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1화: 틈새의 속삭임
오늘도 지옥 같은 하루였다. 현우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숨을 헐떡였다. 31층, 그의 작은 안식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눅진한 공기가 그를 맞았다. 한낮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등에선 오싹한 한기가 느껴졌다. 그는 피곤에 절은 눈으로 거실을 훑었다. 늘 그랬듯 아무도 없는 공간.
“젠장, 에어컨 좀 켜놓고 나올걸.”
그는 중얼거리며 리모컨을 찾았다. 소파 위, 탁자 위, 바닥.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제 분명 자기 전에 탁자 위에 두었던 것 같은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고개를 저었다. 피곤해서 착각했겠지. 그는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꺼내 마셨다. 쨍한 얼음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살 것 같았다.
물을 마시고 돌아섰을 때, 거실 한구석의 스탠드 등이 순간 깜빡였다. 현우는 눈을 비볐다. 피로가 심해서 눈에 이상이 생겼나? 하지만 잠시 후, 스탠드 등은 다시 한번 찌릿, 하고 깜빡였다. 이번에는 확실히 보았다.
“뭐야, 전압이 불안정한가?”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스탠드 쪽으로 다가갔다. 전선은 단단히 꽂혀 있었고, 램프도 멀쩡했다. 만져보니 미지근한 온도.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그는 전원 플러그를 뽑았다가 다시 꽂았다. 그러자 스탠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빛났다.
“빌어먹을… 낡았나.”
현우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며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면 조금 나아질 것 같았다. 샤워기를 틀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뜨거운 물줄기가 어깨를 타고 흐르자 몸의 긴장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욕실 문이 삐걱,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분명 문을 잠갔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히.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문은 천천히, 안쪽으로 활짝 열렸다. 칠흑 같은 어둠이 욕실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것 같았다. 복도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현우는 손을 뻗어 욕실 스위치를 눌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마치 전기가 나간 것처럼.
“씨발!”
그는 비명을 지르며 샤워기를 끄고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누가 침입한 건가? 하지만 어떻게? 31층에, 문은 잠겨 있었는데?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더듬어 샴푸통을 움켜쥐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무기가 필요했다.
한참을 그렇게 웅크리고 있는데, 거실에서 뭔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 깨지는 소리는 아니었다. 둔탁하게, 단단한 물건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현우는 공포에 질린 채 욕실 문틈으로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어둠 속에서 거실의 윤곽이 희미하게 보였다. 창문 밖 도시의 불빛이 흐릿하게 그림자를 드리웠지만, 그 그림자들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없어.”
그는 겨우 입을 열어 속삭였다. 그때, 발치에서 ‘슥삭, 슥삭’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맨발로 타일 위를 끄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샴푸통을 꽉 쥐고 허둥지둥 욕실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히지 않았다. 무언가 문틈에 끼어 있는 것처럼.
그는 온몸의 힘을 다해 문을 밀어붙였다. 낑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은 마침내 닫혔다. 하지만 쿵, 하는 닫히는 소리가 나기도 전에, 문 안쪽에서 섬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이… 꿈틀거린다…
현우는 귀를 의심했다. 환청인가? 하지만 너무나 선명했다. 낮고, 긁는 듯한 목소리.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속삭이는 것 같은 불쾌한 화음이었다. 그는 비명을 삼키고 욕실 구석으로 물러섰다.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어… 그대에게서 시작될 것이다…
현우는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미쳤어. 내가 미쳤거나, 아니면 이 공간이 미쳤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는 휴대폰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욕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화면은 먹통이었다.
그때, 욕실 거울에 무언가 비쳤다. 현우는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 자신의 뒤편, 어둠 속에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너무나 길고 비틀려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그림자는 느릿하게 움직이며 거울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 팔이 거울 표면에 닿는 순간, 거울 전체가 파문처럼 일렁였다. 마치 물속에 돌을 던진 것처럼. 그림자의 형체가 더욱 선명해졌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히 그림자가 아니었다. 시커먼 진흙처럼 꿈틀거리는 형체는 수많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눈동자들은 현우를 향해 동시에 번뜩였다.
그리고 그 순간, 욕실의 모든 수도꼭지에서 새까만 물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변기에서는 끈적한 검은 액체가 역류했고, 하수구에서는 끔찍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현우는 구역질을 참으며 거울 속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그 존재의 입이 비정상적으로 길게 찢어지며, 다시금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속삭임이 아니었다. 찢어질 듯한 고음의 비명에 가까웠다.
— 이곳은… 그대의 것이 아니야… 이제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거울 속의 존재가 거울 밖으로 손을 뻗었다. 끈적한 검은 액체가 거울 표면을 넘어, 현우를 향해 흘러내렸다. 손가락 끝이 현우의 발등에 닿는 순간, 살이 짓이겨지는 듯한 고통이 발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현우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비명은 목구멍에서 막혀 나오지 못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뒤돌아 욕실 문을 향해 미친 듯이 돌진했다. 문을 열고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문고리는 이미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고, 그의 손이 닿자마자 살점이 타들어 가는 고통이 엄습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며 현우는 문 앞에 쓰러졌다. 그의 등 뒤에서는 거울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렸고, 동시에 수십 개의 차가운 손이 그의 몸을 움켜쥐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둠이 그를 완전히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세계의 틈새가 열린 것일까. 아니면, 이 아파트가, 이 도시가, 애초부터 거대한 존재의 덫이었을까. 현우는 의식의 끈을 놓으면서 생각했다.
내 아파트는… 어디로 가버린 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