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내렸다. 무덤덤하게 지켜보던 하늘은 기어이 인내심의 끈을 놓아버린 듯, 세상 모든 죄를 씻어내려는 양 거칠게 울부짖으며 퍼부었다. 빗줄기는 갓 파헤친 흙더미를 질척하게 만들었고, 흙과 함께 뒤섞인 핏물은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강무는 그 빗속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방금 묻힌 아내와 자식들의 무덤이, 그리고 그 앞에 쓰러진 것은… 그가 온몸으로 믿고 따랐던 형제, 운랑이었다.
“크, 크윽… 강무… 네가, 네까짓 게 감히…!”
운랑은 허벅지에 깊숙이 박힌 검을 뽑아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손가락 끝은 이미 차가운 흙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강무의 얼굴에 박혔다. 빗물에 씻겨 내리는 핏자국 사이로 드러난 강무의 눈은, 지옥에서 갓 기어 올라온 악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내가 감히? 네놈이 감히,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갔는데, 어찌 감히 그따위 말을 지껄이느냐!”
강무의 목소리는 빗소리보다 더 거칠게 찢어졌다. 수십 년 전, 운랑과 강무는 형제처럼 지냈다. 둘은 강호에 이름을 떨치는 무문에서 함께 무예를 익혔고,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굳건한 정으로 맺어져 있었다. 숱한 위기 속에서 서로의 목숨을 구했으며, 장래에는 무림을 평정할 두 명의 대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운랑은 강무의 모든 것을 탐했다. 그가 일궈낸 명예, 그의 강호 무력, 심지어 그의 아내마저…
“나락의 심연에서 기어올라오는 매 순간, 나는 오직 너를 위해 살았다. 운랑, 나의 친구, 나의 형제… 너의 심장을 찢어 발기는 그 날만을 기다리며!”
강무는 발로 운랑의 부러진 어깨를 짓밟았다. 운랑의 입에서 피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얼굴은 고통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강무는 그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과거의 기억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날, 등을 맞대고 혈투를 벌이던 날, 서로의 미래를 이야기하며 웃음 짓던 날… 그 모든 아름다운 기억들이, 지금의 잔혹한 현실 앞에선 독이 든 칼날이 되어 심장을 후벼 팠다.
“네놈은 내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내가 일궈낸 문파를 빼앗고, 나의 아내와 자식들을… 너희들의 손으로 참혹하게 죽였다. 내가 너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겼을 때, 너는 나의 심장에 비수를 박았다.”
강무는 운랑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빗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져 내렸다.
“기억하느냐? 천마산 기슭, 그 깊은 골짜기에 나를 던져버리던 그 순간을? 네놈은 비웃었지. 한낱 강무가 어찌 그 심연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냐며. 허나 나는 살아 돌아왔다! 너를 찢어 죽이기 위해, 지옥의 밑바닥에서 피와 살을 뜯어먹으며 기어 올라왔다!”
운랑은 강무의 눈에 비친 자신의 처참한 모습을 보았다. 그의 야망은 이제 재가 되어 흩어졌고, 그의 문파는 강무의 손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많은 피와 죽음이 그를 따랐고, 강무는 이 강산을 피로 물들였다. 그의 복수는 단순히 운랑 한 사람에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운랑을 도왔던 모든 이들, 운랑의 발자취를 따라 야망을 좇았던 모든 세력들이 강무의 검 앞에 스러져갔다. 그가 돌아온 지 꼬박 삼 년, 강호는 그를 ‘피의 검귀’라 불렀다. 살아남은 자들은 그의 이름을 감히 입에 담지도 못했고, 밤이면 그의 환영에 시달렸다.
“하, 하하… 결국 네가 이겼구나… 강무… 하지만… 너도 결국… 나처럼… 괴물이 되었을 뿐이야… 이 피로 얼룩진 손으로… 과연…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운랑의 목소리는 점차 가늘어졌다. 그의 눈은 이미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강무는 그 말을 듣고 픽, 하고 비웃었다.
“평안? 내가 언제 평안을 바랬느냐. 나의 평안은 너희들에게 죽음을 안겨주는 순간에 이미 찾아왔다. 너의 존재가 나의 평화를 앗아갔고, 너의 죽음이 나의 평화를 돌려주었다. 허나… 진정한 평화는 오직 너의 마지막 숨통이 끊어지는 순간에 찾아올 것이다.”
강무는 허리춤에서 비수를 꺼냈다. 그 비수는 그의 아내가 품에 간직하고 있던 유일한 유품이었다. 언제나 그의 아내를 지켜주었던 그 비수. 이제 그 비수는 마지막 복수의 도구가 될 참이었다.
“잘 가거라, 나의 오랜 친구. 나의… 형제. 지옥에서 보자.”
강무의 손에 들린 비수가 섬광처럼 운랑의 심장을 꿰뚫었다. 운랑의 몸은 경련했고, 그의 눈은 완전히 뒤집혔다. 마지막 피거품을 토해내며, 운랑의 생명이 끊어졌다. 그의 몸은 힘없이 흙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강무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빗물은 그의 몸을, 그의 얼굴을, 그의 검을 끊임없이 씻어 내렸다. 피로 얼룩졌던 검은 점점 깨끗해졌지만, 강무의 눈빛은 결코 맑아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복수심도, 증오도, 슬픔도… 모든 것이 타올라 재가 되어버린 텅 빈 허무함만이 가득했다.
그는 천천히 운랑의 시신 옆에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차가운 흙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슬픔인지, 고통인지, 아니면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인지… 알 수 없었다. 빗소리만이 텅 빈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강무는 그 빗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오직 차갑게 식어가는 흙냄새와, 빗물에 섞인 피 냄새만이 코끝을 스쳤을 뿐. 그의 복수는 완벽하게 끝났다. 하지만 그의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는 이제, 이름 없는 망령이 되어 무림을 떠돌 운명이었다. 영원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