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문(靑雲門)의 백련(白蓮)은 눈을 감고 있었다. 천기산(天氣山) 봉우리에 걸린 초승달이 희미한 은빛을 흩뿌리는 고요한 밤이었다. 귓가에는 밤바람이 소나무 가지를 스치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만이 감돌았다. 그는 정좌한 채 숨을 고르며 내단(內丹)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나는 영기(靈氣)를 온몸으로 순환시켰다. 수련은 고되고 지루했으나, 매 순간 더 높은 경지를 향해 나아간다는 자각은 그에게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을 안겨주었다.
“백련아.”
익숙한 음성이 적막을 갈랐다. 눈을 뜨자, 온화한 미소를 머금은 사부, 진현(眞玄) 선인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흰 수염은 달빛 아래 더욱 신비롭게 빛났다.
“사부님.” 백련은 공손히 일어섰다.
“영혼의 숲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지되었다. 필시 마(魔)의 잔재가 다시금 고개를 들려는 징조일 터. 네가 직접 가서 그 근원을 파악하고, 필요하다면 정화하고 오너라.”
진현 선인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영혼의 숲은 선계(仙界)와 마계(魔界)의 경계에 위치한 곳으로, 예로부터 선인과 마인(魔人) 모두에게 기피되면서도 매혹적인 장소였다. 그곳의 기운은 선과 마가 뒤섞여 혼돈스러웠고, 그 혼돈 속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곤 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백련은 허리에 찬 명검(名劍) ‘청명(淸明)’을 고쳐 잡았다. 청운문을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의 잔재를 정화하는 것은 선문 수사의 당연한 임무. 그는 사명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의 푸른 도포 자락이 밤바람에 펄럭이며, 곧 다가올 시련을 암시하는 듯했다.
영혼의 숲에 들어서자마자, 백련은 온몸을 휘감는 이질적인 기운에 몸을 떨었다. 청운문의 맑고 순수한 영기와는 확연히 다른, 끈적하고 어두운 기운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나무들은 뒤틀린 형상으로 하늘을 향해 팔을 뻗었고, 땅에 깔린 이끼는 마치 검은 피처럼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달빛마저 숲의 짙은 기운에 먹혀들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는 듯했다.
“쳇, 생각보다 깊숙이 스며들었군.”
백련은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경계했다. 마기가 짙어질수록 그의 청명검은 푸른빛을 더욱 선명하게 발했다. 숲의 정령들이 숨을 죽이고, 작은 짐승들은 그림자 속에 몸을 감췄다.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숲의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신음 소리를 들었다.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그가 아는 선계의 존재가 낼 수 있는 소리는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숲 한가운데 솟아 있는 거대한 고목 아래, 칠흑 같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등에는 마치 찢겨 나간 듯 끔찍한 상처가 나 있었고, 검붉은 피가 나무뿌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름 모를 마수(魔獸)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거대한 뿔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마수들이었으나, 모두 목이 꺾이거나 몸통이 찢겨 나간 채 죽어 있었다. 그녀가 저들을 모두 해치운 것인가?
백련은 순간 숨을 멈췄다. 여인의 얼굴은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뿜어내고 있었다. 특히, 감겨 있는 눈꺼풀 아래로 언뜻 보이는 붉은 눈동자의 흔적은, 그녀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말해주었다.
‘마인(魔人)인가?’
백련의 검이 저절로 뽑힐 뻔했다. 그는 선문에서 마인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들은 사악하고, 잔인하며, 오직 파괴만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인간의 영혼을 탐하고, 선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여인은, 지독한 고통 속에서 겨우 숨을 쉬고 있는, 연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기(魔氣)는 선연했지만, 그 마기 속에는 묘하게도 어딘가 슬픔과 절망 같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비극을 혼자 짊어진 듯한 고독한 기운이었다.
“크윽….”
여인이 낮게 신음하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녀의 가녀린 손이 찢어진 어깨를 부여잡았다. 그 순간, 백련의 이성은 한 줌의 연기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그는 마인에 대한 경계를 잊고, 그저 고통받는 존재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의 본능, 혹은 선인으로서의 근본적인 자비심이 명령하고 있었다.
“괜찮으시오?”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음성에 여인의 몸이 움찔 떨렸다. 천천히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자, 깊이를 알 수 없는 붉은 눈동자가 백련을 향했다. 그 눈동자에는 경계심과 의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마치 수천 년의 고통을 모두 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달빛조차 두려워하는 듯한, 영원한 밤의 색을 닮은 눈이었다.
“선인의 기운….” 여인의 목소리는 찢어질 듯 갈라져 있었으나, 그 속에는 묘한 매력이 스며 있었다. “나를 죽이러 온 것이냐?”
백련은 순간 당황했다. 그는 검을 뽑지 않았고, 공격할 의도도 없었다. 그저… 돕고 싶었을 뿐이다. “아니오. 상처가 깊어 보이시오. 내가 가진 영약으로 치유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영약이라… 선인의 영약이 마인에게 통할 리 없다. 오히려 고통만 더할 뿐.” 그녀는 비웃듯이 옅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고통에 일그러졌다. “쓸데없는 수고 하지 말고, 길을 가라. 아니면, 이대로 나를 베어 죽이든가.” 그녀의 말 속에는 살기(殺氣)는커녕, 깊은 체념만이 가득했다.
