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66화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빛

준호는 식탁 위에 놓인 붓과 물감 통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몇 달째 마른 채 굳어버린 물감들은 마치 그의 메마른 열정 같았다. 튜브를 아무리 짜내도 더 이상 새로운 색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처럼, 그의 마음속에서도 어떤 영감의 샘도 말라버린 듯했다. 며칠 전 공모전 결과는 참담했다. 그토록 공들였던 작품은 어떤 주목도 받지 못했고, 심사평에는 ‘고유의 색을 잃었다’는 냉정한 한 줄만이 적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으면서도 외면하고 싶은 비겁함일지도 몰랐다. 깊은 한숨이 어깨를 짓눌렀다. 창밖의 하늘은 뿌옇게 흐려 있었고, 그의 마음속 구름은 그보다 더 짙고 무거웠다.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물든 것 같았다.

그때였다. 창턱에 스르륵 올라선 별이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야옹?" 늘 그렇듯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분명 질문이 담겨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해, 인간?’ 언제나처럼 예리하게 그의 심연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준호는 별이를 돌아보았다. 금빛 눈동자가 늦은 오후의 햇살을 머금고 신비롭게 빛났다. 녀석은 언제나 그의 고통을 알아차리는 듯했다. 지난 수년간, 그의 삶의 가장 어둡고 혼란스러운 순간마다 별이는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다. 때로는 따뜻한 체온으로, 때로는 알 수 없는 깊이를 가진 눈빛으로.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별이의 부드러운 털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녀석의 체온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별아,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 이젠 정말 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어. 내 그림은 더 이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는 것 같아. 그냥… 다 포기해버릴까 봐." 준호의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짙게 스며 있었다. 그는 별이가 자신의 말을 전부 이해하리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의 마음을 읽어내리라 믿었다.

별이는 준호의 손길을 잠시 즐기더니, 갑자기 창틀에서 뛰어내려 현관문 쪽으로 총총걸음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야옹!" 하고 한 번 더 명확하게 울었다. 그 소리는 마치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리 와’라고 말하는 듯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꼬리 끝에는 어떤 단호함마저 엿보였다.

어제의 흔적, 오늘의 가시밭길

준호는 별이의 이끄는 대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현관문을 열고 따라나섰다. 별이는 앞장서서 그의 작은 정원 깊숙이 파고들었다. 준호의 정원은 한때 그의 영감의 원천이자 안식처였다. 다채로운 꽃들이 계절마다 피어나고, 작은 연못에서는 물고기들이 평화롭게 노닐었다. 하지만 최근 몇 달 동안, 그의 마음처럼 정원도 무성한 잡초와 엉킨 가시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특히 정원 가장 안쪽, 오래된 석등이 희미하게 보이는 곳은 칡덩굴과 가시나무들이 얽히고설켜 도무지 손댈 수 없는 지경이었다. 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어둡고 축축한 구석이었다.

별이는 그 가시덤불 앞에서 멈춰 서더니, 마치 ‘이것 좀 봐’라고 말하는 듯이 그곳을 가리키는 듯했다. 그리고는 휙 돌아서서 준호를 올려다보았다. 준호는 녀석의 금빛 눈빛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읽었다. ‘저 속에 뭔가 있어. 네가 잊고 있던, 중요한 것. 감히 손대지 못하고 외면했던 진실.’

"여기를… 치우라고?" 준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저 끔찍하고 거대한 가시덤불을 치우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뾰족한 가시들은 맹렬하게 솟아 있었고, 덩굴들은 뱀처럼 서로를 휘감고 있었다. 온몸에 상처를 입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별이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더 단호하고 깊은 확신으로 가득 차는 듯했다.

