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허의 철마, 37화: 붉은 아귀
“젠장, 또 진입인가.”
강진은 삐걱거리는 조종석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낡은 철마(鐵馬)의 장갑은 스크랩 야적장에서 긁어모은 잡동사니들을 얼기설기 덧대어 놓은 듯 투박했다. 한때는 찬란했을 도시의 잔해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검은 연기가 가시지 않은 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길을 막았다. 이곳은 더 이상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었다. 죽음의 땅. 그러나 죽음을 무릅써야만 살 수 있는 역설적인 공간.
철마의 눈 역할을 하는 센서 화면에는 주변 지형과 함께 희미한 열원들이 점멸했다. 대부분은 고물에서 나오는 잔열이었지만, 간혹 불길하게 움직이는 녹색 점들이 보였다. 변종 생명체, 또는 더 위험한 무언가.
강진은 한숨을 쉬며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익숙했다. 그의 철마는 현존하는 그 어떤 메카보다도 낡고, 볼품없었지만, 강진에게는 세상의 전부였다. 모든 부품은 그의 손을 거쳐 갔고, 모든 고장은 그가 밤샘 정비로 고쳐냈다. 기계가 아닌, 오랜 전우 같았다.
“오늘 목표는 동쪽 구획 폐기물 처리장의 ‘핵심 동력 셀’. 운 좋으면 터진 엔진이라도 주워 올 수 있겠지.”
강진은 중얼거렸다. 보급은 끊긴 지 오래. 모든 것은 현지 조달이었다. 고철에서 고철을 뜯어내고, 폐기물에서 살아남을 동력을 찾아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동력 셀 하나만 확보해도 몇 주간의 에너지를 벌 수 있었다. 작은 희망이자, 거대한 도박이었다.
철마는 삐걱거리는 움직임으로 거대한 잔해 더미를 넘어갔다. 발소리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자 주변을 맴돌던 이름 모를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이 멸망한 도시에 살아남은 유일한 생명체였다.
강진은 조종석 내부의 온도를 조절하며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든 위협이 튀어나올 수 있었다. 화면에 희미하게 잡히던 녹색 점들이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순식간에 화면 절반을 채울 듯 불어났다.
“젠장, 떼거리잖아?!”
강진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단순한 변종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철마의 중장갑과 파괴력을 견딜 수 있는 생명체는 드물었다. 하지만 저렇게 많은 숫자는 얘기가 달랐다.
강진은 즉시 철마를 멈춰 세웠다. 거대한 철마의 그림자가 폐허에 드리워졌다. 주변은 침묵에 휩싸였다. 정적은 언제나 폭풍 전야의 불길한 징조였다.
“어디서 튀어나올 셈이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센서 화면의 녹색 점들이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왔다. 콘크리트 벽을 부수고, 잔해 더미를 뚫고, 거대한 그림자들이 강진의 철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놈들은 ‘사냥꾼’이라 불리는 변종이었다. 거대한 턱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곤충형 괴물. 기존의 생명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저렇게 흉측하게 변이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놈들은 철마의 장갑도 찢어발길 수 있는 끔찍한 괴력을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이 망할 벌레 새끼들!”
강진은 이를 악물었다. 첫 번째 사냥꾼이 철마의 왼쪽 다리에 부딪혔다. 콰앙! 쇳소리가 귀를 찢었다. 철마가 휘청였다. 강진은 급히 균형을 잡으며 오른팔에 장착된 대구경 리볼버를 발사했다. 굉음과 함께 거대한 탄환이 사냥꾼의 단단한 외골격을 뚫고 지나갔다. 놈은 비명을 지르며 땅에 고꾸라졌다.
하지만 쓰러진 한 마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서너 마리가 철마의 몸에 달라붙어 발톱으로 장갑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끽! 끽! 섬뜩한 쇳소리가 울렸다. 장갑이 긁히는 소리는 강진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떨어져! 이 더러운 것들!”
강진은 철마의 몸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거대한 강철 몸체가 좌우로 요동쳤지만, 사냥꾼들은 끈질기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은 놈들이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강진은 왼쪽 팔의 고출력 전열 블레이드를 켰다. 블레이드가 윙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열기를 뿜어냈다. 그는 철마의 팔을 휘둘러 달라붙은 사냥꾼들을 찍어 내렸다. 쉬이이익! 뜨거운 칼날이 놈들의 외골격을 녹이며 지나갔다. 끔찍한 악취가 조종석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이, 철마의 왼쪽 다리에 또 다른 사냥꾼이 매달려 관절 부위를 공격하고 있었다. 부식된 장갑의 틈새를 노리는 듯했다.
“안 돼! 거긴…!”
