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룡쟁천(飛龍爭天) 117화: 칼날 위를 걷는 바람
광활한 백옥 무대 위로 먹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수만 관중의 숨소리마저 짓눌러버릴 듯한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두 명의 그림자가 대치하고 있었다. 이제 막 치열한 격전을 끝낸 듯, 그들의 도포는 찢기고, 몸에서는 뜨거운 김이 솟아올랐다.
혈림, ‘철혈검마’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은 거구의 사내는 무대 중앙에 굳건히 뿌리를 박은 거목처럼 서 있었다. 찢어진 검은 도포 사이로 언뜻 보이는 단단한 근육과 그의 눈에 서린 피처럼 붉은 광채가 그의 위압감을 더했다. 손에 든 거대한 철검은 그의 무수히 많은 전투를 증명하듯 온통 상흔으로 가득했다. 방금 전 연아의 맹렬한 검격을 막아낸 탓인지, 철검 끝에서 미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의 맞은편에는 ‘청풍신검’ 연아가 서 있었다. 가녀린 몸매와는 대조적으로 그녀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운 빛을 뿜어냈다. 흰 비단 도포는 붉은 핏방울 몇 개가 꽃처럼 피어 있었으나, 그녀의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손에 든 푸른빛이 감도는 세검, ‘비연(飛燕)’은 마치 그녀의 일부인 양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후우…… 후우…….”
혈림의 거친 숨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그의 폐는 격렬한 움직임과 내공 소모로 인해 타들어 가는 듯했다. 그는 천하제일 무도회 ‘비룡쟁천’의 결승 무대에서 이토록 고전해본 적이 없었다. 상대는 겨우 스무 살을 갓 넘긴 어린 여인. 하지만 그 여인의 검은 칼바람처럼 예측 불가능하고, 번개처럼 빨랐다.
연아는 침묵했다. 그녀의 심장도 격렬하게 고동쳤지만, 숨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자신을 제어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관중들의 시선, 천하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라는 막대한 중압감 속에서도 그녀의 정신은 오직 혈림의 움직임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강한…… 너무나 강하다. 철혈검마의 내공은 과연 소문대로 바다와 같군.’
연아의 뇌리에서 지난 공방이 스쳐 지나갔다. 분명 혈림의 검격은 예측할 수 있었다. 매번 엄청난 파괴력을 동반했지만, 그 궤적은 직선적이고 정직했다. 연아의 ‘비연검법’은 그런 직선적인 공격을 피하고 빈틈을 파고드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모든 공격이 막대한 ‘강기(剛氣)’를 두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비록 검끝으로 살짝 쳐내도 손목이 저릿할 정도의 압력이 밀려들었다.
“어린 계집이…… 제법이로구나.”
혈림의 입에서 겨우 말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져 있었지만, 그 속에는 연아를 향한 인정과 동시에 기필코 꺾고 말리라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군요, 철혈검마.”
연아의 목소리는 고요한 호수 같았다.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 그것이 혈림을 더욱 자극했다.
“흥! 이 늙은이의 ‘단죄검(斷罪劍)’을 정면으로 받아내고도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을까!”
콰앙!
혈림의 발이 백옥 무대를 박찼다. 무거운 굉음과 함께 무대가 깊게 패였다. 그의 거구가 바람을 가르며 연아에게 돌진했다. 철검은 허공을 가르며 엄청난 풍압을 일으켰고, 거대한 검날에는 피처럼 붉은 강기가 일렁였다. 그의 시그니처, 모든 것을 부수고 갈라버리는 ‘단죄검’의 첫 초식, ‘철벽 단죄(鐵壁斷罪)’였다.
연아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녀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온몸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들이 춤을 추는 듯한 기세였다. 혈림의 철검이 코앞에 다가오는 순간, 연아의 몸이 갑자기 뒤로 크게 젖혀졌다. 거의 바닥에 닿을 듯한 기이한 자세. 그와 동시에 ‘비연’이 푸른 섬광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쉬이잉! 핏-!
연아의 검이 빚어낸 날카로운 검기가 혈림의 팔뚝을 스쳤다. 철혈검마의 단단한 팔뚝이 비록 경공술과 내공으로 강화되어 있었지만, 연아의 검기는 살점을 깊게 파고들었다. 검은 도포가 찢어지고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크윽!”
혈림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균형을 잃었다. 그의 공격은 연아의 기이한 자세 때문에 헛바람을 가르고 말았다. 연아는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유려하게 솟아올랐고, 비연이 번개처럼 혈림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
혈림의 눈에서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피 흘리는 팔을 휘둘러 철검을 세웠다. 챙강! 푸른빛 검끝이 철검의 넓은 면에 부딪히며 섬광을 터뜨렸다. 엄청난 충격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연아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녀는 검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철검에 힘을 실어 밀어붙였다.
