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도시의 숨결
차디찬 바람이 폐허가 된 도시의 심장을 후벼 파고들었다. 강민준은 낡은 방수 재킷의 후드를 바싹 조여 매며 무너진 건물 잔해를 밟고 올라섰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콘크리트 조각과 앙상한 철근들이 으스스한 마찰음을 토해냈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낡은 간판이 삐걱거리는 소리는, 마치 이 거대한 유령 도시가 내쉬는 숨소리 같았다.
오늘 그의 목표는 저 너머, 스카이라인을 찢어발긴 듯 흉물스럽게 서 있는 70층짜리 오피스 빌딩이었다. ‘그날’ 이후, 멀쩡한 건물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나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고층 빌딩들뿐이었다. 높은 곳일수록 오염이나 변이된 생명체들의 접근이 어려웠기에, 그곳에 무언가 남아있을 확률이 높았다. 물론 그만큼 접근하기도 힘들었지만.
민준은 허리에 찬 낡은 밧줄을 한 번 더 확인하고는, 옆구리에 찬 손도끼를 단단히 고쳐 쥐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세한 먼지 입자들이 햇빛에 부서져 반짝이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기이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천 조각을 꺼내 코와 입을 가렸다. 방독면은 이미 오래전에 기능을 잃었다.
수십 미터 아래는 아비규환의 흔적만이 가득했다. 뒤집힌 차량들, 깨진 유리창,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구덩이들. 한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거리는 이제 죽음의 정적만이 감돌았다. 가끔 바람에 흩날리는 낡은 비닐봉투만이 이 도시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음을 알리는 유일한 움직임이었다.
민준은 능숙하게 깨진 창문 프레임을 잡고 몸을 지탱했다. 균열이 생긴 콘크리트 벽에 손도끼를 박아 넣고는, 밧줄을 걸었다. 낡았지만 튼튼한 장갑을 낀 손에 힘줄이 불거졌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한 층, 한 층.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듯한 등반이 계속됐다. 층수를 세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그리고 오늘 밤을 버텨낼 식량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대략 40층쯤 올라섰을 때였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웅얼거리는 소리에 민준의 움직임이 멈췄다. 등골이 오싹했다. ‘그것’들이었다. 변이된 생명체들. 대부분의 지상 생명체들은 ‘그날’ 이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변이되거나 사라졌다. 특히나 저런 소리를 내는 종류는 지능이 높고 공격적이었다.
민준은 벽에 바싹 몸을 붙였다. 소리의 방향을 가늠했다. 다행히도 그가 올라온 방향이 아닌, 빌딩의 안쪽 깊숙한 곳에서 나는 소리였다.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이니, 날카로운 발톱이 금속을 긁는 듯한 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그들은 사냥 중이었다. 아니면 영역 다툼을 벌이고 있거나. 어느 쪽이든 민준에게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숨을 죽이고 한참을 기다렸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다시 움직였다. 심장이 발버둥치듯 뛰고 있었다. 망할, 운이 좋았어.
마침내 50층, 오래된 사무실 공간에 겨우 발을 들여놓았다. 바닥은 검은 곰팡이와 이끼로 뒤덮여 축축했고, 천장에서는 뚝, 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함을 깼다. 한때 빼곡했던 사무용 가구들은 뒤집히거나 산산조각 나 있었다. 컴퓨터 모니터는 껍데기만 남았고, 서류들은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였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섰다. 혹시 모를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였다. 복도를 따라 걷던 그의 눈에, 문이 굳게 닫힌 하나의 공간이 들어왔다. 다른 사무실들과 달리 문이 비교적 온전했다. 철제 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희미하게 ‘자료 보관실’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심장이 뛰었다. 이런 곳이라면 어쩌면, 아주 어쩌면, ‘그날’ 이후 가치가 없어진 물건들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오염되지 않은 통조림 하나라도.
민준은 손도끼로 잠금장치를 조심스럽게 파손했다. 굳게 닫혔던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내부에서 풍겨 나오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플래시를 켜 안을 비추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실망스러움과 동시에 작은 희망을 안겨주었다.
대부분의 자료는 습기와 시간에 의해 훼손되었지만,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철제 캐비닛들은 비교적 멀쩡했다. 그리고 그 캐비닛들 사이, 바닥에 놓인 상자 하나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상자들과 달리 방수포로 덮여 있었고, 꽤나 단단하게 밀봉된 듯 보였다.
민준은 서둘러 상자에 다가갔다. 방수포를 걷어내자, 낡았지만 깨지지 않은 나무 상자가 드러났다. 상자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적혀 있었다. ‘비상 보급품’.
손이 떨려왔다. 설마, 설마.
닫힌 상자를 열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래된 비상식량 팩과 함께, 멸균 처리된 듯한 작은 의료용 키트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꽂혀 있는 낡은 무전기 한 대.
무전기는 오래된 것이었지만, 전원이 연결된 상태였다. 어쩌면 작동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그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이 잿빛 도시에서 홀로 살아남은 지 5년.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생존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본 적이 없었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전원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작은 불빛이 깜빡였다. 작동하는 것이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는 사라졌다.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사람의 목소리 같은 것이 섞여 들려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너무 작고 왜곡되어 명확하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어떤 메시지 같았다.
“…여기는… 생존… 0-2… 답… 하라…”
짧고 끊어지는 음성. 노이즈에 묻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생존’과 ‘답하라’는 단어는 분명하게 그의 귀에 박혔다.
민준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도시의 정적 속에서 홀로 고립되어 있던 그에게, 이 작은 무전기는 어쩌면 잊고 있던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전기를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송신 버튼 위에서 망설였다. 과연, 저 목소리에 응답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이 끔찍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용히 숨죽이며 홀로 버티는 것이 최선이라고 스스로에게 세뇌해왔다.
하지만, 너무나도 고독한 5년이었다.
민준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송신 버튼을 눌렀다.
“…여기는 강민준… 들리나…?”
그의 목소리가 잿빛 도시의 공허를 타고 희미하게 퍼져나갔다. 정적이 흘렀다.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다시 노이즈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실망감과 동시에, 어쩌면 그래야만 한다는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그때였다. 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뚫고, 아까보다 훨씬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린다! 이쪽은 ‘새벽’… 생존자 확인! 위치를 알려라!”
민준의 눈이 커졌다. 희미했던 불씨가, 그의 심장 속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이 잿빛 도시 속에서, 드디어 새로운 숨결을 느꼈다. 어쩌면,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할 기회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