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장막이 서울을 덮고, 도시의 불빛들이 별을 가리는 듯했지만, 스튜디오 창밖으로는 여전히 몇몇 끈질긴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별빛을 등지고 앉은 지우는 익숙하게 마이크 앞에 몸을 기댔다. 헤드폰 속에서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그녀의 손은 다음 곡 목록을 훑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오늘의 DJ, 지우입니다.”
나직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밤의 위로와 함께 미묘한 쓸쓸함이 깃들어 있었다. 스튜디오 안은 따뜻했지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은 늘 밤공기처럼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지난 몇 주간, 그녀는 수많은 사연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었고, 그들의 고백은 때로는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그녀 자신의 기억을 건드렸다.
“오늘도 참 많은 분들이 밤하늘 아래에서 각자의 이야기를 보내주셨네요. 어떤 분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해, 어떤 분은 잊지 못할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그 모든 마음이 별처럼 빛나기를 바라면서, 첫 번째 사연 만나볼까요.”
지우는 화면에 띄워진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유독 마음이 가는 제목이었다. [잃어버린 약속의 별을 찾아서].
잃어버린 약속의 별을 찾아서
안녕하세요, DJ 지우님. 저는 30대 초반의 직장인 ‘별바라기’라고 합니다. 저는 아주 오래 전, 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 잊지 못할 약속을 했어요. 그 아이의 이름은 ‘별똥별’이었죠. 제가 별을 좋아해서 붙여준 별명이었는데, 정말 이름처럼 반짝이다가 홀연히 사라져버렸어요.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저희는 시골 할머니 댁 마루에 누워 쏟아지는 별을 보며 소곤거렸어요. ‘별똥별아,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면 뭘 하고 있을까?’ 제가 묻자, 별똥별은 제 손을 잡고 새끼손가락을 걸었어요. ‘음… 우리 둘 다 꼭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자. 그리고 서른 살 생일이 되는 해, 오늘 봤던 그 가장 밝은 별 아래서 다시 만나자. 그때는 우리 둘 다 꿈을 이뤄서 정말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야!’
그때의 약속은 제게 너무나 소중한 기억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중학교 때 별똥별의 가족이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면서 연락이 끊겼어요. 주소도, 전화번호도 없이 그렇게 헤어진 게 벌써 18년 전이네요. 서른 살 생일은 이미 지났고, 저는 서른두 살이 되었어요. 하지만 올해 여름, 우연히 옛날 일기장을 펼쳤다가 그 약속을 다시 떠올렸습니다. 오늘 밤, 저에게 가장 밝게 빛나는 별 아래에서 이 라디오를 듣고 있을지도 모를 별똥별에게, 혹시 이 방송을 듣고 있다면, 제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전하고 싶어요. 우리가 함께 즐겨 불렀던 노래, 김광석 님의 ‘서른 즈음에’를 신청합니다. 혹시 네가 듣고 있다면, 이 노래를 통해 내가 아직 너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어.
지우는 사연을 다 읽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녀의 눈빛은 아련한 추억으로 물들어 있었다. ‘별똥별’. 누군가의 별명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이름이 떠올랐다. ‘은하’.
지우에게도 비슷한 약속이 있었다. 쏟아지는 별빛 아래, 열다섯 살의 지우는 ‘은하’라는 친구와 맹세했다. ‘우리 둘이 스무 살이 되는 해, 은하수 아래에서 다시 만나자. 그때는 우리 둘 다 정말 멋진 아티스트가 되어 있자고.’ 은하는 그림을 그렸고, 지우는 노래를 만들었다. 그 약속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불씨처럼 남아있었다. 은하가 갑작스럽게 유학을 떠나면서, 그들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서로의 꿈을 응원했던 그 시절의 순수함은 현실의 덧없음 앞에서 희미해지는 듯했다.
“별바라기님의 사연, 가슴이 저릿하네요. 잃어버린 약속의 별을 찾아 헤매는 마음,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 약속의 별이 부디 별바라기님에게, 그리고 별똥별님에게 다시 한번 빛을 전해주기를 바라면서, 김광석 님의 ‘서른 즈음에’ 듣겠습니다.”
음악이 스튜디오를 채웠다. 지우는 헤드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김광석의 목소리를 들으며 창밖을 응시했다. 밤하늘에 별똥별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잊혀진 계정을 찾아 들어갔다. 은하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언젠가 은하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기대가 항상 존재했다. 이 밤, 별바라기님의 사연이 그녀의 잠자던 그리움을 깨운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고, 지우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이어서 다음 사연입니다. 아이디는 ‘별빛마루’님.”
사연을 읽으려는 순간, 스튜디오 안의 비상 벨이 울렸다. 지우는 놀라서 헤드폰을 벗었다. 비상 벨은 특별한 경우에만 울리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방송 사고나, 중요한 전달사항이 있을 때.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은 스튜디오 모니터에 새로 뜬 메시지로 향했다.
[DJ 지우님, 잠시 송출을 멈추고 제 연락을 받아주세요. – 은하]
‘은하’? 지우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거짓말일 리 없었다. 메시지 옆에는 그녀에게 익숙한, 하지만 수년간 잊고 지냈던 이메일 주소가 명확히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녀만이 알 수 있는, 그녀와 은하가 주고받았던 그림 속 비밀스러운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은하수 아래에서 피어날 두 개의 별’.
손끝이 차가워졌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수년이 지나도록 닿지 못했던 이름, 잊었다고 생각했지만 단 한순간도 잊은 적 없었던 이름. 그녀의 눈은 창밖의 별을 향했다. 가장 밝게 빛나는 별 아래에서,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기적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닿은 것일까.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어떤 밤보다도 생생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청취자 여러분, 갑작스러운 방송상의 문제로 잠시 곡을 내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어서,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신청곡 한 곡을 먼저 틀겠습니다. 이 노래가… 어딘가에서 듣고 있을 ‘은하’에게 닿기를 바라면서. Maroon 5의 ‘She Will Be Loved’입니다.”
음악이 흘러나왔다. 지우는 헤드폰을 벗어 던지고, 화면에 뜬 은하의 이메일 주소와 비상 연락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침내, 잃어버렸던 약속의 별이, 가장 빛나는 밤에, 그녀에게 돌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과연 이 밤의 끝에, 그녀는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