강진은 다급하게 철마의 움직임을 조작해 리볼버로 사냥꾼을 겨냥했다. 하지만 놈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총성이 울리기도 전에, 날카로운 발톱이 철마의 무릎 관절부를 후려쳤다. 콰직! 거친 파열음과 함께 철마의 왼쪽 다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경고음이 조종석을 가득 채웠다. “좌측 다리 관절 손상! 기동력 20% 감소! 경고! 경고!”
“젠장!”
다급한 마음에 강진은 시야를 넓혔다. 폐허 곳곳에서 사냥꾼들이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이미 철마는 포위당했다. 이런 식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었다. 철마의 중장갑도 계속되는 공격에는 버틸 수 없을 터였다.
강진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동력 셀을 확보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가지 계획이 스쳐 지나갔다. 무모하고, 위험한 계획.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시도해 볼 만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좋아, 이 망할 벌레 새끼들아! 죽여라, 죽여 봐!”
강진은 조종간을 거칠게 꺾었다. 철마는 왼쪽 다리의 손상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몸을 비틀었다. 리볼버를 난사하며 전열 블레이드를 휘두르는 동시에, 강진은 철마의 등 부분에 고정된 보조 추진 장치를 최대로 가동시켰다.
**콰아아아앙!**
녹슨 추진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맹렬한 불꽃이 주변의 사냥꾼들을 태워 버렸다. 강진은 그대로 철마를 전진시켰다. 폐기물 처리장을 향해! 놈들의 포위를 뚫고 그대로 돌격하는 것이다.
사냥꾼들은 예상치 못한 철마의 돌진에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이내 놈들도 정신을 차리고 미친 듯이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마치 거대한 군대가 진격하는 듯했다.
강진은 센서 화면에 보이는 폐기물 처리장의 거대한 입구를 확인했다. 저곳까지 버티기만 하면 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철마는 온몸을 내던져 질주했다. 좌측 다리의 고통이 전신으로 퍼지는 듯했지만, 강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곧 폐기물 처리장의 입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녹슨 철문은 절반만 열린 채 거대한 아귀처럼 벌어져 있었다.
강진은 망설임 없이 철마를 그 틈으로 밀어 넣었다. 쾅! 철마의 어깨가 문에 부딪히며 거친 마찰음을 냈다. 이빨 빠진 아귀의 목구멍 안으로 들어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강진은 내부로 진입하자마자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삐이이익! 철마의 거대한 몸체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뒤쫓아 오던 사냥꾼들이 무서운 기세로 따라붙었다. 놈들이 철마를 노려보며 내부로 진입하려 했다.
“지금이다!”
강진은 미소를 지었다. 폐기물 처리장 내부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 거대한 철골 구조물들을 화면에서 확인했다. 바로 저것이었다. 그는 곧바로 철마의 팔에 장착된 갈고리 발사기를 작동시켰다.
**쉬익! 콰앙!**
강철 케이블에 연결된 갈고리가 맹렬한 속도로 날아가 천장의 가장 굵은 철골에 박혔다. 강진은 조종간을 당겼다. 철마의 어깨에 연결된 케이블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가자!”
철마는 그 힘을 이용해 몸을 뒤로 밀었다. 동시에 강진은 다시 한번 보조 추진 장치를 최대로 가동시켰다. 콰아아앙! 불꽃과 함께 엄청난 추진력이 발생했다.
철마는 마치 거대한 추처럼 뒤로 힘껏 날아갔다. 뒤따라 들어오던 수십 마리의 사냥꾼들이 철마의 경로에 있었다. 놈들이 피할 새도 없이, 철마의 거대한 철골 몸체가 그들을 덮쳤다.
**콰직! 콰직! 으드득!**
끔찍한 살덩이가 으깨지는 소리가 폐기물 처리장 내부를 가득 채웠다. 사냥꾼들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철마의 육중한 무게에 짓눌려 터져 버렸다. 시뻘건 피와 내장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강진은 조종석 내부에서 격렬하게 흔들리는 몸을 겨우 지탱했다. 폐기물 처리장의 입구는 놈들의 시체로 가득 차 버렸다.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간신히 해치웠군.”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센서 화면이 다시 한번 붉게 번쩍였다. 이번에는 한 개의 거대한 녹색 점이 화면 중앙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녹색 점은 엄청난 속도로 진동하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강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정도의 크기와 열원은… 분명 폐기물 처리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존재였다.
“설마… 이 타이밍에 깨어날 줄이야.”
거대한 진동음과 함께 폐기물 처리장 내부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강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폐허의 심장부에서, 그가 마주해야 할 진짜 위협이 이제 막 눈을 뜨고 있었다는 것을. 붉은 아귀의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가, 강진의 심장 박동과 함께 울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생존을 건 마지막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