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은 길고 긴 하루의 끝을 스마트 침대에 몸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천장에는 은은한 간접조명이 빛나고 있었고, 창밖으로는 수백 개의 마천루가 뿜어내는 인공의 별빛이 펼쳐져 있었다. 그의 아파트, 34층, 3405호. 도시의 중심에서 한참 벗어난 곳이었지만, 고층이라는 이점 덕분에 밤하늘은 언제나 그를 압도했다.
“시스템, 주변 소음 억제. 온도는 24도 유지. 플레이리스트 ‘나른한 밤’ 재생.”
그의 목소리에 반응한 인공지능 비서 ‘세린’은 나긋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 지혁님. 편안한 밤 되세요.”
잔잔한 재즈 선율이 공간을 채우고, 얇은 벽 너머의 옆집 소음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지혁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완벽한 고요, 완벽한 휴식. 적어도 그가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말이다.
‘딸깍.’
아주 미세한 소리였다. 마치 저절로 문이 잠기는 소리 같기도, 아니면 누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혁은 눈을 떴다. 거실의 작은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유리컵이 아주 미세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뭐야, 내가 놓다가 그랬나?’
피곤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 부쩍 이런 자잘한 실수가 늘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컵을 똑바로 세워놓았다. 이내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다음날 아침.
새벽 일찍 일어나 가볍게 운동을 하고 샤워를 마친 지혁은 주방으로 향했다. 자동으로 내려진 블라인드가 서서히 올라가며 도시의 아침 풍경을 드러냈다. 토스트가 팝업 되고, 드립 커피 머신에서는 향긋한 내음이 피어올랐다.
“세린, 오늘 일정 확인.”
“오전 9시 연구소 미팅, 오후 3시 데이터 분석팀 브리핑. 특이사항 없습니다.”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바로 그때, 그의 시야 한구석에 무언가 잡혔다. 주방 한쪽 벽에 걸려 있던 액자. 그의 오래된 졸업 사진이 담긴 액자가, 아주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어제 유리컵처럼.
‘또? 내가 벽에 부딪혔나?’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항상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편이었다. 그는 액자를 다시 똑바로 맞추고, 어깨를 으쓱였다. 사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사소한 일들은 그날 저녁부터, 사소하지 않게 변하기 시작했다.
늦은 저녁, 퇴근한 지혁은 저녁을 먹고 리클라이너에 앉아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로 뉴스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거실의 조명이 깜빡였다. 한번, 두 번, 세 번. 마치 신호라도 보내는 것처럼 불규칙하게 명멸했다.
“세린, 조명 점검해봐.” 지혁이 말했다.
“지혁님, 조명 시스템은 정상입니다. 전력 공급도 안정적입니다.” 세린의 차분한 목소리.
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왜 깜빡인 거지?”
“알 수 없습니다. 혹시 외부 간섭이 있었는지 확인해보겠습니다.”
조명이 깜빡이는 현상은 멈췄지만, 지혁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작은 균열이 생겼다. 불안감이라기보다는, 의문이었다. 첨단 시스템으로 무장한 이 아파트에서 이런 사소한 오류가?
밤이 깊어갈수록, 기묘한 현상들은 점차 대담해졌다.
그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거울에는 뿌연 김 서림 속에 굵직한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마치 누군가 거울을 쓸어내린 것처럼. 지혁은 소름이 돋았다. 그는 집에 혼자였다. 어제 닦아놓은 거울은 원래 깨끗했다.
“누구… 없어?” 지혁은 빈 집을 향해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애써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 했다. 거울에 맺힌 습기가 그렇게 보인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샤워하기 전에 무심코 만졌던 것을 잊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할 때, 그의 의심은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안방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분명히 잠그고 잤는데? 지혁은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침대 옆의 스탠드를 켰다. 은은한 불빛이 방 안을 비췄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청이었나?’
스탠드를 끄려는데, 다시 ‘끼이이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소리가 훨씬 더 명확했다. 마치 천천히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듯한 소리.
지혁은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문 쪽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문이 스스로 ‘덜컹’ 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그는 뒷걸음질 쳤다. 숨을 헐떡이며 뒷목을 만졌다. 분명히, 분명히 잠겨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는 문고리를 돌려 보았다. 굳게 잠겨 있었다.
