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45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나의 무릎 위에서 가느다란 신음처럼 종이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볕이 잘 드는 할머니의 방, 모든 것이 멈춘 듯 정지된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금 그 시절의 공기로 빨려 들어갔다. 지난 밤, 나는 할머니의 스물세 살 일기에서 멈췄었다. 준우 할아버지의 흔적이 바람처럼 사라진 후, 할머니는 하루하루를 잿빛으로 기록하고 있었다. 그 아린 글자들 사이에서 나는 할머니의 찢어진 가슴을 엿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찢어질 듯 바스러지는 종잇장이 내 손끝에서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얇은 봉투였다. 낡고 바래서 얼룩덜룩한, 마치 오래된 핏자국 같은 흔적이 남아있는 봉투. 봉투의 앞면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옥희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봉투 한구석에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준우’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내 귀에만 들리는 듯했다.

봉투를 쥐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할머니의 일기장 속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그래서 존재조차 몰랐던 편지였다. 할머니는 이 편지의 존재를 아셨을까? 아니, 만약 아셨다면 일기장에 단 한 줄이라도 쓰지 않으셨을 리 없다. 봉투는 마치 세상의 모든 비극을 응축해 놓은 듯, 차갑게 나의 손을 감쌌다.

나는 망설임 끝에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봉투 안에는 얇디얇은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편지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지만, 글씨는 의외로 또렷했다. 펜 끝에 실린 절박함이 수십 년의 시간을 넘어 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내 사랑 옥희에게,

이 편지가 너에게 닿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지금, 이곳을 떠나야만 한다. 불의와 침묵을 견딜 수 없어 외쳤던 나의 목소리가 이제는 죄가 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구나. 너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야 했던 나의 무정한 행동을 용서해다오. 나는 너를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다. 아니, 잊을 수가 없다. 너의 웃음, 너의 눈빛이 나의 심장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급히 떠나야 했기에 너에게 작별 인사조차 할 수 없었다. 이 편지 또한 누군가의 도움으로 어렵게 보내는 것이니, 무사히 너의 손에 닿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잠시 몸을 피했다가, 상황이 잠잠해지면 반드시 너에게 돌아갈 것이다. 맹세코 너를 버린 것이 아니다. 단지 잠시 널 지키기 위해 멀어지는 것뿐이다. 나의 안녕을 염려치 말고, 그저 이 못난 사내를 잊지 말고 기다려다오. 돌아가는 길에, 우리가 처음 만났던 동구 밖 늙은 은행나무 아래에 혹시라도 나의 흔적이 있는지 보아주렴. 나는 그곳에 너를 위한 작은 조각을 남겨두려 했다.

부디 몸 건강히 지내다오. 내가 돌아가는 날까지, 너의 미소가 변치 않기를 밤마다 기도할 것이다.

영원히 너만을 사랑할 준우가.

편지는 거기에서 끝이 났다. 나의 손에서 편지지가 바스락거렸다. 할머니의 일기장과, 이 편지가 교차되는 순간, 나의 심장은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이 편지를 평생 모르셨을 것이다. 단 한 줄의 흔적도 없었으니. 준우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혹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숨어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간절히 할머니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그 편지는 누군가의 손에 가로채였거나, 배달 도중 유실되어 할머니에게 닿지 못하고, 기적처럼 이 일기장 속에 갇혀버린 것이리라.

할머니는 준우 할아버지가 자신을 배신하고 떠났다고 믿으며 평생을 사셨다. 그 상처가 얼마나 깊었을지, 그 오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할머니의 마음에 맺혔던 응어리가 고스란히 나의 가슴으로 전이되는 듯했다.

할머니가 일기장에 적어두셨던 절망과 체념의 글귀들, 그리고 이 편지의 애절한 내용이 서로 부딪히며 거대한 슬픔의 파도를 일으켰다. 할머니는 준우 할아버지가 떠난 뒤로도 한동안 동구 밖 은행나무 아래를 찾아가곤 했다고 일기장에 쓰여 있었다. 어쩌면 그 시절, 그곳에 준우 할아버지가 남겨둔 ‘작은 조각’이 정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래된 편지지를 다시 봉투에 담아 일기장 안에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이 편지는 단순히 과거의 유물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잃어버린 진실이자, 반세기 넘게 풀리지 않았던 오해의 열쇠였다. 할머니는 이제 세상에 안 계시지만, 나는 할머니의 억울함과 준우 할아버지의 간절함을 더 이상 과거에 묻어둘 수 없었다.

동구 밖 늙은 은행나무. 할머니가 수없이 드나들며 희미한 희망을 걸었을 그곳. 어쩌면 아직도 그 나무 아래에,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준우 할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어떤 흔적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할머니의 일기장과 편지를 품에 안고 창밖을 내다봤다. 햇살은 여전히 따사로웠지만, 내 눈에는 촉촉한 물기가 맺혔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해졌다. 할머니의 못다 한 사랑을, 내가 찾아야 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