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검은 심장, 붉은 피
지옥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으르렁거렸다. 심장이 터질 듯한 격통이 온몸을 휘감았고, 이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에 쥐인 검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방패는 박살 났고, 온몸은 피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거대한 마수, ‘절망의 군주’가 마지막 발악을 하는 순간이었다.
“민호! 제발! 마지막 힐!”
이현은 목이 터져라 외쳤다. 시야는 이미 핏물로 엉망이었지만, 그의 정신은 마지막 한 줄기 희망을 붙잡고 있었다. 수 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가장 믿었던 친구. 이현이 목숨을 걸고 전방에서 버티는 동안, 민호는 항상 그의 뒤에서 치유의 빛을 보내주던 단 하나의 존재였다. 이 지옥 같은 던전, ‘종말의 회랑’의 최종 보스 앞에서, 둘은 드디어 승리의 문턱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얻어낸 마지막 기회였다.
절망의 군주는 찢어질 듯한 포효와 함께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거대한 발톱이 하늘을 찢고 내려왔다. 이현은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이미 방패는 부서진지 오래였다. 온몸의 뼈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필사적으로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민호가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처럼 성스러운 빛을 머금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민호…!”
간절한 목소리였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침묵이었다. 이현의 눈에 비친 민호의 얼굴에는 항상 보이던 걱정이나 격려 대신, 이해할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 미소는 섬뜩하리만치 차갑고, 낯설었다.
“수고했다, 현아.”
낮게 깔린 목소리는 이현의 귓가에 비수처럼 박혔다.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섬뜩한 울림이었다. 동시에, 치유의 빛 대신 차가운 푸른 마력이 이현의 발치에서 솟아났다. 그것은 치유가 아니었다. 둔화와 마비, 그리고 방어력 약화.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에, 민호가 이현에게 퍼부은 것은 적에게나 쓰는 최악의 디버프였다.
쿵!
절망의 군주의 발톱이 이현의 어깨를 짓눌렀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온몸에 울려 퍼졌다. 고통은 차라리 축복이었다. 진짜 고통은 심장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민… 호… 왜…?”
이현은 피를 토하며 민호를 바라봤다.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여 있었다. 절망의 군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현의 몸을 짓밟고 또 짓밟았다. 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것은, 민호의 시선이었다. 아무런 죄책감도, 슬픔도 없는, 오직 차가운 조롱만이 담긴 시선.
“왜냐고? 간단해. 네가 너무 강해서. 네가 너무 앞서나가서. 네 그림자에 가려진 삶이 지긋지긋했거든.”
민호는 한 걸음 다가와 피로 물든 이현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욕망으로 번뜩였다.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넌 늘 빛났지. 난 언제나 네 뒤에 있는 ‘이현의 친구 민호’였어. 하지만 이제 아니야. 이 ‘종말의 회랑’을 클리어한 영웅은… 나, 민호가 될 거야.”
그의 말이 끝나자, 이현의 몸은 절망의 군주의 마지막 일격에 산산이 부서졌다. 시야가 암전되고, 몸의 감각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뇌리에 박힌 것은 민호의 승리에 찬 미소였다.
‘민호… 이 배신자….’
피와 살이 흩어지는 고통보다, 친구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이 더 참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바쳤던 동료. 모든 것을 믿었던 형제. 그에게 끝까지 이용당하고 버려진 광경은 지옥보다 더 잔혹했다.
‘네놈을… 반드시… 반드시 죽여버릴 것이다…!’
그것이 이현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어둠 속에서, 오직 복수심만이 심장이 타들어 가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숨?’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스치는 낯선 풀 내음과 함께,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죽었을 터인데.
이현은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은 축축한 흙바닥이었다. 낡은 나뭇가지와 마른 잎사귀들이 그의 몸을 덮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고, 이따금씩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도시의 풍경도, 고층 빌딩도, 마수들이 득실거리던 던전의 어둠도 아니었다.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 고통은 절망의 군주에게 찢겨 죽어가던 때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다. 무엇보다, 그의 몸은 이전과 달랐다. 예리하게 단련된 근육질의 몸이 아니라, 다소 왜소하고 마른 체형이었다. 손을 뻗어 자신의 얼굴을 만져보자,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거칠고 뺨이 움푹 들어간 얼굴. 힘줄이 튀어나온 가느다란 팔.
“…이건… 내 몸이 아니야.”
이현은 눈앞에 흐르는 작은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창백한 피부, 깊게 꺼진 눈, 앙상한 턱선. 분명 자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의 얼굴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몸이었던 것처럼.
머릿속에서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다. ‘아렌’, ‘변방의 숲’, ‘오크족의 습격’… 뒤죽박죽된 파편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하나의 강렬한 감정이 이현의 심장을 때렸다.
‘죽음.’
이 몸의 주인이 죽어가고 있었다. 오크족의 습격으로 부모를 잃고, 숲 속에서 홀로 죽어가던 소년. 그 순간, 절망의 군주에게 죽임을 당한 이현의 영혼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것 같았다.
몸은 바뀌었지만, 그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증오는 선명했다.
“민호….”
입술 새로 흘러나온 이름은 차가운 맹세와도 같았다.
이현은 자신의 앙상한 주먹을 꽉 쥐었다. 힘없는 손이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복수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이 몸이 얼마나 약하든 상관없었다.
‘다시 시작한다. 이 몸으로, 이 세계에서. 그리고 반드시… 너에게 내가 겪은 고통을 돌려줄 것이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낯선 숲 속에서, 이현의 눈동자만이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복수를 위한 새로운 삶이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