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빛, 혹은 또 다른 그림자
강우진은 낡은 지도를 펼쳤다. 바람이 실어 나르는 바다 내음, 짠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은 강원도 깊숙한 곳의 작은 항구 마을, ‘청솔포’. 서연의 흔적을 찾다 지쳐버린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건, 한 통의 익명 제보 때문이었다. “강우진 씨가 찾는 그 사람, 어쩌면 청솔포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도자기 공방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낡은 어선들이 정박해 있고, 작은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고요한 마을이었다. 파도 소리만이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다. 그의 눈은 간판 하나하나를 훑었다. ‘솔향 도예’, ‘바다 그림 공방’… 그러다 그의 시선이 멈춘 곳은 작은 유리창 너머로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이 진열된 ‘해오름 도예’였다.
그녀의 뒷모습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발걸음은 멈췄고,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잊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뒷모습. 햇살이 스며드는 공방 안에서, 그녀는 물레 앞에 앉아 있었다. 흙에 집중하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 살짝 고개를 숙인 옆모습, 그리고 오래전부터 그의 기억 속에 각인된 그 특유의 머리칼… 서연이었다. 분명 서연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는 수없이 상상해왔던 재회였다. 그녀를 만났을 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그러나 막상 눈앞에 그녀가 나타나자, 모든 말은 목구멍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흙을 빚고 있었다. 굽이진 목선, 살짝 상기된 뺨, 그리고 그의 마음을 무수히 흔들었던 그 예술가의 손. 아, 서연아… 우진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10년이 넘는 세월, 그는 이 순간만을 위해 살아왔다. 잊으려 애써도 잊히지 않던 이름, 꿈속에서도 끊임없이 그렸던 얼굴. 그녀는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을까. 왜 그를 떠났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한 발짝, 한 발짝 공방 문을 향해 다가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이제 곧, 모든 의문이 풀릴 것이다.
행복, 그리고 균열
그 순간, 공방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선 그 남자는 자연스럽게 서연의 어깨를 감쌌다. 서연은 고개를 들어 남자와 눈을 마주했고,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우진이 기억하는, 그에게만 보여주던 애틋하고 순수한 미소와는 달랐다. 평온하고, 안정되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마치 오래된 습관처럼 자연스러운 연인의 모습.
세상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고, 우진의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그의 서연이, 다른 남자의 곁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찢어질 듯한 고통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찾고 싶었던 그녀가 눈앞에 있지만, 그녀의 행복을 깨뜨릴 권리가 자신에게 있을까? 그녀가 자신을 기억이나 할까? 아니, 설령 기억한다 해도, 그의 등장으로 그녀의 평화로운 삶이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그곳에 서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발은 저절로 뒤로 향했다.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는 골목길 안으로 숨어들어, 공방을 등지고 선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은 이미 젖어 있었다.
잃어버린 암호
하지만 우진은 그대로 돌아설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공방 유리창으로 향했다. 그때, 진열된 도자기들 사이에서 유난히 그의 눈길을 끄는 작은 작품이 있었다.
작은 조약돌 모양의 도자기 인형. 그 인형 위에는 작은 나뭇잎 모양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나뭇잎 옆에는, 희미하게, ‘U+Y’라는 이니셜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와 서연이 어린 시절, 숲속에서 주운 조약돌에 새겨 넣었던 그들만의 암호였다. 우진(Woojin)과 서연(Yeon).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녀는 잊지 않았다. 적어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왜 침묵했을까? 왜 자신을 찾지 않았을까?
우진은 손으로 거친 눈물을 닦아냈다. 그의 심장은 다시 뜨겁게 타올랐다. 그녀의 행복을 깨뜨리지 않으면서도, 이 모든 진실을 알아내야 했다. 그의 첫사랑이 가진 비밀, 그리고 그가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을 맞춰야 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청솔포의 밤바다를 등지고, 강우진은 결심했다. 그는 이제 그녀의 잃어버린 과거를 캐는 탐정이 아니라, 그녀의 현재를, 그리고 그 너머의 진실을 파헤치는 탐정이 될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의 해답이 담겨 있을, 그녀의 이야기를 찾아내야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