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26화

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한 줄기 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마치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지은을 격리시키는 듯했다. 그녀의 손에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이 들려 있었다. 지난 몇 달간, 이 일기장은 지은의 삶 그 자체가 되었다. 할머니, 현주가 걸어왔던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서 만났던 그림자들이 이제는 지은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앞서 읽었던 페이지들은 현주의 어린 시절, 순수했던 첫사랑, 그리고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혼란스러운 시대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페이지는 이전과는 다른, 묵직하고 숨 막히는 침묵을 품고 있었다. 책장의 가장자리, 오래된 종이가 누렇게 바래고 얇아져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은 그 부분을 지은은 조심스럽게 넘겼다. 마치 미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숨겨진 심연

페이지는 현주의 흐릿한 필체로 가득했다. 연필 자국이 종이를 파고들었고, 군데군데 옅은 물자국이 번져 있었다. 아마도 할머니가 이 글을 쓸 때 흘렸던 눈물 자국이리라. 지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1955년 늦은 가을, 그날 밤은 유난히 달이 밝았다. 하지만 내 마음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준호를 떠나보낸 지 벌써 반년. 그의 소식은 끊겼고, 사람들은 그가 전쟁통에 사라졌다고, 아니면 어디 먼 곳으로 가버렸다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내 안에는… 그의 숨결이 살아 있었다. 점점 커져가는 생명이, 나의 모든 것을 흔들었다.”

지은은 숨을 멈췄다. 준호. 현주의 일기장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났던 이름이었다. 어린 현주에게 세상의 전부였던 그 남자.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비극적으로 끝이 났고, 현주는 이후 다른 남자와 결혼해 지은의 할아버지가 될 사람과 가정을 꾸렸다. 그런데… 그녀 안에 준호의 숨결이 살아 있었다니.


“어머니는 내 배가 점점 불러오는 것을 보고 기절할 듯이 노하셨다. 가문의 명예, 나의 미래…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밤마다 나는 신께 빌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하지만 매일 아침 찾아오는 입덧과 부어오르는 몸은 잔인한 현실을 속삭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현실이었다.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수없이 생각했다.”

지은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고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십대 후반, 혹은 이십대 초반이었을 현주가 혼자 감당해야 했을 비극. 사회적 낙인, 가족의 실망, 그리고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속에서 잉태된 생명.

가슴에 묻은 아이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작고 여린 생명. 준호를 닮은 듯한 눈동자, 내 코를 닮은 오뚝한 콧날. 나의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나는 아이를 한 번이라도 더 안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는 단호하셨다. 아이는 바로 먼 친척의 집으로 보내졌다. 그들이 아이를 잘 키워줄 것이라고 했다. 이름은… 지혜라고 지어주었다. 나의 지혜, 나의 아픈 손가락…”


할머니의 일기장은 여기서 잠시 멈췄다가, 다른 날짜로 이어졌다. 그 간격이 마치 수십 년의 침묵을 담고 있는 듯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자식들을 낳고 길렀다. 현명하고 다정했던 그이 덕분에 나는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 밤이 되면, 어린 지혜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지혜가 채우지 못한 빈자리가 있었다. 평생 이 죄책감과 그리움을 안고 살았다.”

일기장의 글은 거기서 끝이 났다. 지은의 손에서 일기장이 미끄러져 침대 위로 떨어졌다. 눈앞이 흐릿했다. 지은은 믿을 수 없었다. 할머니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었다니. 이름은 지혜. 현주의 첫 아이, 그리고 지은의 어머니에게는 이복 언니가 되는 존재였다.

오랫동안 지은은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읽으며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랑과 슬픔을 엿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었다. 가족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꿀 수 있는, 거대한 비밀이었다. 현주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깊고 아픈 상처.

지은은 침대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할머니가 평생 지고 살았던 짐의 무게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고요한 밤, 빗소리만이 지은의 흐느낌에 동조하듯 계속 이어졌다.

가족의 울타리, 그 견고한 성벽 안에 감춰져 있던 또 다른 혈육. 지혜는 대체 누구였을까?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할머니는 왜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이 비밀을 품고 살았던 것일까? 이 모든 질문이 지은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이제 새로운 장을, 어쩌면 지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여정을 예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