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훈은 텅 빈 사무실의 정적 속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지난 몇 년간 쌓아 올린 서연의 흔적들이 먼지처럼 흩어져 있었다. 희미해진 사진들, 낡은 수첩, 오래된 명함들. 지난번 그 사진 스튜디오에서 얻었던 단서는 뼈대만 남은 채 허망하게 부서져 버렸다. 스튜디오 주인은 서연이 잠시 일하긴 했지만, 갑자기 연락을 끊고 사라졌다며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고 했다. 또다시 찾아온 막다른 골목이었다.
지훈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옆을 묵묵히 지키던 낡은 머그잔에는 식어버린 커피가 반쯤 남아 있었다. 이 끝없는 추적에 때때로 회의감이 밀려왔다. 서연이 정말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이라면? 혹은, 이미 새로운 삶을 시작했고, 자신이 과거에 집착하는 것뿐이라면?
그러나 그럴 때마다 심장 한구석에서 솟아나는 강렬한 열망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서연을 찾고 싶었다. 이유를 묻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녀의 웃음을 보고 싶었다.
지훈은 다시 서류 더미를 뒤적였다. 사진 스튜디오의 오래된 직원 명부였다. 서연의 이름 옆에는 몇몇 동료들의 이름이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대부분은 연락처가 없거나, 이미 다른 곳으로 이직한 지 오래였다. 그러다 한 이름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명진’. 서연과 동갑내기였던 이명진은 스튜디오 근처에서 작은 공방을 운영했었다는 메모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너무 오래된 정보라 별 기대 없이 넘겼던 부분이었다.
“공방….” 지훈은 중얼거렸다. 서연은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어쩌면 이명진이라면 그녀의 취향이나, 떠나기 전의 작은 실마리라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샘솟았다.
오래된 공방의 그림자
낡은 상가 건물들 사이에 자리한 작은 찻집 겸 도예 공방. ‘흙으로 빚은 마음’이라는 간판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흙냄새와 은은한 차 향이 섞인 독특한 공기가 그를 맞았다. 백발이 성성한 여인이 흙으로 빚은 컵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명진 씨 되십니까?” 지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인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깊은 눈빛 속에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는 듯했다. “네, 그런데 누구세요?”
지훈은 명함을 내밀었다. “사립 탐정 강지훈입니다. 혹시… 김서연 씨를 기억하시는지요?”
서연의 이름이 나오자 여인의 얼굴에 미묘한 변화가 스쳐 지나갔다. 당혹감과 함께 씁쓸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이내 붓을 내려놓고 지훈에게 차를 권했다.
“서연이라니…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요.” 이명진 씨는 따뜻한 차를 내밀며 나지막이 말했다. “앉으세요. 어쩐 일로 서연이를 찾는 거죠?”
지훈은 짧게 자신이 서연의 첫사랑이며, 수년째 그녀를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명진 씨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녀의 시선은 지훈의 간절함과 어딘가 모르게 닮아 있었다. 긴 침묵 끝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서연이는… 정말 특별한 아이였죠. 재능도 많고, 마음도 따뜻하고.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아무에게도 말없이.”
지훈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혹시 그 이유를 아시는지요? 아니면 어디로 갔는지….”
이명진 씨는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다만… 떠나기 전부터 서연이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이 좀 있었어요. 서연이가 뭔가에 휘말린 것 같았죠.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이 역력했어요. 나에게도 ‘언니, 나 요즘 좀… 복잡한 일에 얽힌 것 같아요’라고 한두 번 말한 적이 있었어요.”
복잡한 일. 지훈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울렸다.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쫓기거나 숨어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등골이 오싹했다.
“혹시 서연이가 즐겨 찾던 곳이라든지…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 같은 건 없었나요?” 지훈이 희망을 놓지 않고 물었다.
이명진 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 하나 있네요. 서연이가 특히 좋아했던 카페가 있었어요. 예술가들이 모이는 작은 아지트 같은 곳이었는데… 거기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용한 시간을 보내곤 했죠. 자기 작품 몇 점을 거기 맡겨두기도 했고요.”
그녀는 오래된 수첩을 꺼내더니 주소 하나를 적어 주었다. ‘고요한 그림자 카페’.
고요한 그림자 카페
이명진 씨가 알려준 카페는 번화가에서 한참 벗어난 골목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간판조차 없는 듯한, 낡고 오래된 문을 열자 예상치 못한 아늑한 공간이 펼쳐졌다. 벽에는 무심한 듯 걸린 그림들과 조각들이 있었고, 낮은 재즈 선율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흡사 서연의 취향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지훈은 마치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빠졌다. 서연이라면 분명 이 의자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창밖을 응시했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거나, 혹은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숨결이 여전히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카페 주인은 젊은 예술가로 보이는 남자였다. 지훈은 자신이 탐정임을 밝히고 서연에 대해 물었다. 남자는 서연의 이름을 듣자마자 눈을 빛냈다. “김서연 작가님요? 아, 그분은 정말… 천재였죠. 그림도 좋고, 도예도 좋고. 한동안 이곳의 단골이었어요.”
“혹시 지금도 오는지요?” 지훈의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몇 년 전에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요. 그 이후로는 소식이 없네요. 안타깝게도… 남겨둔 작품도 몇 개 없어요. 대부분 찾아갔고, 몇 점은 팔렸죠. 다만….”
남자는 손가락으로 한쪽 벽을 가리켰다. 벽에는 여러 작가들의 스케치와 낙서가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중 한 귀퉁이에 낯익은 그림체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벽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서연이 즐겨 그리던 특유의 새 문양과 함께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지훈의 심장이 다시 쿵 떨어졌다.
새 문양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곳, 그림자가 춤추는 곳에서 기다려.”
지훈은 그 문구를 응시했다. 서연의 글씨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 문구 옆, 아주 작고 미묘하게 긁힌 자국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새겨 넣은 듯한 표식. 그것은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서연의 표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경고나 위험을 알리는 듯한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를 감시하고 있거나, 혹은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 같았다.
그 순간, 카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고, 길 건너편 가로등 아래에서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듯한 실루엣이 스쳐 지나갔다. 지훈이 급히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서연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숨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녀를 쫓는, 혹은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지훈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첫사랑을 향한 간절한 추적은 이제 단순한 찾음을 넘어, 그림자 속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진실 게임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서연을 반드시 찾아야 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 그리고 그가 탐정이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는 더 깊은 그림자 속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