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복판, 고요한 산자락을 따라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눈 속에 잠겨버린 듯, 지우는 묵직한 침묵 속을 걸었다. 수십 년 세월의 더께가 앉은 낡은 나무 간판에는 ‘설화정’이라는 희미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았던 때가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가물거릴 만큼 오래전 일이었다.
발아래 쌓인 눈은 지우의 걸음마다 ‘뽀드득’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잊고 지내던 과거의 조각들이 깨지는 소리 같기도, 혹은 잠자던 기억이 기지개를 켜는 소리 같기도 했다. 투박한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자, 따스하고 쌉쌀한 생강차 향이 그녀를 감쌌다. 희미한 불빛 아래, 몇 개의 테이블과 낡은 책장이 정겹게 놓여 있었다. 늦은 오후, 차림새가 수수한 아주머니 한 분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을 뿐, 가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지우는 창가 자리로 향했다. 창밖으로는 소나무 가지마다 눈꽃이 맺혀 있었고, 그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설산의 능선이 아득하게 보였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었다. 이곳에 온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일주일 전,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빛바랜 그림엽서 한 장을 발견했다. 엽서 속에는 겨울 눈꽃이 가득한 설화정의 풍경이 담겨 있었고, 뒷면에는 잊고 지내던 필체로 단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날의 약속, 겨울이 오면 눈꽃처럼 다시 피어나기를.’
그 순간, 얼어붙었던 심장 어딘가에서 차가운 균열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약속은 십 년 전, 눈꽃이 휘날리던 어느 겨울날, 민준과 함께 주고받았던 것이었다. 미래를 약속하고,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서로의 곁을 지키겠노라 맹세했던, 어리고 순수했던 날의 맹세였다. 하지만 그 약속은 너무나 쉽게 부서졌다. 그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 전, 민준은 아무 말 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다.
“따뜻한 생강차 한 잔 드릴까요? 오늘 같은 날은 뜨끈한 차가 최고죠.”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생각을 끊었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생강차가 앞에 놓이자,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감쌌다. 온기가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창밖을 응시하던 그녀의 눈동자에 아련한 슬픔이 드리웠다. 그녀는 성공한 건축가였다. 번듯한 사무실과 명성,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모든 것을 가졌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시린 겨울 같았다. 민준이 떠난 후, 그녀는 더욱 치열하게 삶을 살았다.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찾을 때,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도록. 그러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고,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한 남자가 들어섰다. 지우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숨을 헙 들이켰다.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낸 환영처럼, 그 남자는 십 년 전의 민준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물론 세월의 흔적은 분명했지만, 짙은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기억 속에 깊이 박혀 있던 그 눈빛만큼은 변치 않았다. 민준이었다. 분명 민준이었다.
그는 지우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카운터로 다가섰다. “아주머니, 혹시…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이곳에서 종종…”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십 년 동안 꿈속에서만 듣던 목소리였다. 지우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얼어붙는 감각을 느꼈다. 이 우연이 현실일 리 없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거나, 긴 시간 동안 억눌러왔던 그리움이 만들어낸 착각일 뿐이라고 애써 부정했다.
아주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나, 그럼요! 아주 잘 기억하죠. 김 군 오랜만이네. 십 년도 더 된 것 같아. 어쩐 일이야? 서울에서 여기까지 일부러 온 건가?”
민준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젓다가, 문득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시선이 지우에게 닿았다. 세상 모든 소리가 멈추는 것 같았다. 시간도, 바람도, 심지어 내리던 눈발마저도 일순간 멈춰버린 듯했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안에 담긴 놀라움과 혼란, 그리고 깊은 슬픔이 지우의 심장을 다시 한번 얼어붙게 만들었다.
“지우… 야?”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지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기다림의 시간, 고통의 시간, 원망의 시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녀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민준은 천천히 지우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그들의 사이에는 십 년의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그저 지우를 멍하니 바라봤다. “정말… 너였구나. 설마 했어. 이곳에서 널 다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우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는… 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나타날 수 있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서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그때… 그날… 눈꽃 아래서 했던 약속은… 다 거짓말이었어?”
민준은 고개를 숙였다. 긴 침묵이 흘렀다. 창밖의 눈은 다시 거세게 쏟아져 내렸다. 설화정 안은 두 사람의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미안하다, 지우야.” 민준의 목소리는 너무나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약속… 단 한순간도 잊어본 적 없어. 내게는… 그게 전부였으니까.”
“전부였다고? 전부였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사라질 수가 있어? 내 연락을 모조리 피하고, 흔적도 없이… 나는 너를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알아? 네가 죽었을까 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웠어!” 지우는 참아왔던 감정을 모두 쏟아냈다. 그녀의 주먹이 테이블을 쳤다. 잔 속에 담긴 생강차가 흔들렸다.
민준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한참 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 그때… 병을 얻었어. 희귀병이었어.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고, 치료를 위해 외국으로 가야만 했어.”
지우의 울음이 뚝 그쳤다. 그녀는 민준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병… 이라고? 무슨… 병?”
“아주 심각했어. 솔직히… 내가 살아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어.” 민준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내 병이 너에게 짐이 될까 봐… 너의 빛나는 미래를 망치고 싶지 않았어. 너는 꿈이 많은 아이였잖아. 성공하고 싶어 했고… 나는… 내가 곁에 있으면 너의 발목을 잡게 될까 봐 두려웠어. 그래서… 그래서 너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너에게 슬픔을 주고 싶지 않았어.”
그의 고백은 지우의 심장을 날카로운 칼로 찢는 듯했다. 원망과 분노가 순간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대한 슬픔과 아픔이 밀려왔다. 십 년 동안 그를 미워했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는 혼자서 그 엄청난 고통을 감당했던 것이다. 말없이 사라진 그의 부재가, 사실은 그녀를 위한 깊은 사랑과 희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지우는 망연자실했다.
“그래서…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한 거야?” 지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를 위해서… 너 혼자 아팠다는 말이야?”
민준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응. 그때는 그게… 널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했어. 네가 나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보는 것보다… 차라리 내가 너에게서 사라지는 게 낫다고… 바보 같은 생각이었지. 정말 미안하다, 지우야. 정말… 정말 미안해.”
그의 사과는 십 년 묵은 상처를 한 번에 터뜨렸다. 지우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그녀의 눈물은 원망이 아니었다. 민준을 향한 한없는 연민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랑의 감정,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했던 그의 고통에 대한 슬픔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민준의 손은 차가웠다. 그녀의 온기가 그의 차가운 손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지우는 그저 꽉 잡았다.
창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눈꽃은 끝없이 쏟아져 내렸다. 십 년 전의 그날처럼, 세상은 온통 눈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오늘의 눈꽃은 더 이상 슬픔이나 약속의 파기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십 년의 오해와 아픔을 덮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순백의 서막과 같았다. 지우는 민준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서 그녀는 아직 꺼지지 않은 그들의 약속의 불꽃을 보았다. 이제 그 불꽃을 다시 피워 올릴 수 있을까. 십 년이라는 거대한 간극을 넘어, 그들은 다시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손은 겨울 눈꽃이 내리는 설화정 안에서, 뜨겁게 얽혀 있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재회는 한 조각의 새로운 눈꽃처럼 위태롭고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