“어찌 그런 말씀을….” 백련은 그녀의 처연함에 마음이 아팠다. 그의 사부, 아니 모든 청운문의 가르침에 따르면 마인은 무조건적으로 멸해야 할 존재였다. 하지만 눈앞의 이 여인은 그 모든 가르침과 괴리되어 있었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악’은, 그가 생각했던 마인의 ‘악’과는 달랐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처절한 투쟁,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백련은 잠시 망설였다. 그의 등 뒤로, 청운문에서 배운 수많은 경고와 가르침들이 메아리치는 듯했다. ‘마인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 ‘마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영혼을 잠식한다’, ‘마에게 자비는 곧 파멸을 불러온다’.
하지만 그는 결국 주저앉았다. 주저하는 대신, 그의 손은 이미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치료해 드릴 수는 없어도, 고통을 덜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제가 지닌 영기로….”
여인의 붉은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커졌다. 마인의 육체는 선인의 영기를 직접 받아들이면 오히려 고통을 느끼거나, 심하면 소멸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선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젊은 선인은,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고 그녀에게 영기를 전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순수함은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너는… 청운문의 수사인가?”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백련이라 합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붉은 눈으로 백련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은 마치 백련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했다. 긴 침묵 끝에,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거라.”
백련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상처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끔찍했다. 거대한 발톱에 찢긴 듯한 상처에는 검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가 지닌 마기인가, 아니면 상처에 깃든 오염된 기운인가.
그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펼쳐 그녀의 등, 상처 위에 살짝 댔다. 그리고는 내단에서 끌어올린 순수한 영기를 조심스럽게 방출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을 띠는 영기가 여인의 상처 속으로 스며들자,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크윽…!” 짧은 비명과 함께 그녀의 몸에서 짙은 검은 연기가 솟아올랐다. 고통스러운 표정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더욱 비틀리게 만들었다. 백련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의 몸에 있는 마기와 자신의 영기가 충돌하며 일어나는 반응일 터. 그는 평소보다 더욱 섬세하게 영기의 흐름을 조절하며, 오로지 치유와 진정의 기운만을 흘려보냈다. 선인으로서의 그의 기량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시간이 흐르자, 격렬했던 반응은 점차 잦아들었다. 검은 연기는 옅어지고, 여인의 몸을 뒤틀던 경련도 서서히 멈췄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는 멎었고, 끔찍하게 벌어져 있던 상처는 희미하지만 점차 아물기 시작했다. 백련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마인의 몸에 직접 영기를 주입하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기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어찌…?” 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붉은 눈에는 놀라움과 함께, 전에는 보지 못했던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마기의 흐름을… 제어하다니….”
백련은 그녀의 등에서 손을 떼고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당신이 가진 마기를 억누르면서, 치유의 기운만 흘려보냈습니다.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급한 불은 껐을 겁니다.”
여인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백련을 마주 보았다. 칠흑 같은 머리칼이 흐트러져 있었지만, 그녀의 붉은 눈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름이… 백련이라 했던가?”
“예.”
“나는… 흑월(黑月)이다.”
흑월. 검은 달. 이름마저도 그녀의 신비하고 어두운 분위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백련은 문득 그녀의 이름에서 묘한 이끌림을 느꼈다. 그들의 이름은 마치 낮과 밤, 빛과 그림자처럼 극명하게 대비되면서도,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맙다, 백련.” 흑월은 나직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갈라져 있지 않았다. “허나… 너는 위험한 짓을 했다. 선인이 마인에게 은혜를 베풀다니. 네 선문에서 알게 되면….”
백련은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당장이라도 저를 벌하려 들겠지요.”
“그런데도… 왜?” 흑월의 눈이 흔들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백련은 텅 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어찌 고통받는 생명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선인이란,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흑월은 백련의 말을 들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듯했지만, 그 속에는 어딘가 슬픔이 서려 있었다. “어리석은 선인이로구나. 그래서는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힘들 터.”
“어리석더라도, 그것이 저의 도리입니다.” 백련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흑월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등불처럼 강렬했다. “이 숲은 곧 마수들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여기서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된다.”
“그럼 당신은… 어디로 가려 하시오?”
흑월은 고개를 저었다. “알 바 아니다. 허나, 한 가지는 명심해라. 다음에 우리가 마주할 때는… 네가 나에게 칼을 겨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고와 함께, 슬픈 예감이 깃들어 있었다.
“그때도… 외면하지 않을 겁니다.” 백련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의 심장이 흑월의 말에 격렬하게 반응했다.
흑월의 눈이 다시금 커졌다. 그녀는 잠시 백련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움직임은 한결 유연해져 있었다. 숲의 어둠이 그녀를 삼키려는 듯 휘감기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리석음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그녀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미련 없이 숲의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흑월의 흔적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백련은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지만, 그의 심장은 멈출 줄 모르고 거세게 요동쳤다.
마인과 선인. 결코 섞일 수 없는 두 존재.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는 검은 달의 그림자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사부의 말을 떠올렸다. ‘마의 잔재를 정화하고 오너라.’
정화해야 할 대상에게, 그는 치유의 손길을 내밀었다.
과연 이것이 옳은 길이었을까?
백련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의 가슴속에는 흑월의 붉은 눈동자와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만이 맴돌 뿐이었다.
이 금지된 만남이, 과연 어떤 파국을 불러올지, 백련은 아직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운명은 흑월의 검은 그림자와 얽히기 시작했다.
그는 다시금 청명검을 고쳐 잡았다. 검날이 차가운 달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가볍지 않았다.
영혼의 숲 깊은 곳에서, 미지의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