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렸다. 할아버지 댁 넓은 마당의 돌계단은 이미 지열로 뜨겁게 달아올라 아지랑이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매미 소리는 귀청이 터질 듯 울어대었고, 지후는 연신 부채질을 하며 땀을 닦았다. 하나는 그런 지후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선호는 마루 끝에 앉아 푹 익은 자두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야, 지후야, 좀 쉬엄쉬엄 해. 그러다 더위 먹어.” 하나가 말했다. 지후는 아랑곳하지 않고 창고 구석에 쌓인 잡동사니들을 헤집고 있었다. 지난번에 할아버지가 “저기 어디쯤에 오래된 풍금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하고 흘리듯 말했던 것이 지후의 탐험심에 불을 지른 참이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로 지후는 하루도 빠짐없이 창고를 뒤지고 있었다. 물론 풍금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형! 이거 봐봐!”
선호의 목소리가 마루 끝에서 울렸다. 지후가 고개를 돌려보니 선호는 먼지 쌓인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씨름하고 있었다. 하나와 지후는 동시에 선호에게 다가갔다.
“어디서 찾았어?” 하나가 물었다. 나무 상자는 꽤 낡아 있었고, 거미줄이 여기저기 엉겨 붙어 있었다. 뚜껑에는 희미하게 용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세월의 흔적 속에서 그 형태를 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선호는 땀으로 범벅이 된 손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저기, 할아버지 방 다락방 계단 밑 구석에 있었어. 잘 안 보이게 숨겨져 있더라!”
지후는 눈을 빛냈다. “뭔데? 보물 상자 아니야?”
세 아이는 상자를 마루로 가지고 와서 조심스럽게 열었다. 퀴퀴하고 묵은 종이 냄새가 확 풍겨왔다. 안에는 낡은 천 조각, 빛바랜 엽서 뭉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듯, 검은 벨벳 천에 싸인 작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떨리는 손으로 벨벳 천을 풀었다. 이내 드러난 것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은색 로켓이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검게 변색되었지만, 섬세하게 새겨진 꽃 문양이 아직도 고고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잠금장치는 굳게 닫혀 있었다.
“와… 예쁘다.” 선호가 숨을 삼켰다. 지후는 조심스럽게 로켓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열쇠구멍을 찾았다. “이거… 어떻게 여는 거지?”
하나는 로켓의 틈새를 손톱으로 살살 건드려 보았다. 오랜 시간 닫혀 있었던 탓인지 꽤 힘을 줘야 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로켓이 마침내 열렸다. 안에는 작고 빛바랜 사진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사진에는 앳된 얼굴의 할아버지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금의 주름진 얼굴과는 사뭇 다른, 혈기 왕성한 청년의 모습이었다. 두 번째 사진에는 곱고 단아한 모습의 젊은 여인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의 눈매는 마치 부드러운 산등성이 같았고, 얇은 저고리 사이로 비치는 하얀 목선이 청초한 아름다움을 더했다. 사진 아래에는 아주 작게, 마른 나뭇잎 조각 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세 아이는 사진을 번갈아 보며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특히 젊은 여인의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 이런 시절이 있었다니. 그리고 이 여인은 누구일까. 궁금증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때마침 할아버지가 마당으로 나오셨다. 등목을 하셨는지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얘들아, 더운데 여기서 뭐 하는 게냐?”
할아버지를 발견한 세 아이는 약속이라도 한 듯 로켓을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할아버지! 이거 보세요! 다락방에서 찾았어요! 여기 할아버지도 있고, 이 예쁜 아주머니는 누구예요?” 선호가 제일 먼저 재잘거렸다.
할아버지의 시선이 로켓에 닿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스르르 사라졌다. 햇빛이 강하게 내리쬐는 마당 한가운데서도 할아버지의 눈빛은 마치 먼 곳을 응시하는 듯 아득해졌다. 손으로 로켓을 받아 든 할아버지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로켓을 열어 안의 사진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이 아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몹시도 희미하고 갈라졌다. 마치 먼지 쌓인 낡은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같았다. 할아버지의 눈가에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눈물이 차오르는 듯했지만, 애써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는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깊은 슬픔을 읽었다. 활기 넘치고 장난기 많던 할아버지가 마치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고통스러운 기억과 맞닥뜨린 사람처럼 보였다.
“이… 이 아이는… 내 첫사랑이었단다.” 할아버지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사진 속 젊은 여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는 참… 좋았지….”
짧은 한숨이 할아버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그 한숨에는 수십 년의 세월과 헤아릴 수 없는 그리움이 담겨 있는 듯했다. 아이들은 그저 말없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작은 어깨 위로, 갑자기 시간의 무게와 낯선 슬픔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로켓을 꽉 쥐었다. 마치 그것이 세상에 남은 유일한 보물인 양. 그의 눈빛은 여전히 멀리, 아주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제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 댁에서의 모험이 항상 신나는 보물찾기나 신비로운 장소 탐험만은 아니라는 것을. 때로는 이렇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깊은 이야기와 마주하는 것 또한 모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뜨겁던 여름날의 오후, 할아버지의 손에 들린 작은 로켓은 시간의 켜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한여름의 정적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의 가슴속에도 그 로켓이 새겨놓은 알 수 없는 감정의 파동이 잔잔하게 번져 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