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 속, 속삭이는 이름
천화원(天華院)은 대조선 팔도의 모든 명문가 자제들이 선망하는 요람이었다. 아니, 요람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곳은 드높은 봉우리 사이, 늘 구름에 잠겨 있는 고고한 성채에 가까웠다. 푸른 기와지붕이 겹겹이 이어진 본관은 천 년 묵은 거목처럼 웅장했고, 그 주변으로 크고 작은 별채들이 마치 행성처럼 질서정연하게 떠 있었다. 마법의 힘으로 지어진 이 건축물들은 해가 뜨면 찬란하게 빛났고, 밤이 되면 하늘의 별자리를 따라 희미한 영력을 뿜어냈다.
나는 현우였다. 남들이 말하는 ‘금수저’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특별한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제도 아니었다. 그저 영력에 대한 독특한 이해와 타고난 재능 덕분에 천화원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모든 것이 신기했고, 동시에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는 듯 느껴졌다. 특히, 밤이 되면 더욱 그러했다.
그날도 자정 무렵이었다. 학자금을 보조받는 특례생인 나는 매일 밤 남들보다 한 시간 더 도서관에서 연구에 몰두했다. 오늘은 고문헌학 개론 시간, 해묵은 영문(靈文)의 해석 과제가 나를 붙들고 있었다. 한글로 번역된 판본이 있긴 했으나, 원문의 숨겨진 뜻을 파고들고자 했다. 영력이 언어의 형태를 빌려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였다.
“흐음, 이 구절은…….”
나는 돋보기로 빛바랜 종이 위를 짚어 내려갔다. ‘세상의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곳, 영원의 봉인이 깨지리라.’ 시시한 예언처럼 들렸다. 대부분의 고문헌이 그렇듯, 과장된 표현과 은유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묘하게 달랐다. 천화원 개원 이래 수많은 선현이 손을 거쳐 갔을 텐데도, 마치 누구도 읽지 않은 듯 새하얀 서고의 한편에 조용히 꽂혀 있었다. 책의 이름조차 없었다. 그저 표지에 기묘한 문양만이 음각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 문양은 언젠가 천화원 본관 지하에 있다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금지된 서고의 문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오래된 비석처럼 거대한 철문, 그 위에 새겨진 검고 붉은 문양은 영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기운을 풍겼다. 어린 시절부터 천화원의 소문은 늘 무성했다. 학교 지하에는 이 세상 것이 아닌 끔찍한 금기가 잠들어 있다는 소문이었다. 당시에는 유치한 괴담이라 치부했지만, 지금 이 책을 보니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갑자기, 도서관 전체가 한 번 크게 울렸다. 마치 먼 곳에서 묵직한 돌덩이가 땅속으로 떨어진 듯한 진동이었다. 진동은 이내 가라앉았지만, 창밖의 고요했던 밤하늘은 더욱 깊은 어둠에 잠기는 것 같았다.
“무슨 소리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방은 여전히 고요했고,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귀를 기울였다. 미세한 떨림이 공기를 타고 전해져 오는 듯했다. 진원지는…… 본관 아래, 지하 깊은 곳이었다. 단순한 지진이라고 하기엔, 진동에 섞인 기운이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영력에 민감한 나의 신체가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착각이겠지. 너무 늦게까지 책을 봐서 그런가.”
애써 자신을 다독이며 책을 덮었다. 금지된 서고, 끔찍한 금기. 그런 이야기는 고작 어린아이들이 지어낸 허황된 소문일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러나 불안감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 발걸음은 저절로 고서가 꽂힌 통로를 벗어나, 도서관의 가장 외진 곳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오래된 문서 보관용 문이 있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듯, 삐걱거리는 경첩과 굳게 잠긴 자물쇠가 그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그 문틈 사이로 옅은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쇠락한 빛이 아니라, 마치 어둠을 삼키는 듯한 기묘한 푸른빛이었다. 그 빛은 희미했지만, 심장을 싸늘하게 식혔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 가까이 다가갔다. 차가운 쇠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한 기운이 코끝을 스쳤다. 귀를 기울이니, 아주 희미하게, 마치 바람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올 때 나는 것 같은 낮은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이… 스스스…
언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소리. 본능적으로, 그 소리는 이곳이 아닌, 훨씬 더 깊은 지하에서 올라오는 것이라고 직감했다. 호기심과 공포가 뒤섞여 나의 발길을 움직였다.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자, 차가운 쇠붙이가 마치 나의 영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곳은… 어디지?”
문득, 고서에서 읽었던 문구가 다시 떠올랐다. ‘세상의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곳, 영원의 봉인이 깨지리라.’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천화원의 뿌리, 그 아래 숨겨진 진실은 오직 피와 영력으로만 속삭여진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 문이 단순히 폐쇄된 서고의 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문득, 멀리서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순찰을 도는 선배 마법사들의 것이 분명했다. 나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푸른빛은 여전히 미약하게 새어 나왔지만, 더 이상 파고들 여유는 없었다. 그저 온몸을 사로잡는 냉기와 함께,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힐 뿐이었다.
내가 등 뒤로 물러서자,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리고 순간, 그 빛 속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사람의 형상은 아니었다. 차라리, 꿈틀거리는 연기 같기도 하고, 영롱한 빛의 조각들이 합쳐진 거대한 형체 같기도 했다. 그 형체가 문틈을 메울 듯이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서관을 뛰쳐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내 가슴속 불길한 예감은 쉬이 식지 않았다. 천화원 지하, 그 금지된 공간에 갇혀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밤 우연히 그 존재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 버린 것이었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그 끔찍한 진실의 그림자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둠 속, 속삭이는 이름이라…….”
나는 텅 빈 복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어째서인지, 아까 그 희미한 소리 속에서 어떤 이름이 들린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너무나 오래되어 잊힌, 금지된 이름.
다음날 아침, 해가 뜨자 모든 것이 다시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의문과 공포의 씨앗이 심겨 있었다. 천화원, 이 고고한 마법의 성채는 과연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비밀은, 과연 대조선에 어떤 파국을 불러올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