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잃어버린 시대의 메아리

찬란한 태양은 이미 서쪽 하늘 너머로 기울었지만, 엘로니아 마을의 오래된 기록 보관소는 여전히 그림자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창문으로 스며드는 마지막 햇살마저 두터운 먼지층에 걸려 힘없이 흩어지는 곳. 그곳에서 스무 살의 이레아는 낡은 책들을 정리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레아의 손끝은 수백 년 묵은 종이의 거친 감촉에 익숙했다. 그녀의 작은 키와 왜소한 체구는 이곳의 거대한 서가들 사이에서 더욱 왜소해 보였지만, 그녀의 눈빛만은 언제나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다른 이들이 지루하고 쓸모없다 치부하는 고대의 기록들 속에서 그녀는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었다.

“이거 정말 끝이 없어라.”

이레아는 콧잔등을 찡긋하며 중얼거렸다. 어제부터 부여받은 임무는 기록 보관소에서도 가장 깊고, 아무도 찾지 않는 ‘잊힌 문서고’의 서적들을 재분류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마을의 역사서에도 제대로 기록되지 않은, 말 그대로 잊힌 공간이었다. 쾨쾨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이름 모를 벌레들의 기분 나쁜 소리가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는 선반 깊숙이 손을 넣어 낡은 가죽 묶음을 꺼냈다. 묶음은 오래되어 내용물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바래 있었다. 힘겹게 그것들을 들어내자, 그 뒤편으로 어둠에 가려져 있던 작은 틈새가 드러났다. 이레아는 무언가에 홀린 듯 손전등의 빛을 틈새 안으로 비춰 보았다.

그곳에는 다른 서적들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색 금속으로 덮인 두툼한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금속 표면은 녹이 슬기는커녕 오히려 은은한 광택을 띠고 있었다. 섬세하지만 기이한 문양들이 표지 전체를 휘감고 있었고, 그 중앙에는 마치 태양이 타오르는 듯한 형상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가 보아온 어떤 책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형태였다.

“이런 책이 있었다니….”

이레아는 조심스럽게 책을 꺼냈다.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책의 겉면을 덮은 금속은 오래된 철이 아니라, 마치 어둠을 응축해 굳힌 듯한 흑요석 같은 질감이었다. 책등에는 어떠한 제목도, 저자의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그저 오직 그 기이한 태양 문양만이 침묵 속에 빛나는 듯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이레아는 책을 조심스럽게 펼치려 했다. 하지만 책은 굳게 닫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마치 잠긴 자물쇠라도 있는 듯,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열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이레아는 책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그녀의 검지 손가락이 책 표면 중앙에 새겨진 태양 문양의 가장자리에 닿았다. 그 순간,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지는 아찔한 전류 같은 감각이 그녀를 덮쳤다. 동시에 태양 문양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번쩍하며 일어났다.

*팟!*

아주 짧은 섬광이었지만, 이레아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색이 한순간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눈앞에 알 수 없는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고요한 밤하늘에 별들이 춤추고, 거대한 숲이 속삭이며, 흐릿하지만 강력한 존재가 빛을 내뿜는 모습. 너무나 찰나의 순간이라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조차 어려웠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솟구치는 기분. 머리가 아찔하고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레아는 놀라 손을 떼었지만, 책은 더 이상 빛을 내지 않았다. 주변은 다시 평소의 침묵과 어둠으로 돌아왔고, 잊힌 문서고의 쾨쾨한 냄새만이 그녀의 오감을 자극했다.

“방금, 뭐였지…?”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엘로니아 마을 기록 보관소의 늙은 사서인 엘든 영감은 분명히 낮잠을 자고 있을 터였다. 아무도 그녀의 작은 발견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이레아는 다시 책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금속 표면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덤덤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에는 여전히 미약한 떨림과 함께 뜨거운 잔열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책을 향한 알 수 없는 이끌림이 더욱 강렬해졌다.

이 책은 다른 책들과 달랐다. 분명 무언가 특별한 것이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숨겨야 한다고 느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래된 마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꺼렸고, 알려지지 않은 힘을 두려워했다. 기록 보관소의 책 중에도 마법에 대한 이야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파괴되었거나 금지된 것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 책이 만약… 마법과 관련이 있다면?

이레아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책을 품에 숨겼다. 넉넉한 작업복 안으로 책이 들어가자, 마치 자신의 심장 박동과 공명하는 듯한 미약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녀는 낡은 서가들 사이를 빠져나와 잊힌 문서고를 벗어났다. 복도에 걸린 램프의 희미한 불빛조차 눈부시게 느껴졌다.

그녀는 몰래 자신의 작은 방으로 향했다. 기록 보관소 건물 옆에 붙어 있는 다락방 같은 곳이었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공간.

문고리를 잡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레아는 급하게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숨겨왔던 검은 책을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책은 침대에 놓이자마자, 아까보다 좀 더 확연한 푸른빛을 아주 잠깐 내뿜었다. 이레아는 숨을 죽였다. 빛은 곧 사라졌지만, 책에서는 여전히 미약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책에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태양 문양이 아닌, 책의 평평한 금속 표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길이 닿자마자, 굳게 닫혀 있던 책의 표지가 아주 미세하게 벌어졌다. 삐걱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이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까는 아무리 애써도 열리지 않던 책이, 이제는 그녀의 손길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책을 열었다. 내부는 놀랍도록 깨끗했다. 수백 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얇은 양피지 종이 위에는 선명하고도 기이한 글자들이 가득했다. 그녀가 배워온 어떤 문자와도 달랐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섞인 듯하면서도, 동시에 완벽하게 통일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레아는 문득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이 책은 분명히 그녀가 찾던, 아니, 세상이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 어쩌면 세상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그런 힘을.

그녀의 손가락이 미지의 글자들을 조심스럽게 따라 움직였다. 글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녀의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흐릿하지만 명확한 한 단어가 메아리쳤다.

*‘아르카눔(Arcanum).’*

이레아는 숨을 삼켰다. 아르카눔. 그것은 고대에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존재해서는 안 될 궁극의 마법이라는 뜻이었다. 전설 속에서만 언급되던,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할 수 있었다는 힘.

과연 이 책은 그 전설의 진실을 품고 있는 것일까?

이레아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평범했던 그녀의 삶이, 이 순간 완전히 뒤바뀌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이제 단순한 기록 보관소의 조수가 아니었다. 잃어버린 시대의 메아리를 우연히 발견한, 운명의 실타래에 묶인 존재가 된 것이다.

밤은 깊어지고, 작은 방 안에는 오직 고대 마법서의 푸른빛과 이레아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