결국 준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작은 전정가위와 튼튼한 장갑을 들고 무성한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뾰족한 가시들이 옷깃을 스치고 팔을 할퀴었다. 따끔거리는 고통과 함께 피가 맺히는 상처들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분노와 짜증이 앞섰다. ‘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내가 뭘 얻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지? 별이 너는 왜 날 이런 곳으로 이끄는 거야?’ 그는 거칠게 가시나무 가지들을 잘라내고 잡아 뜯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가시덤불을 걷어내는 행위는 묘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얽히고설킨 가지들을 하나씩 풀어내고, 질긴 뿌리들을 잘라낼 때마다, 그의 마음속을 옥죄던 답답함이 조금씩 풀리는 듯했다. 숨 막히는 압박감 대신, 육체적인 피로가 그 자리를 채웠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눈을 따갑게 했다. 준호는 더 이상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손에 쥔 가위질에 집중했다. 싹둑, 싹둑. 가위 소리가 정적을 깨고 정원을 채웠다.

가시를 걷어내면 드러나는 진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노을빛이 정원을 붉게 물들일 무렵, 마침내 가시덤불의 절반 이상이 걷혔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오랜 시간 잊혔던 석등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났다.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섬세하게 조각된 돌의 문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지만, 그 견고함은 변치 않았다. 석등의 아랫부분, 흙과 돌이 만나는 틈새에는 잡초들이 파고들어 공간을 벌리고 있었고, 그 사이로 작은 새싹 하나가 용케도 삐져나와 있었다. 이제 막 땅을 뚫고 솟아난 연약한 새싹이었지만, 그 푸른 기운은 석등 주변의 죽은 듯한 흙색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생명의 강렬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잎사귀 하나하나에서 끈질긴 생명력이 느껴졌다.

준호는 주저앉아 그 새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 이 여린 생명이 저 끔찍한 가시덤불 아래에서 빛을 찾아 헤매었을까. 어쩌면 그 자신처럼, 어둠 속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새싹을 둘러싼 마지막 잔가지들을 조심스럽게 치워주었다.

별이는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 석등과 새싹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는 준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금빛 눈빛 속에서 준호는 분명한 메시지를, 마치 속삭임처럼 들었다.

‘봐. 때로는 가장 아름다운 빛이 가장 날카로운 가시덤불 아래에 숨겨져 있단다. 그리고 가장 굳건한 뿌리는 가장 어두운 흙 속에서 자라나는 법이지. 네가 잃었다고 생각했던 너의 빛도, 너의 뿌리도… 결코 사라진 게 아니야. 단지 너무 많은 걱정과 두려움이라는 가시덤불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야. 이제 그 가시들을 걷어낼 때가 된 거지.’

준호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실패에 대한 가시덤불에 갇혀, 그 아래에 숨겨진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고유의 색을 잃었다’는 심사평은, 어쩌면 그가 스스로 가시덤불을 만들어 자신의 색을 가린 결과였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자각이 밀려왔다. 가시덤불을 치우며 손에 난 상처들은 오히려 명료한 깨달음의 증거처럼 느껴졌다.

다시 피어날 희망의 색

준호는 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 별아. 네 덕분에 내가… 내가 뭘 해야 할지 알았어. 다시 시작할 용기가 생겼어."

별이는 조용히 눈을 감고 준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만족감에 미세하게 진동하는 그녀의 목덜미가 느껴졌다. 석양은 이제 막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지만, 석등 주변의 말끔하게 정리된 구역은 이제 어둠 속에서도 희미한 윤곽을 드러냈다. 준호는 남은 가시덤불을 모두 걷어내고, 흙먼지를 털어내 오래된 석등을 다시 환하게 밝힐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여린 새싹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도록 매일 물을 주고 돌봐줄 것이었다.

그날 밤, 준호는 오랜만에 캔버스 앞에 앉았다. 마른 물감 통을 보며 그는 이제 슬픔이 아닌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마음속 어둠을 가시덤불처럼 걷어내고 나니, 이제 무엇을 그려야 할지, 어떤 색을 사용해야 할지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고유한 색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단지 너무 많은 걱정과 두려움 속에 파묻혀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붓질은 망설임 없이 캔버스 위를 유영했다. 이제 그의 그림은 정원의 석등처럼, 깊은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될 것이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 빛은 더욱 선명해지리라. 별이는 준호의 발치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는 평화로웠고, 준호의 마음도 그러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시작되는, 희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시작의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