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차갑고도 부드러웠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를 쓰다듬으며, 그 안에 잠들었던 생명들을 조심스럽게 깨우는 손길 같았다. 지우는 창가에 서서 햇살 아래 반짝이는 잎사귀들을 바라보았다. 앙상했던 가지마다 연둣빛 희망이 피어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평화로운 오후였다.
거실에서는 여섯 살 딸 혜린이 작은 블록으로 무언가를 짓고 있었다. 혜린의 작은 손에서 쌓아 올린 블록탑은 비틀거리면서도 꿋꿋이 하늘을 향해 뻗어 나갔다. 지우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혜린은 지우의 삶의 모든 것이자, 동시에 지우가 애써 잊으려 했던 그림자의 가장 선명한 흔적이었다.
잊혀진 계절의 그림자
시간은 모든 상처를 아물게 한다고들 했다. 하지만 어떤 상처는 아물지 않고 단지 피부 아래 깊숙이 잠복할 뿐이라는 것을 지우는 알고 있었다. 7년 전, 봄의 문턱에서 준호가 사라졌을 때, 지우의 세상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는 먼 나라의 위험한 구호 현장으로 떠났고, 얼마 후 그곳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고 소식과 함께 그의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는 소식은 지우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그때 지우는 준호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 혜린은 그렇게, 아빠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에 왔다. 지우는 준호의 그림자 속에서 혜린을 키웠고, 혜린이 자라면서 준호를 닮아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편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매일 밤 스스로에게 되뇌던 주문이었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평화 속에서, 지우는 혜린과 함께 견고한 듯 보이는 삶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문득 불어오는 꽃향기 속에서, 지우는 가끔 잊었던 얼굴을 떠올리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심장이 시큰거렸다.
예고 없는 방문자
딩동. 초인종 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지우는 조금 놀랐다. 평소에는 방문자가 거의 없었다. 혜린이 고개를 들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지우는 혜린에게 괜찮다는 눈빛을 보내며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낯익은 듯 낯선 얼굴이었다.
“강 감독님…?”
강 감독. 준호와 함께 먼 나라의 구호 활동을 떠났던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다. 그 역시 사고 이후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몇 년 전 겨우 생존 소식이 전해졌지만, 그 후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강 감독의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종이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지우 씨…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지우의 심장이 불길하게 내려앉았다. 또 무슨 일일까. 잊었던 과거가 다시 나를 찾아온 것일까.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거실에 앉은 강 감독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혜린은 블록 놀이에 다시 몰두했지만, 지우는 온몸의 신경이 강 감독의 입술에 집중되어 있었다.
“준호… 준호가 살아있습니다.”
그 한마디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혜린의 블록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지우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살아있다니? 준호가? 7년 동안 묻어두었던, 감히 꺼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감독님… 농담이 심하시네요.”
지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질까 봐 두려웠다.
강 감독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낡은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투박하게 깎인 작은 나무 조각이었다. 새의 형상이었다. 지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준호가 늘 만들던 작은 새 모양의 조각이었다. 언제나 지우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며 주었던 작은 부적 같은 것.
“준호가… 사고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주 먼 오지에서 지내고 있었어요. 제가 최근에 그 지역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를 만났습니다. 그가 이걸 제게 주면서, ‘어느 봄날, 이 작은 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잊혀진 약속을 전해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가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는 건,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에 대한 그리움뿐이었습니다.”
강 감독의 말이 이어질수록, 지우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준호가 살아있다는 사실보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아이를 그리워한다는 말이 지우의 심장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잃어버린 7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혜린은 아빠 없이 자랐는데, 그 아빠가 살아있었다니.
혼란 속의 희망
강 감독은 준호가 서서히 기억을 되찾고 있으며, 지금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준호가 보내온 편지를 건넸다. 삐뚤빼뚤한 글씨체는 낯설었지만, 마지막에 적힌 ‘너와 우리 아이에게’라는 문구는 분명 준호의 것이었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엄마, 왜 울어?”
혜린이 블록탑을 다시 쌓다가 지우에게 다가왔다. 작은 손으로 지우의 뺨을 감쌌다. 지우는 혜린을 품에 안았다. 혜린의 따뜻한 체온이 지우의 몸을 감쌌다. 이 아이에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빠가 살아 돌아온다는 소식을.
강 감독은 말없이 지우와 혜린을 지켜보았다. 그의 눈에도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말했다.
“곧 돌아올 겁니다. 봄이 끝나기 전에.”
강 감독이 돌아간 후, 지우는 한참을 혜린을 안고 앉아 있었다. 혜린은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지우는 작은 나무 새 조각을 손에 쥐었다. 차가웠던 나무 조각에서 서서히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7년의 세월, 혜린이 태어나고 자란 시간, 그리고 지우가 다시 일어서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던 모든 순간들이 이 작은 나무 새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듯했다.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따스한 봄바람이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바람은 잊혀졌던 소식을 전했고, 그 소식은 지우의 세상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행복과 혼란,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의 소용돌이. 지우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이제 그녀의 삶은 다시 한번, 거대한 변화의 기로에 서 있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봄바람은, 단순한 계절의 변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잊혀졌던 약속을 다시금 상기시키는, 가장 강렬하고도 가장 연약한 희망의 전령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