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70화

겨울의 마지막 한기가 기어이 집 안까지 스며드는 밤이었다. 낡은 한옥의 서재는 문풍지를 뚫고 들어오는 바람 소리로 가득했지만, 나의 시선은 오직 손에 든 낡은 일기장, 그 얇고도 무거운 종이 위에 갇혀 있었다. 지난 수많은 밤 동안 할머니의 숨결을 따라온 여정은 이제 거의 끝을 향하고 있었다. 페이지는 얇아질수록 그 위에 담긴 이야기의 무게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갔다.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다음 장을 넘겼다. 잉크가 번지고 색이 바랜 글씨들이 나를 맞았다. 유난히 힘겹게 써 내려간 듯한 그 필체에서 할머니의 고뇌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날짜는 1950년대 후반의 어느 겨울밤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 아니 나의 어머니가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전의 시간이었다.

그 겨울밤, 그리고 선택

할머니의 글씨는 비틀거렸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너무나 선명했다.

“오늘 밤은 유난히 달이 차갑다. 품에 안은 아이의 작은 온기가, 이 차가운 세상의 전부인 양 느껴지는구나. 이 아이마저 지키지 못하면,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닐 터. 하지만 그 아이의 눈망울은 어미의 무능을 꿰뚫어 보는 듯하다. 굶주림은 인간의 존엄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이다.”

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나는 할머니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나의 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 하지만 할머니의 일기장에는 종종 알 수 없는 슬픔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구절들이 등장했고, 나는 그것이 전쟁 통에 잃은 가족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라고만 짐작해왔다.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자, 글씨는 더욱 흔들렸다. 잉크 자국 위에 오래된 눈물 자국처럼 번진 흔적들이 선명했다.

“내일이면, 내 손으로 그 아이를 떠나보내야 한다. 이 어미의 품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면, 다른 이의 품에서라도… 그 작은 생명이 숨 쉬기를 바라야지. 갓난아기 때부터 왼쪽 손목에 작은 초승달 모양의 옅은 붉은 반점을 가졌던 아이.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어미의 눈에는 너무나도 선명한 그 흔적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초승달 모양의 옅은 붉은 반점.’ 이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믿을 수 없는 기시감과 함께 어떤 기억의 파편이 솟아올랐다.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손이 떨려왔다.

할머니의 글은 이어졌다. 마치 찢어지는 심정을 억누르며 한 자 한 자 새겨 넣은 듯했다.

“옷고름에 몰래 넣어준 작은 은장도 노리개. 부디 그 아이의 이름과 함께, 저주가 아닌 축복으로 기억되기를 바랄 뿐이다. 언젠가 이 세상 어딘가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사랑받으며 살아가기를… 너의 오빠들은 이 어미의 곁에서 겨우 살아남았으나, 너는… 너만은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건만, 이리도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는 것을 보니, 나는 참으로 어리석은 어미인 듯싶다.”

나의 손에서 일기장이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나는 황급히 그것을 다시 붙잡았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은장도 노리개.’ 이 또한 익숙한 단어였다. 나는 어릴 적, 낡은 장롱 깊숙한 곳에서 발견했던 작은 은장도 노리개를 기억했다. 할머니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건 귀한 것이니 함부로 만지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던 기억도. 그때는 그저 옛 물건이려니 했다. 하지만 지금, 그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왔다.

잊혀진 이름, 그리고 진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는 할머니의 애통한 목소리가 울리고, 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할머니에게는 두 아들 외에 딸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딸을 살리기 위해, 혹독한 가난 속에서 다른 가정으로 보내야만 했던 것이다.

내가 어릴 적, 늘 우리 집에 방문하시던 자상한 할머니가 계셨다. 친할머니와는 다른 분이셨지만,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정성스러운 선물을 들고 오셨다. 그분은 우리 가족과는 핏줄이 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도 유독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셨다. 어머니는 그분을 ‘이모님’이라고 불렀고, 나는 늘 그분을 ‘정 이모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런데 문득,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어느 여름날, 이모할머니와 목욕탕에 갔던 기억. 이모할머니의 왼쪽 손목에 옅게 자리 잡고 있던 초승달 모양의 희미한 반점. 나는 그 어린 날, “이모할머니, 왜 여기 달이 있어요?” 하고 물었고, 이모할머니는 웃으며 “옛날 옛적에 달님이 이모할머니 손목에 도장을 쿵 찍고 갔단다.”라고 답하셨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할머니는 왠지 모르게 슬픈 미소를 지으셨던 것을 나는 기억해냈다.

그리고 이모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항상 가지고 오시던, 작은 복주머니 속에 고이 간직했던 은장도 노리개. 할머니가 어린 시절 보여주셨던 것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이었다.

나는 급하게 다시 일기장을 펼쳤다. 마지막 글귀, 할머니의 혼이 담긴 듯한 절규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하늘에 맹세코, 단 한순간도 너를 잊은 적이 없단다. 내 사랑하는 둘째 딸, 은아. 부디 네가 이 어미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주기를, 그리고 혹시라도 이 어미를 용서해주기를… 평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이름, 은아.”

은아. 정 이모할머니의 이름이었다. 나의 할머니와 정 이모할머니가 사실은 친자매였다는 것인가? 아니, 일기장의 흐름으로 보아, 정 이모할머니는 할머니의 잃어버린 딸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이모할머니를 ‘이모님’이라 불렀으니, 그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어머니 또한 이모할머니를 할머니의 언니쯤으로 알고 있었던 것일까?

할머니가 정 이모할머니에게 보여주었던 유난스러운 애정,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 했지만 늘 이모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이유가 비로소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친어머니가 친딸을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할머니는 평생을 가슴 졸이며, 이모할머니의 주변을 맴돌며, 그저 ‘친한 동생’의 모습으로 살았던 것이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가장 고통스러운 선택을 한 후에도, 그 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왔던 것이다.

일기장 속 마지막 문장들을 읽어내려 가면서, 나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아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 여인의 처절한 사랑과 희생, 그리고 평생을 짊어진 비밀의 무게를 오롯이 담아낸 한 편의 서사시였다. 나는 할머니의 진정한 강인함과,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사랑 앞에 압도되었다. 차가운 바람 소리마저, 할머니의 슬픈 숨결처럼 들리는 밤이었다.

정 이모할머니. 나의 할머니의 딸, 나의 아버지에게는 누이. 그 놀라운 진실 앞에서, 나는 할머니가 살아생전 남긴 수많은 말들과 행동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이 거대한 사랑의 비밀을 어떻게 마주하고,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가 닫히는 순간, 나의 어깨 위로 새로운 이야기의 무게가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