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장막
침묵은 오래된 저택의 피부처럼 낡고 차가웠다. 수아는 눈을 떴지만, 여전히 어둠의 장막이 시야를 가린 듯 희미했다. 간밤의 꿈은 더 이상 선명한 색을 지니지 못했다.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물들고,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익숙한 노랫소리조차 텅 빈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손끝이 얼음처럼 시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몸은 온기와 생기로 가득 찬 작은 우주였다. 지금은 그 우주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차가운 공간으로 대체되는 기분이었다.
옆을 돌아보니 이안이 그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 같았고, 언제나처럼 슬픔과 고뇌로 얼룩져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어둠의 심연은 수아만큼이나 고통받는 듯했다.
“괜찮아?” 그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흘러나왔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수아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그 따뜻함 속에는 비할 데 없는 죄책감이 스며 있었다. 그는 스스로의 존재가 수아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수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응. 조금… 추워서.”
그녀의 말에 이안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팔을 뻗어 수아를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의 품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수아는 그 안에서만 온전한 평화를 느꼈다. 그가 안아줄 때마다 그녀 안의 무언가가 조금씩 더 희미해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이 품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 금지된 사랑은 이미 그녀의 존재의 근원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수아…” 이안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미세한 냉기가 퍼지는 것 같았다. “네가 이렇게 약해지는 걸 더 이상 볼 수가 없어.”
수아는 그의 넓은 등에 손을 얹었다. 손등에는 푸르스름한 핏줄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종잇장처럼 얇아지고,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거울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눈이 얼마나 공허해졌는지, 얼굴이 얼마나 창백해졌는지. 이안과의 만남 이후, 시간은 그녀에게만 가혹하게 흘러갔다.
“나 때문이 아니야.” 수아는 속삭였다. “난…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매일 밤 꿈속에서 자신을 갉아먹는 그림자를 보았다. 한때 찬란했던 추억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웃음소리, 햇살 아래의 풍경,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 모든 것이 뿌연 안개 속으로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이안의 존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그녀는 그 그림자조차 사랑했다. 그림자 뒤에 숨겨진 그의 고통과 연약함을 이해했기에.
이안은 그녀를 품에서 떼어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얼음 같은 그의 손길이 닿는 순간, 수아는 심장이 옥죄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심장이 다시 뛰는 것을 잊은 듯한 고통.
“거짓말하지 마.” 이안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네 안의 빛이 꺼져가는 게 느껴져. 너는… 나 때문에 사라지고 있어.”
수아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밤의 심연을 닮은 그의 눈동자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보았다. 점점 작아지고 희미해지는 그녀의 형상.
“사라져도 괜찮아.” 수아는 주저 없이 말했다. “만약 당신과 함께라면.”
그녀의 말에 이안의 눈빛이 흔들렸다. 인간의 고귀한 사랑이, 이토록 순수한 헌신이 그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동시에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밤의 존재였다. 그림자와 추위 속에서 태어나 빛과 생기를 갉아먹는 존재. 그런 자신이, 이토록 여린 인간을 사랑하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토록 잔인한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고도.
그 순간, 저택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창밖의 나무들이 격렬하게 몸을 비틀며 바람에 저항하는 소리가 들렸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바깥세상이 뿜어내는 날카로운 증오와 적대감이었다.
이안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인가.”
수아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들’. 이안을 쫓는 자들. 그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그를 없애려 하는 자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균형을 지키려는 자들이었다. 이 저택은 수아의 것이었지만, 이안과 함께 숨어 살기 시작한 이후로는 그들의 도피처이자 마지막 보루가 되어 있었다.
“어떻게… 여길 찾아냈지?” 수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저택은 세상의 눈을 피해 깊은 숲 속에 숨겨져 있었다. 강력한 주술과 이안의 기운이 뒤섞여 그 어떤 이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이안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그림자가 방 전체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그의 어깨는 넓고 단단했으며, 인간의 모습 뒤에 숨겨진 진정한 힘이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공기 중의 습기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어둠은… 흔적을 남기지. 그리고 그들은 그 흔적을 읽어내는 데 능숙하니까.”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렸다. “결국 이 순간이 오는구나.”
수아는 이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의 손은 너무나 차가웠지만, 그녀는 그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가지 마. 혼자 가지 마.”