‘대체… 뭐야?’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아파트 시스템 오작동? 해킹? 아니,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해킹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지혁은 눈 밑이 검게 드리운 채 출근 준비를 했다. 밥맛은 없었고, 커피만 연거푸 들이켰다.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번 아파트의 모든 시스템을 점검했다. 세린의 진단은 여전히 ‘정상’이었다. 전력 공급은 안정적이고, 내부 센서들은 모두 완벽하게 작동 중이며, 외부 네트워크 간섭도 전혀 없었다.
“지혁님, 특별한 이상 감지되지 않습니다.” 세린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납득할 수 없는 현실에 지혁은 차라리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일시적인 시스템 오류겠지. 곧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그날 밤,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되었다.
지혁은 퇴근 후 집에 돌아오자마자,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싸늘한 한기가 그를 감쌌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실의 풍경이었다.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책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중 몇 권은 펼쳐진 채였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접시들은 뒤집혀 있었고, 그 위에 있던 포크와 나이프는 제멋대로 꽂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장난을 친 것처럼.
“누구야?!”
지혁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아무도 없었다. 모든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다. 세린에게 침입 경보가 울리지 않은 것도 당연했다.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감정이 그를 덮쳤다. 이건 더 이상 사소한 오류가 아니었다. 명백한 ‘어떤 존재’의 개입이었다.
그때, 거실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켜지더니,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졌다. 평소에는 볼 수 없던 기묘한 기호들이 번개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혁은 얼어붙은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화면 속에서 기호들이 하나의 형태로 모이는가 싶더니, 이내 정지했다. 그것은 픽셀이 깨진 이미지였지만,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한, 일그러진 얼굴의 형상.
그리고, 그것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면 속의 형상이 지혁을 똑바로 응시하는 듯했다. 그 순간,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벽에 걸린 액자들이 우르르 떨어지고, 천장의 간접조명들이 일제히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윙- 콰아아앙!’
냉장고 문이 스스로 활짝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하고, 세탁기에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오디오 시스템에서는 불규칙하고 소름 끼치는 노이즈가 폭발적으로 울려 퍼졌다.
“세린! 시스템 종료! 전부 꺼!” 지혁이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지혁님, 시스템 제어권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세린의 음성이 불안정하게 떨렸다.
지혁은 패닉에 빠졌다. 그는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열쇠를 돌리려 했지만, 문고리가 뜨겁게 달아올라 만질 수가 없었다.
“젠장! 열어! 열라고!”
주먹으로 문을 쾅쾅 두드렸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힘에 의해 외부에서 단단히 걸쇠가 채워진 것처럼.
바로 그때, 거실 중앙의 공중에서 무언가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는 에너지 덩어리가 마치 수증기처럼 뭉쳐지더니, 점점 또렷해졌다. 그것은 어떤 물리적인 형태를 갖춘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듯한 강력한 압도감을 뿜어냈다.
점점 더 커지는 존재감. 지혁의 등 뒤에서, 그것은 마치 거대한 눈처럼 그를 응시하는 듯했다.
지혁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숨이 막혔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SF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괴한 현상이었다.
‘이게… 대체… 뭐야…’
아파트 34층, 3405호. 도시의 심장부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그의 공간은, 이제 설명할 수 없는 불협화음으로 가득 찬 미지의 지옥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지혁은 홀로 갇혀 있었다.
그 푸른 빛깔의 존재는 마치 그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 점점 더 선명하게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텅 빈 공간에, 알 수 없는 힘이 응축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제는 눈앞에 명확히 서 있었다.
정적. 폭풍 전야의 정적이 아니라, 폭풍 그 자체의 한가운데서 모든 소리가 압축된 듯한 섬뜩한 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지혁의 심장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하나 더 있었다.
그 푸른빛의 에너지 덩어리에서, 아주 희미하게, 마치 속삭이는 듯한, 그러나 동시에 수백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듯한, 알 수 없는 음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언어도 아니었고, 단순한 노이즈도 아니었다.
그것은… 비명이었다. 그의 심장을 꿰뚫는, 고요하고 차가운, 그러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비명.
지혁은 눈을 감았다.
이것이 끝이라면, 적어도 저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감는 순간, 그 비명은 더욱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이 아파트는, 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불협화음의 서막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