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잿빛 하늘 아래, 고독한 발걸음
바싹 마른 흙먼지가 발목을 휘감았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잔해는 이제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태양의 온기를 삼키고 있었고, 구름 한 점 없는 그을린 색은 세상의 종말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듯했다.
이진우는 낡은 가죽 부츠를 끌며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고 있었다. 닳아 해진 전투복은 그의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지만, 그가 지닌 예리한 눈빛만은 어떤 위협에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의 손에 쥐인 녹슨 철제 단검은 그의 유일한 벗이자 생존 도구였다.
*딸깍.*
손목에 찬 정보 단말기가 짧은 진동과 함께 깜빡였다.
[퀘스트 목표: <정화 필터> 복구를 위한 데이터 코어 획득 (0/1)]
[현재 위치: 구역 B-7, 제3 연구 시설 인근]
[남은 체력: 87% / 정신력: 65%]
“젠장, 벌써 정신력이 이만큼이나.”
이진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게임 ‘넥서스: 멸망의 유산’은 다른 VRMMO와 달랐다. 아름다운 판타지 세계나 화려한 스킬 난무 대신, 이 게임은 오직 ‘생존’이라는 하나의 가치만을 내세웠다. 음식, 물, 안전한 잠자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남기 위한 냉혹한 판단력. 모든 것이 현실만큼이나 생생했고, 그만큼 혹독했다.
며칠 전, 그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던 ‘정화 필터’가 작동을 멈췄다. 폐허에서 겨우 찾아낸 오염된 물을 식수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도구였다. 그게 없으면 며칠 내로 탈수나 오염으로 쓰러질 터. 필터 수리에 필요한 부품은 ‘데이터 코어’ 하나뿐이었고, 그 코어가 제3 연구 시설에 있다는 정보를 겨우 얻어냈다.
연구 시설은 한때 번창했던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했지만, 지금은 거대한 건물이 반쯤 붕괴한 채 괴기스러운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입구는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와 뒤틀린 철골에 막혀 있었다.
“이쪽인가….”
진우는 무너진 벽 틈새를 비집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부 공기는 바깥보다 훨씬 더 무거웠고, 먼지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역한 비린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그의 시야는 어둠에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곳곳에 드리운 그림자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끼이익… 찌직…*
천장 어딘가에서 불안정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폐허였다. 진우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단말기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고, 홀로그램 지도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목적지는 이 건물 지하 3층에 있는 ‘중앙 자료실’이었다.
계단은 이미 붕괴된 지 오래였고, 그는 엘리베이터 통로를 이용해야 했다. 낡은 케이블 몇 가닥에 겨우 매달린 채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멈춰선 엘리베이터 칸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진우는 그 옆의 비상 사다리를 타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층, 또 한 층. 깊어질수록 어둠은 짙어지고, 주변의 고요함은 더욱 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하 2층에 도달했을 때, 진우는 잠시 멈춰 섰다.
*스스슥… 틱.*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고 미세한 소리였지만, 이 폐허의 적막 속에서는 마치 천둥처럼 울렸다. 진우는 단검을 꽉 쥐고 몸을 낮췄다. 주변의 그림자에 완전히 동화되려는 듯 숨소리마저 죽였다.
정보 단말기가 삐빅거렸다.
[경고: 미확인 생체 반응 감지. 감염체 ‘크롤러’ (레벨 12) 3마리.]
크롤러. 이 건물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돌연변이 생물이었다. 거미와 바퀴벌레를 섞어놓은 듯한 징그러운 모습에 빠른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도 산성액을 뿜어내는 능력이 골치 아팠다. 일반적인 전투에서는 큰 위협이 되지 않지만,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을 응시했다. 저쪽, 무너진 사무실 파티션 뒤편에서 희미한 윤곽이 보였다. 세 마리. 다행히 등급이 낮은 개체들이었다.
*스킬 발동: 그림자 은신.*
그의 몸을 감싸던 실루엣이 더욱 흐릿해졌다. 진우는 마치 유령처럼 폐기된 사무용 가구들 사이를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크롤러들은 여전히 파티션 뒤에서 무언가를 갉아먹는 듯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녀석들의 뒤편에 도달했을 때, 진우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뽑아 들었다. 첫 번째 크롤러의 머리를 정확히 노려 꽂았다.
*쉬이익-!*
치명타에 크롤러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산성액을 뿜어냈다. 끈적한 액체가 바닥에 떨어지자 얇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끼이이이익!*
동료의 죽음에 놀란 다른 두 마리의 크롤러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진우는 몸을 빠르게 틀어 첫 번째 크롤러의 공격을 피하고, 단검을 휘둘러 녀석의 다리를 잘라냈다. 균형을 잃은 크롤러가 비틀거리는 순간, 남은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스킬 발동: 재빠른 회피.*
진우는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구르며 크롤러의 돌진을 피했다. 동시에 땅에 박힌 단검을 뽑아 들고, 뒤따라오던 크롤러의 등껍질을 꿰뚫었다.
*푸욱!*
두 마리의 크롤러가 차례로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보다 소모가 컸다. 전투는 짧았지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기에 정신력이 크게 깎였다.
[경험치를 획득했습니다.]
[아이템 ‘크롤러의 키틴질 조각’을 획득했습니다.]
이진우는 바닥에 떨어진 키틴질 조각들을 대충 주워 넣었다. 나중에 쓸모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 지하 3층으로 가는 길만 찾으면 된다.
이정표 하나 없는 어둠 속을 더듬어 가던 진우의 눈에, 부서진 철문 하나가 들어왔다. 문 위에는 닳고 닳은 글씨로 ‘자료 보관소’라고 적혀 있었다. 여기가 맞았다.
그가 철문에 손을 대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척을 느꼈다. 위험 감지가 발동했지만, 너무 늦었다.
*콰아앙-!*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와 진우를 덮쳤다. 육중한 덩치에 압도당한 그는 그대로 벽에 부딪혔고, 폐부를 찌르는 고통이 온몸을 강타했다.
[치명적인 피해! 체력이 45%로 감소했습니다!]
[상태 이상: 출혈!]
“크윽… 뭐야!”
눈앞에 나타난 것은 크롤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였다. 인간을 닮은 형태였지만, 피부는 흉측하게 부풀어 올랐고, 온몸에서는 검은 점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등에는 두 개의 거대한 촉수가 꿈틀거렸다.
[경고: 돌연변이 ‘감염된 연구원’ (레벨 25) 출현!]
‘젠장, 여긴 이 정도로 강한 녀석이 나올 곳이 아니었는데!’
진우는 급하게 단검을 휘둘렀지만, 녀석의 끈적한 피부는 단단한 갑옷 같았다. 촉수 하나가 그의 허리를 감고 들어 올렸다. 공중에서 몸부림치는 진우의 눈에, 감염된 연구원의 흉측한 얼굴이 섬뜩한 미소를 짓는 듯 보였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단말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스킬 발동: 긴급 탈출!*
몸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끼며 진우는 간신히 촉수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미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지하 3층으로 통하는 문이 눈앞에 있었지만, 그는 그 문턱을 넘을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거대한 괴물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진우는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그때, 문득 그의 시야 한구석에 무언가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무너진 벽 틈새에 박혀있는, 낡았지만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금속 조각.
그것은 이 연구 시설의 비상 전력 시스템을 가동할 수 있는 핵심 부품인 ‘보조 전원 스위치’였다. 어쩌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 괴물을 뚫고 저 스위치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단검을 다시 쥐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의 눈빛은 다시 한번 날카롭게 빛났다. 살아야 한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빌어먹을 폐허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