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를 가르고 닭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아직 해가 완전히 솟아오르기 전, 마을은 옅은 안개에 싸여 고요했지만, 이장 김봉두 씨의 하루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늘 그랬듯 가볍고 경쾌했다. 굽은 허리 한번 없이 꼿꼿한 걸음은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한 젊음을 자랑하는 듯했다.
봉두 씨는 아침 일찍 마을 한 바퀴를 도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논길을 따라 걷다 보면 촉촉한 흙냄새와 풀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저 멀리 보이는 대청봉 자락에는 아직 밤의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이내 붉은 기운이 번지며 새로운 아침을 알렸다. 그는 조용히 마을을 응시했다. 밤사이 무탈했는지, 혹시라도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던 집은 없었는지, 꼼꼼히 살폈다. 이것이 그의 오래된 습관이자, 그의 유쾌함이 뿜어져 나오는 원천이었다. 마을 사람들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그는 행복과 책임을 동시에 느꼈다.
집으로 돌아와 뜨끈한 보리차 한 잔을 마시며 아침 식사를 기다렸다. 아내 순자 씨는 능숙한 솜씨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를 상에 올렸다. “이장님, 오늘은 또 얼마나 바쁘시려구요?” 순자 씨의 구수한 목소리에는 걱정 반, 애정 반이 담겨 있었다. 봉두 씨는 허허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바빠야지, 우리 마을이 잠들지 않고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 오늘은 오랜만에 아이들 도서관 좀 가봐야겠어.”
마을 한가운데 작은 건물, 예전에는 양곡 창고로 쓰였던 곳을 리모델링해 만든 아이들 도서관은 봉두 씨의 자랑 중 하나였다. 어르신 경로당 옆에 붙어 있어,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오가며 자연스럽게 교류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아이들의 발길이 뜸해진 것이 그의 마음에 작은 걱정거리로 남아 있었다.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에게 책은 너무 정적이고 지루한 매체로 여겨지는 듯했다.
오전 내내 마을 회관에서 서류 작업을 마친 봉두 씨는 점심 무렵 도서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책들과 텅 빈 의자들이 그를 맞았다. 한때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이곳이 이렇게 조용해진 것을 보니 마음 한편이 시큰했다. 그는 조용히 빗자루를 들고 쓸기 시작했다. 선반의 책들을 하나하나 닦고, 의자를 정렬했다. 한 아이라도 찾아와 책을 펼칠 때, 깨끗한 환경에서 읽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다 문득,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시던 옛이야기들이 떠올랐다. 호랑이와 곶감,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견우와 직녀…. 그 이야기들은 글자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목소리와 표정, 손짓 하나하나에 생명을 얻어 그의 어린 마음에 깊이 새겨졌었다. 그래, 그거다! 봉두 씨는 무릎을 탁 쳤다. 글자로 된 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야기로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여보자.
그는 곧장 마을 방송을 통해 공지를 띄웠다. “오늘 저녁 7시, 이장님이 들려주는 신나는 옛이야기 한마당! 아이들 도서관으로 모여라!”
순자 씨는 봉두 씨가 며칠 전부터 옛이야기 책을 들고 중얼거리는 것을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갑자기 웬 이야기꾼이 되신다냐? 애들이 재미없다고 하면 어쩔려고?” 봉두 씨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걱정 마, 순자 씨. 이 이장님, 그래도 아이들 마음 사로잡는 재주는 좀 있지 않겠어?”
저녁 7시, 아이들 도서관 앞은 예상보다 북적였다. 호기심 어린 눈빛의 아이들은 물론, 손주들을 데리고 온 몇몇 어르신들까지 자리를 메웠다. 봉두 씨는 미리 준비한 작은 무대에 섰다. 다소 긴장된 표정이었지만,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둘러봤다.
“얘들아, 우리 마을에 아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단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지. 오늘은 이 이장님이 그 이야기를 너희들에게 들려줄게!”
그가 선택한 이야기는 <금도끼 은도끼>였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게 책을 읽으려던 봉두 씨는 이내 책을 덮고 자신의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실감 나는 표정과 제스처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우직한 나무꾼이 잃어버린 도끼를 찾다 산신령을 만나는 대목에서는 목소리를 굵게 깔았고, 탐욕스러운 옆집 나무꾼이 벌을 받는 장면에서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들은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었다. 잃어버린 도끼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는 나무꾼의 모습에 함께 안타까워했고, 산신령의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나무꾼에게는 박수를 보냈다.
특히 압권은 “이 도끼가 네 도끼냐?” 하고 묻는 산신령의 목소리를 흉내 낼 때였다. 봉두 씨는 미리 준비해둔 낡은 물통을 탁! 하고 치며 쩌렁쩌렁 울리는 효과음까지 더했다. 아이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이야기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조용했던 도서관은 어느새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탄성으로 가득 찼다.
이야기가 끝나자, 아이들은 너도나도 “이장님, 다음 이야기는요?” “또 해주세요!” 하며 아우성쳤다. 봉두 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음 주를 기약했다. “그래, 우리 다음 주에도 이 이장님이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준비해 올게! 대신 약속 하나만 하자. 오늘부터 매일 책 한 권씩은 꼭 읽고 오기다!” 아이들은 우렁차게 “네!” 하고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봉두 씨의 발걸음은 저녁노을처럼 따스하고 충만했다. 오늘 저녁,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과 해맑은 웃음소리는 그 어떤 마을 사업의 성공보다도 값진 보상이었다. 낡은 도서관의 책들이 다시 아이들의 손때로 반질반질해질 날이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작은 시도였지만, 세대를 잇는 소중한 연결고리를 찾아낸 것 같은 뿌듯함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이장님, 오늘도 아이들을 웃게 만들었구려.” 순자 씨가 내미는 따뜻한 국화차를 받아 들며 봉두 씨는 빙긋 웃었다. “웃게만 했겠어? 아마 우리 마을의 미래를 활짝 열어줬을 걸?” 그의 말에는 장난스러움 반, 진심 반이 섞여 있었다. 어쩌면 이 소박한 행복이 바로 그가 매일 아침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꿈꾸는, 유쾌한 마을 이장님의 진정한 하루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