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뺨을 때렸다. 지아는 휘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카이의 단단한 등 뒤에 몸을 숨긴 채,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시야를 흐리는 것을 느꼈다. 숲은 울부짖듯 흔들렸고, 저 멀리서 다가오는 섬뜩한 기운은 숨통을 조여왔다.
“카이…!”
지아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카이는 대답 대신 더 단단히 지아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온기는 이 지옥 같은 순간에도 지아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가 고통스럽게도, 이 세상의 모든 규율을 어겨가며 자신을 지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이 아닌, 태초의 존재인 그에게는 금기시된 감정. 그리고 미래에서 온 이방인인 자신에게는 파멸을 의미하는 이 사랑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유일한 삶의 이유였다.
어둠 속에서 푸른 불꽃들이 번쩍였다. 수십 개의 그림자 형상들이 숲의 가장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은 냉혹하고 차가웠으며, 단 하나의 목적만을 품고 있었다. 지아를 ‘시간의 오류’라 규정하고 제거하는 것. 그리고 그런 지아를 감히 품으려 한 카이를 심판하는 것.
“카이… 네게 마지막 기회를 준다.”
선두에 선 그림자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의 모습은 마치 밤하늘의 모든 별을 응축해 놓은 듯, 희미하게 빛나면서도 압도적인 위압감을 풍겼다. ‘시간의 감시자’들, 카이와 같은 태초의 존재이자 이 세상의 질서를 수호하는 자들이었다.
카이는 미동도 없이 그들을 노려봤다. 그의 검은 눈동자 속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내게는 이미 선택이 끝났다.”
“어리석은 자. 인간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조각의 시간일 뿐이다. 하물며 너는… 시간을 엮어내는 존재가 아니더냐. 어찌 그 미약한 존재를 위해 네 모든 것을 내던지려 하는가!” 감시자의 목소리는 분노로 번져갔다.
지아는 카이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그들의 말은 뼛속까지 시리게 파고들었다. ‘스쳐 지나가는 시간’, ‘미약한 존재’. 그들에게 자신은 그저 시스템의 오류에 불과한 것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하지만 카이는… 그녀를 단순한 오류로 여기지 않았다.
카이가 천천히 몸을 돌려 지아의 얼굴을 감쌌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지만, 그 속에 담긴 아픔과 단호함이 지아의 심장을 저몄다.
“나는 그저 지키고 싶었다, 지아.”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 사이를 뚫고 지아의 귀에 박혔다. “네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내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으니.”
“카이…!” 지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를 위해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사라지는 것조차도.
“늦었다. 카이.” 감시자의 손끝에서 푸른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시간의 흐름을 왜곡하고,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강력한 힘이었다.
카이는 지아를 자신의 품에 더욱 깊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대지가 진동하고, 숲의 나무들이 거칠게 흔들렸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온몸에서 푸른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의 인간의 형상은 점차 희미해지고, 그 대신 고대의 힘이 응축된, 거대하고 경이로운 존재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숲의 정령이면서도, 시간의 흐름 그 자체인 듯한 위엄을 지니고 있었다. 감시자들의 눈빛에도 당혹감이 스쳤다. 카이가 자신의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들이 아는 한 수천 년 만의 일이었다. 그것은 곧, 그가 모든 것을 걸었다는 증거였다.
“감히… 너희가 지아에게 손댈 수는 없다.”
카이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대지와 하늘을 뒤흔드는, 태초의 울림이었다. 푸른 빛이 그의 몸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감시자들을 향해 맹렬하게 뻗어 나갔다. 숲은 빛과 그림자의 전쟁터가 되었고, 지아는 카이의 품 속에서 그 거대한 힘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한 경외감을 느꼈다.
그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감시자들이 뿜어내던 푸른 빛줄기들이 카이의 거대한 기운 앞에 일그러지며 흩어졌다. 하지만 감시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이 세상의 균형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었다. 한 명, 두 명… 더 많은 감시자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수는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카이는 지아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은 채, 모든 방향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냈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 불꽃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그러나 그의 힘은 무한하지 않았다. 그의 육체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아는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신이 이 시간 속으로 넘어오지 않았다면, 카이는 이토록 고통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존재는 영원히 세상의 균형 속에서 빛났을 것이다.
그때, 카이의 손이 지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지아만을 담고 있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지아. 나는 너를… 반드시 지킬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카이의 등 뒤에서 기이한 문양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아가 미래의 연구 자료에서 어렴풋이 본 적이 있는, ‘시간의 문’을 여는 고대 문양과 흡사했다. 그의 마지막 힘을 짜내어, 자신과 지아를 이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 문양은 완성되지 못했다.
“카이!”
감시자들의 공격 중 하나가 카이의 등에 꽂혔다. 인간의 몸을 지닌 그에게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그의 거대한 푸른 기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지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지아의 몸이 튕겨져 나갔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시야에는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카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눈동자 속 푸른 불꽃이 희미하게 꺼져가는 것을 보며, 지아의 심장은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카이! 안 돼…!”
지아는 비명을 지르며 카이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감시자들이 싸늘한 눈빛으로 다가와 카이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들의 손끝에서 섬뜩한 빛이 다시 한번 모여들기 시작했다.
“너는… 소멸될 것이다. 시간의 오류와 함께.”
감시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목표는 카이의 존재 자체를 이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사랑 때문에 금기를 어긴 대가로.
지아는 카이의 차가워지는 손을 붙잡았다. 그의 눈은 이미 희미했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 지아를 올려다봤다. 그 속에는 슬픔과 후회 대신, 오직 사랑만이 가득했다.
“지아… 달아나…!”
카이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그 순간, 지아의 손에 쥐여 있던 작은 펜던트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가 시간 여행을 할 때 지니고 있던 유일한 물건이었다. 불안정하게 연결되어 있던 미래의 에너지와, 카이가 지아를 지키기 위해 흘린 고대의 피가 섞이며 예측할 수 없는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감시자들의 푸른 빛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시공간의 균열이 숲의 한가운데서 찢어지듯 열렸다. 그것은 카이가 열려고 했던 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불안정한,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카이…! 내가… 내가 너를…!”
지아는 절규했다. 그녀는 그를 혼자 두고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이미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힘에 의해 거대한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카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이미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지만,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를 향한 간절한 사랑을 담고 있었다.
“가지 마… 카이…!”
지아의 목소리는 시공간의 균열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 거대한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보았다. 수많은 감시자들의 빛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카이가 마지막 힘을 다해 손을 뻗는 것을. 그리고 그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기다려…*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아니, 분명히 보았다. 그의 입술이 그렇게 속삭이는 것을.
그리고 모든 것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아는 알 수 없는 곳으로 던져졌고, 카이는 홀로 남겨졌다. 그의 존재가 지워지는 잔혹한 운명 속으로.
이것이 끝일까.
아니, 이것은 시작이었다.
금지된 사랑이 만든, 또 다른 시간의 비극.
균열은 더욱 깊어질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