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1화

가을 문턱에서 찾아온 그림자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창밖으로 불어오는 바람은 여름의 뜨거운 숨결을 잊은 지 오래였고, 아침 햇살은 여전히 따사로웠지만 그 안에는 서늘한 기운이 한 줄기 섞여 있었다. 지혜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창가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늘 그랬듯, 작은 골목길 어귀를 향해 있었다. 그곳에서 언제나처럼, 조금은 거만하고 또 조금은 사랑스러운 걸음으로 ‘그 아이’가 나타나주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 아이와 보낸 시간은 이미 셀 수 없이 많았다. 처음 그 아이가 지혜의 삶에 불쑥 들어왔을 때, 지혜는 이토록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한 마리의 길고양이였을 뿐인데, 이제는 지혜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침묵 속에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는 듯한 대화는, 지혜에게 세상의 어떤 언어보다도 진실하고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매일 저녁. 해가 뜨고 질 때마다 그 아이는 어김없이 지혜의 작은 마당으로 찾아왔다. 배고픔을 채우기도 하고, 그저 한참을 나란히 앉아 햇살을 쬐거나 별을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면 지혜는 나지막이 말을 건네고, 그 아이는 촉촉한 눈빛으로 지혜를 올려다보곤 했다. 때로는 느릿한 눈 깜빡임으로, 때로는 나른한 하품으로, 때로는 꼬리를 흔드는 작은 몸짓으로, 그 아이는 지혜의 모든 말에 답해주었다.

텅 빈 기다림

그날 아침은 유독 하늘이 맑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길어진 그림자들이 고요했다. 지혜는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뜬 마음으로 차를 홀짝였다. 하지만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골목 어귀는 텅 비어 있었다.

“이상하네… 벌써 아침 간식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지혜는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길고양이에게 자유로운 영혼은 당연한 것이니까. 가끔은 하루 정도 다른 곳에 들렀다 오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가슴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났다. 지혜는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 아이? 어딨니? 야옹!”

평소 같으면 문 열리는 소리만 들어도, 혹은 지혜의 인기척만 느껴져도 나타나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지혜는 골목 어귀까지 걸어 나가 두리번거렸다. 늘 그 아이가 앉아 있던 담벼락 위, 햇살 좋은 화단 옆, 심지어는 작은 차 밑까지도 꼼꼼히 살폈지만 어디에도 그 아이의 모습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감은 점점 더 커져갔다. 점심시간이 되고, 오후가 깊어갔다. 지혜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창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다시 나가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반복했다. ‘고양이’라고 부르지 않고, 마치 사람에게 말을 건네듯, 그 아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고유한 호칭을 써서.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텅 빈 골목만이 지혜의 부름을 메아리칠 뿐이었다.

침묵이 남긴 공백

저녁 어스름이 깔리고, 가을밤의 차가운 공기가 마당을 감쌌다. 지혜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온종일 먹은 것도 없이,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불안감은 이제 공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잔인한 현실이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지혜는 문득 깨달았다. 그 아이가 자신의 삶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그 아이는 단순한 길고양이가 아니었다. 지혜의 외로움을 채워주고, 말없이 위로해주고, 때로는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존재였다. 그 아이와 함께했던 대화들은 지혜의 삶에 색을 입히고, 소리를 더해주었다. 그런데 이제, 그 색과 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어디 아픈 건 아닐까?’

‘혹시… 나쁜 사람을 만난 건 아닐까?’

‘아니면… 그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난 것일까?’

온갖 불길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혜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그 아이가 사라지자, 그 아이가 채워주었던 지혜 내면의 공백이 끔찍하게 아려왔다.

어둠 속에서 다시 피어난 존재

깊은 밤, 자정이 넘어서야 지혜는 겨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바람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새벽 즈음, 귓가를 스치는 작은 소리에 지혜는 번쩍 눈을 떴다.

‘긁는 소리…?’

지혜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소리가 나는 쪽, 마당으로 향하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 그리고… 익숙한 그 실루엣!

“그 아이!”

지혜는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그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문을 활짝 열자, 그 아이가 지친 기색으로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다. 털은 조금 헝클어져 있었고, 옆구리에는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하지만 분명 그 아이였다. 살아 돌아온 그 아이였다.

지혜는 그 아이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자, 그 아이는 평소처럼 거리를 두는 대신, 지혜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부드럽고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통해 지혜의 심장까지 전해졌다.

“어디 갔다 왔니…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지혜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 아이는 지혜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사냥의 고단함, 어딘가에서의 짧은 모험, 그리고 어쩌면… 지혜의 걱정을 아는 듯한 미안함 같은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지혜는 그렇게 느꼈다.

그 아이는 말없이 지혜의 옆구리에 몸을 비볐다. 작은 생채기가 난 부위를 지혜가 조심스럽게 살폈다.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그저 잠깐의 방황, 혹은 알 수 없는 싸움의 흔적일 터였다.

자유와 사랑에 대한 대화

지혜는 그 아이를 안고 따뜻한 방으로 들어왔다. 물을 주고, 남겨둔 먹이를 주자 그 아이는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먹이를 다 먹은 그 아이는 지혜의 무릎에 뛰어올라 골골송을 불렀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는 듯한 진동이 지혜의 다리를 통해 전해졌다.

“어디 갔었어?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지혜는 나지막이 물었다. 그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혜를 올려다보았다. 지혜는 그 눈빛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읽어냈다.

‘세상은 넓고, 가야 할 곳은 많아요.’

‘나만의 길을 찾아 잠시 떠났을 뿐이에요.’

‘하지만… 당신이 걱정하는 걸 알았어요.’

‘그리고… 내가 돌아올 곳은 여기라는 것도.’

지혜는 그 아이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이 고양이는, 길고양이의 본능대로 자유롭게 떠돌지만, 언제나 지혜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의 순환을 이해하는 듯한 깨달음이었다. 소유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는 법, 그리고 그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법. 그 아이는 지혜에게 그 모든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응, 알겠어. 네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네가 행복하면 됐어. 그리고… 돌아올 곳이 여기라는 걸 기억해 줘서 고마워.”

그 아이는 지혜의 품에 얼굴을 묻고 더 깊은 골골송을 불렀다. 세상의 모든 언어를 뛰어넘는 깊고 진실한 대화가 그들의 침묵 속에 피어났다. 그날 밤, 지혜는 비로소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가을의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도, 그 아이의 온기 덕분에 지혜의 마음은 다시금 따뜻함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 아이와의 대화는, 이제 단순히 위로를 넘어선, 삶의 근원적인 이해와 사랑으로 깊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