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71화

새벽녘, 창밖은 온통 하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간밤에 그렇게도 미끄러지듯 내리던 눈이 쌓이고 쌓여,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바꿔놓았다. 하얀 세상 속에서 홀로 깨어난 하은은 창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들을 응시했다. 마치 누군가 희고 깨끗한 붓으로 섬세하게 그려낸 동양화 같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 풍경은 그처럼 평화롭지 못했다.

차게 식은 유리창에 손바닥을 대자, 온기 없는 한기가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이 차가움이 익숙해질 때쯤이면 겨울도 끝나려나. 아니, 겨울은 끝나도 이 마음의 한기는 쉬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의 삶은 마치 거대한 빙하 위에 위태롭게 놓인 작은 조각배 같았다. 언제 균열이 생겨 바다 깊이 가라앉을지 모르는 불안감에 늘 시달렸다.

얼어붙은 시간의 강

어머니의 병세는 날마다 깊어지고 있었다. 의사의 말은 늘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하은은 매일 아침 병원으로 향하는 길, 쌓인 눈 위를 걷는 발걸음마다 무거운 짐을 진 듯 어깨가 짓눌렸다. 한때 그녀의 삶을 가득 채웠던 환한 웃음소리는 이제 아득한 기억 저편의 메아리 같았다. 그녀는 그 웃음소리를 붙잡으려 애썼지만, 잡히지 않는 허공처럼 흩어질 뿐이었다.

병원 복도는 늘 차가운 소독약 냄새와 희미한 적막으로 가득했다. 어머니의 병실에 들어서자, 창밖 설경과는 대조적으로 생기 없는 얼굴로 잠들어 있는 어머니가 그녀를 맞았다. 가느다란 숨소리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하은은 어머니의 마른 손을 잡았다. 따뜻했던 온기는 희미해지고, 차가운 손이 그녀의 손을 스쳤다. 어린 시절, 그 손은 늘 그녀를 안아주고, 보듬어주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포근한 손이었다.

“엄마….”

갈라지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대답 없는 침묵만이 그녀를 감쌌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어머니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억지로 미소 짓고, 씩씩한 척했다. 하지만 그 가면 뒤편에서 그녀의 마음은 시리고 아렸다. 어린 시절, 눈 오는 날이면 함께 만들던 눈사람, 서로의 얼굴에 눈을 던지며 깔깔대던 웃음소리, 그리고 추운 손을 녹여주던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의 기억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왔다.

그때였다. 병실 문이 아주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은은 고개를 돌렸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림자가 문턱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병원 복도의 희미한 불빛이 마치 후광처럼 비쳤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함께 데려온 듯, 그의 주변에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다가오는 그를 하은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준서였다. 그가 왜 여기에?

그의 눈은 여전히 깊고 어두웠다. 하지만 과거의 날카로움 대신, 왠지 모를 슬픔과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그는 하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없이 위로를 전하려는 듯했다. 몇 년 만에 마주한 얼굴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던 날도, 이렇게 눈이 내리던 겨울이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었던 그때처럼, 지금도 차가운 겨울 한가운데였다.

“…어떻게… 왔어?”

하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준서는 그녀의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창밖의 하얀 눈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들었어. 어머님 소식.”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그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텅 빈 의자에 앉았다. 그와 하은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병실 안의 희미한 기계음과 어머니의 가느다란 숨소리만이 그 정적을 깨뜨렸다.

하은은 준서를 흘끗 보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해 보였다. 어릴 적, 겨울 눈밭에서 놀다 손이 얼어붙을 때면, 늘 준서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의 손은 늘 뜨거웠고, 그 온기는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까지 녹여주곤 했다. 그때의 약속이 떠올랐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서로의 손을 잡고 영원을 맹세했던 어설프지만 진심 어린 약속.

그 약속은 이제 어디로 갔을까. 세월의 강물에 쓸려 내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걸까. 아니면, 이 마음속 깊은 곳 어딘가에, 얼어붙은 채로 남아 있는 걸까.

새로운 눈꽃, 그리고 오래된 상흔

준서는 하은이 잡고 있는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움, 안타까움, 그리고 어쩌면… 죄책감 같은 것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하은의 어깨를 감쌌다. 갑작스러운 그의 접촉에 하은의 몸이 움찔 떨렸다.

“혼자 힘들어하지 마.”

그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의 귓가를 스쳤다. 따뜻하면서도 아련한 온기가 그녀의 어깨를 통해 전해졌다. 하지만 하은은 그 온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오래된 상흔이 다시금 아려왔다.

“네가… 여기 올 필요 없었어.”

하은은 끝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준서의 손이 움찔했지만, 그는 어깨를 감싼 손을 거두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하은아.”

그의 부름에 하은은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애써 외면했던 과거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그날, 얼어붙은 강가에서 반짝이던 눈꽃처럼 희미하고 아름다웠던 약속의 순간들. 그리고 그 약속이 산산이 부서지던 차가운 이별의 순간들.

“너도 알잖아. 우리가 돌아갈 수 없다는 거.”

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사실은 스스로에게 하는 주문과도 같았다. 준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가에 드리운 그림자가 더욱 깊어졌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다시 여기까지 왔어.”

그의 고백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은의 마음속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그녀의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감정들을 다시 휘저었다. 혼란스러웠다.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다독이며 굳게 닫아왔던 마음의 문이, 그의 존재만으로도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께 드릴 게 있어.”

준서가 품에서 작은 목각 인형을 꺼냈다. 투박하지만 정성스럽게 깎아 만든 인형은, 옛날 하은의 어머니가 아끼던 것이었다. 하은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어린 시절 그녀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머니가 병실 창밖을 보며 “언제쯤 다시 눈꽃이 예쁘게 내릴까”라며 읊조리던 그때, 준서가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인형이었다. 그 이후 어머니는 늘 그 인형을 머리맡에 두고 아꼈었다.

인형은 고스란히 준서의 손에 들려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인형을 보자, 하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준서는 인형을 어머니의 침대 옆 탁자에 조심스럽게 놓았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얇은 이불을 살짝 덮어주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옛날처럼, 조심스럽고 따뜻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이 내렸다. 새로운 눈꽃들이 하늘에서 춤추듯 내려와, 차가운 세상을 덮었다. 하은은 준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는 전보다 훨씬 넓고 단단해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넓어진 어깨 위에도, 그녀만큼이나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는 듯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것은 과연 영원히 깨어진 조각으로 남을까, 아니면 이 새로운 눈꽃 아래에서 다시 피어날 수 있을까. 하은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준서의 존재가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에 미세한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균열 속으로, 차가운 바람과 함께 어쩌면 따뜻한 희망 한 조각이 스며들고 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