이안은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차분했지만, 눈빛만은 맹렬한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것은 분노이자, 절망이자, 그리고 수아를 향한 지독한 사랑이었다.
“더 이상 너를 위험하게 할 수 없어.” 이안은 그녀의 손을 떼어냈다. “그들은 나를 원해. 너는 상관없어.”
“상관없을 리가 없잖아!” 수아는 침대에서 벗어나 그에게 다가섰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어. 그들이 그걸 모를 리 없어. 그들은… 당신을 통해 나까지 없애려 들 거야!”
그때, 저택의 깊은 곳에서 거대한 충격음이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가 굉음을 내며 부서지는 소리였다. 이어지는 날카로운 비명과 고통에 찬 신음소리. 그것은 이안이 만들어놓은 방어막 중 하나가 뚫렸다는 신호였다.
이안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득였다. 그는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수아, 숨어.” 그의 목소리에 강력한 어둠의 기운이 실렸다. 공기가 찢어지는 듯했다.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
그는 방을 나섰다.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소리 없었다. 수아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그를 보내면, 다시는 그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몸은 얼어붙는 듯했다.
밖에서는 이미 싸움이 시작된 듯했다. 차가운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 주술적인 빛이 번쩍이는 소리, 그리고 인간의 절규와 어둠의 포효가 뒤섞였다. 이안이, 그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수아를 위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고 있었다.
수아는 두려웠다. 그러나 그 두려움보다 더 강렬한 감정이 그녀를 지배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분노였다. 이안을 이 세상에서 지우려는 자들을 향한 분노. 그녀가 느낄 수 있는 마지막 온기마저 빼앗아 가려는 그들을 향한 격렬한 감정.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이안이 주었던 작은 칼이 있었다. 은색 빛을 띠고 있었지만, 인간의 것이 아닌, 알 수 없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기묘한 칼이었다. 이안은 이것이 자신의 어둠을 막아줄 유일한 것이자, 동시에 그를 지켜낼 마지막 희망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바깥의 소음이 더 가까워졌다. 저택의 복도를 따라 발소리가 울렸다. 사냥개처럼 이안의 기운을 추적해오는 그들의 발소리였다. 그들은 수아의 방문 앞까지 도달했다.
“이안, 이 괴물아! 네년을 여기서 끝장내주마!” 굵고 사나운 목소리가 문 밖에서 울려 퍼졌다.
수아는 칼을 꽉 쥐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안에서 떨렸다. 그녀는 더 이상 방에 숨어 이안의 운명을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의 몸은 약해졌지만, 그녀의 의지만큼은 그 어떤 존재보다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수아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절대 안 돼.”
그녀는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발걸음은 힘없고 위태로웠지만, 그녀의 눈빛은 단단한 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죽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녀는 이안의 곁에 서서 그를 지킬 것이었다. 이 금지된 사랑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기꺼이 모든 것을 내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밖에서 또 다른 충격음이 들렸다. 거대한 벽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 이안의 포효가 저택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안이 싸움에서 밀리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수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그녀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지옥 같았다. 피 냄새, 파괴된 가구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반인반수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이안이 있었다. 그의 몸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불어나고 있었고, 피부는 비늘처럼 거칠어졌으며, 손톱은 맹수의 발톱처럼 길게 돋아나 있었다.
“이안!”
그녀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이안을 에워싸고 있던 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수아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경멸과 함께 희미한 승리감이 어려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수아의 존재를 꿰뚫는 순간, 수아는 그들이 자신을 단순한 인간이 아닌, 이안의 오염된 존재의 일부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이안은 수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순수한 어둠이 번뜩이는 맹수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여전히 그녀를 향한 간절한 사랑과 절망이 담겨 있었다.
“수아… 도망쳐…!” 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포효처럼 갈라졌다.
하지만 수아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칼을 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차가운 칼날이 이안의 짐승 같은 형상을 향해 내던져지는 순간, 저택은 다시 한번 진동했다.
그것은 이안의 힘을 제어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자, 그녀가 그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종족을 뛰어넘는 금지된 사랑이 빚어낸 처절한 비극이었다. 이제, 그들의 사랑은 피와 어둠 속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야 할 순간에 놓여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