 이끌기 위한 다른 세계의 초대장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파트에서 시작된 기괴한 현상은, 결국 그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전이시킨 거대한 사건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이세계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