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눈이 내렸다. 회색빛 하늘은 끝없이 펼쳐진 하얀 도화지가 되었고, 세상의 모든 소음은 고요한 눈송이 아래 잠들어 버린 듯했다. 서연은 창가에 서서 온 세상을 덮은 눈꽃을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차가운 유리창을 쓸었다. 그 위로 아스라이 비치는 자신의 얼굴은 마치 얼어붙은 호수처럼 무표정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는 수천 갈래의 감정들이 파도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오늘이었다. 모든 것을 끝내기로 한 날. 혹은,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한 날.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어느 쪽이든 가슴 깊이 파고드는 통증은 매한가지였다. 그 약속을, 그날의 눈꽃처럼 하얗고 순수했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될 운명 앞에서 그녀는 차가운 얼음처럼 굳어갈 수밖에 없었다.
문득, 창밖의 풍경이 흐릿해졌다. 눈물이 맺힌 탓이었다. 오래전, 너무나도 선명하게 기억하는 그날의 풍경이 겹쳐졌다. 펑펑 쏟아지던 눈 아래, 붉은 목도리를 두른 지훈의 웃음. 그의 따뜻한 손이 자신의 차가운 손을 감싸던 온기. 그리고,
“서연아,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이 눈꽃이 다시 내리는 날마다 우리 함께 있을 거야. 약속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서연은 애써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그 약속은, 이미 그녀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모래알처럼 잡히지 않는 것이 되어버렸다.
벨이 울렸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이 문을 열면, 그녀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차가운 겨울 공기만큼이나 얼어붙은 얼굴의 지훈이 서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과 어깨 위에는 눈송이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의 눈은 깊은 상처로 가득했다.
“서연아.”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오랜 시간 추위 속에 서 있었던 것 같았다.
“왜… 왜 연락을 받지 않았어? 왜 나를 피하는 거야?”
서연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초라하게 느껴졌다.
“지훈아… 들어와. 춥잖아.”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지훈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여기 서서 말해줘.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왜 내게서 멀어지려고 하는지. 이 눈꽃이 내리는 날마다 우리 함께 있을 거라고 약속했잖아. 그 약속은, 우리한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지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서연의 심장을 칼날처럼 꿰뚫었다. 그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야… 아니야, 지훈아. 그럴 리 없어. 나에게 그 약속은, 내 삶의 전부였어.”
그녀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지훈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뜨거운 절망이 담겨 있었다.
“그럼 왜? 왜 나를 밀어내는 거야? 어제, 네 부모님이 내게 찾아오셨어. 네가 선을 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그리고… 네가 집안을 위해 결정을 내렸다고.”
서연은 숨을 들이켰다. 결국, 들킬 일이었다. 그녀는 애써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하염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훈아.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우리 집안이 지금 너무 힘들어. 아버지는 쓰러지셨고, 회사는 회생 불능 상태야. 이 모든 상황을 막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고 하셨어. 내가 그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지훈은 서연의 손을 놓쳤다.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래서… 그래서 그 약속을 버리겠다는 거야?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사랑을… 고작 너희 집안의 재정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거야?”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깊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서연은 고개를 숙였다. 어떤 변명도, 어떤 설명도 지훈의 상처를 위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나도 너무 힘들어… 지훈아. 매일 밤 잠들 때마다,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죽고 싶었어. 너에게 이 말을 하는 순간이 오는 게 너무 두려웠어.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었어. 부모님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가 없었어.”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서연아,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싸늘하게 변했다. “그래, 알겠어. 네가 그런 선택을 했다면… 내가 더 이상 붙잡을 이유가 없겠지.”
그는 뒤돌아섰다. 그의 발자국은 새로 내린 눈 위에 깊게 새겨졌다. 서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아니라고,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었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그 순간, 지훈이 멈춰 섰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깊은 슬픔이 고여 있었지만, 그 속에서 작은 불꽃 하나가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서연아, 기억해. 나는 너를 기다릴 거야.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어떤 길을 가든… 이 눈꽃이 다시 내리는 겨울이 올 때마다, 나는 그날의 약속을 기억할 거야. 네가 돌아올 때까지, 아니면… 네가 정말 행복해질 때까지.”
지훈은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눈발이 흩날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서연은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했다. 흰 눈은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 위로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그 눈은 그날의 약속을 기억하는 듯, 혹은, 그 약속의 끝을 알리는 듯,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순결한 하얀색 위로, 서연의 깨어진 약속의 파편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이 절망의 끝에 과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지훈의 마지막 말이 정말 희망이었을지, 아니면 더 깊은 절망을 예고하는 것이었을지. 그녀는 그저 차가운 눈 위에서, 무거운 숨을 헐떡이며 지훈이 사라진 길을 바라볼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