“뭣이……!”
혈림은 경악했다. 자신의 압도적인 힘으로도 밀어낼 수 없는 유연하면서도 끈질긴 힘. 그것은 연아의 내공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의미했다.
연아는 혈림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그 검선은 마치 나비가 춤을 추듯 예측 불가능했고, 그 속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쉬지 않고 뿜어져 나왔다. ‘비연검법’의 정수, ‘만화비연(萬花飛燕)’. 수많은 꽃잎이 흩날리듯 아름답지만, 그 하나하나가 치명적인 칼날이었다.
혈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철검을 방패 삼아 필사적으로 막아냈다. 챙강! 챙강! 챙챙챙! 쉴 새 없이 터지는 금속성 마찰음이 무대 위를 가득 채웠다. 그의 도포는 갈기갈기 찢겨나갔고, 팔다리에는 깊고 얕은 상처들이 늘어났다. 그의 몸은 마치 폭풍 속의 나뭇가지처럼 흔들렸다.
‘이대로 가면…… 위험하다. 저 계집은 빈틈을 만들 여지를 주지 않아.’
혈림의 머릿속에서 비상이 울렸다. 그는 강인한 체력과 깊은 내공을 바탕으로 장기전을 유도하는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연아는 그 장점을 무력화시키려는 듯 폭풍 같은 연격을 퍼부어 혈림을 몰아붙였다.
결단을 내린 듯 혈림의 얼굴에 독기가 서렸다. 그는 갑자기 밀어붙이던 철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엄청난 힘이 실린 일격에 연아는 잠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순간, 혈림은 온몸의 기운을 끌어모았다. 그의 몸에서 붉은빛 강기가 마치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죽어라, 계집!”
혈림은 고함과 함께 철검을 땅에 박았다. 콰앙! 무대가 다시 한번 진동했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이 허공을 갈랐다. 우르르릉! 혈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기운이 거대한 파도처럼 연아에게 쇄도했다. ‘철혈강기파(鐵血剛氣波)’. 모든 것을 짓뭉개버리는 혈림의 최종 초식이었다. 이는 단순히 내공을 방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정신력과 기운을 실어 상대의 기를 짓누르는 절대적인 압력이었다.
사방의 공기가 일그러지고, 관중석의 사람들은 숨을 헙 마셨다. 그들의 심장은 마치 고통에 찬 북처럼 두근거렸다. 저 파괴적인 기운을 과연 연아가 막아낼 수 있을까?
연아의 얼굴에는 처음으로 미세한 긴장감이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확고한 의지로 바뀌었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두 눈을 부릅뜨고 혈림을 응시했다.
‘그래, 철혈강기파…….’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철혈검마의 이 필살기를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정면에서 막아내려 한다면 필시 패배할 것이다. 피하려 해도 엄청난 기운의 파동이 사방을 뒤덮기에 온전히 벗어나기 힘들다.
그녀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입가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쳤다.
“비연검법…… 마지막 초식…… ‘천공무도(天空舞道)’!”
연아는 혈림의 맹렬한 강기파가 코앞에 닥쳐오자, 몸을 공중으로 솟구쳤다. 단순한 도약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이 허공에서 나비처럼, 때로는 칼날처럼 자유자재로 춤을 추었다. 붉은 강기의 파도가 그녀의 발밑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마치 그 파도 위를 걷는 바람처럼 가볍게 피하며 더욱 높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정점에 달한 순간, 그녀의 세검 ‘비연’이 아래를 향해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그 끝에는 온몸의 기운을 응축시킨 푸른빛 검기가 폭발할 듯이 모여 있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버릴 듯한 압도적인 기세였다.
“크아아아아!”
혈림은 자신의 강기파가 헛되이 흩어지는 것을 보며 절규했다. 그리고 그의 눈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연아의 검이 박혔다. 그는 본능적으로 철검을 들어 막으려 했지만, 그의 육신은 이미 수많은 상처와 기력 소모로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푸른 섬광과 붉은 기운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콰앙!!!!
귀청을 찢는 듯한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백옥 무대가 송두리째 흔들렸다. 두 고수의 모든 것이 담긴 마지막 일격이 격돌하는 순간, 무대 중앙에서 거대한 먼지 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관중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거나 비명을 질렀다. 그 누구도 이 압도적인 장면에 감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먼지 기둥이 서서히 걷히고, 그 안에서 두 사람의 실루엣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치열한 싸움의 승자는 누구일까?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단 하나의 검은, 과연 누구의 손에 들려 있을까?
무거운 정적이 다시 한번 무대를 감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