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련은 잿빛으로 물든 대지를 가로지르며 낮게 엎드린 채 움직였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탁했고, 희미한 태양은 생기 없는 빛만을 흩뿌렸다. 이곳, ‘멸망의 땅’이라 불리는 대륙의 서쪽 끝자락은 그 이름에 걸맞게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과거 신선들이 영기를 들이켜 하늘을 걷고, 영수들이 거대한 몸으로 산맥을 넘나들던 시절은 아득한 전설 속 이야기가 된 지 오래였다. 이제 남은 것은 메마른 땅과 그 속에서 발버둥 치는 생명들뿐.
련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오랜 시간 사막과 황야를 떠돌며 단련된 눈은 흙먼지 속에서도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등에는 닳아빠진 가죽 배낭이 매달려 있었고, 허리춤에는 낡았지만 잘 관리된 검이 자리했다. 그의 손바닥은 굳은살로 거칠었고, 얼굴에는 햇볕과 바람이 새긴 고난의 흔적이 역력했다.
“젠장, 이렇게 영기가 메마른 곳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그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삼 일째, 변변찮은 영초 하나 찾지 못했다. 비축해 둔 단약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벌써 쓰러졌을 테지만, 련은 조그마한 선맥(仙脈)이라도 간직한 채 태어난 자였다. 비록 고갈된 영기 속에서 수련은 더디기 짝이 없었지만, 그나마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오래 버틸 수 있는 이유였다.
그는 무너진 바위 절벽 아래에서 잠시 몸을 숨겼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영기의 흔적을 더듬어 찾아온 곳이었지만, 결과는 늘 그렇듯 실망스러웠다. 메마른 이 땅에선 한 점의 영기도 사치였다.
문득, 코끝을 스치는 미약한 향취에 련의 눈이 번뜩였다. 흙냄새, 바위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한… 피비린내. 단순한 짐승의 피는 아니었다. 영기가 깃든 존재의 피.
련은 즉시 자세를 낮추고 바람의 방향을 확인했다. 불어오는 바람은 후각을 교란하기에 충분했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검집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바위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자, 작은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 안은 예상보다 넓었고, 눅눅한 기운이 감돌았다.
“크르르르…”
낮은 рым 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련은 숨을 멈췄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메마른 동굴 한가운데 널브러진 거대한 영수의 시체였다. 영수의 형상은 이리의 그것과 닮았으나, 몸을 덮은 비늘은 흙빛이었고 네 발에는 날카로운 발톱 대신 뭉툭한 뿌리 같은 것이 돋아 있었다. ‘흙이리’라 불리는 하급 영수였다.
하지만 련의 시선은 흙이리에게 머물지 않았다. 흙이리의 피가 흥건하게 고인 바닥 한편에, 고작 손바닥만 한 크기의 꽃 한 송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연한 풀색 줄기 끝에 오색빛을 띠는 꽃잎은 주변의 어둠을 홀로 밝히는 듯했다.
‘오색화(五色花)? 이런 곳에?’
오색화는 영기가 풍부한 땅에서만 겨우 피어나는 희귀 영초였다. 게다가 저 꽃잎의 영롱함은, 최소 수십 년은 묵었음을 뜻했다. 흙이리는 아마도 이 오색화의 기운에 이끌렸다가, 오색화가 뿜어내는 기묘한 독성 영기에 중독되어 죽은 모양이었다. 독성 영기는 영기를 강탈하는 성질이 있어, 허약한 영수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련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오색화. 이대로 채취하여 단약으로 만든다면, 고갈되어가는 영기를 일시적으로나마 보충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수련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도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다. 사막의 오아시스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오색화에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 동굴 안쪽에서 또 다른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크르르르…!”
새로운 흙이리였다. 먼저 죽은 흙이리보다 훨씬 크고 위압적인 체구. 털 대신 돋아난 비늘은 더욱 단단해 보였고, 눈은 핏빛으로 번뜩였다. 이 녀석은 오색화의 독성 영기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 기운에 더욱 흥분한 것처럼 보였다.
련은 즉시 검을 뽑아들었다. 섬광처럼 차가운 검날이 어둠을 갈랐다.
“젠장, 하필 지금 나타나다니!”
영기 고갈이 심한 이 땅에서, 이 정도 크기의 영수와 맞서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의 영력으로는 몇 합도 버티기 힘들 터. 그러나 오색화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그에게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흙이리는 거대한 몸을 앞세워 련에게 돌진했다. 날카로운 뿌리 발톱이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련은 몸을 낮춰 옆으로 비켜서며 흙이리의 돌진을 피했다. 동시에 검을 휘둘러 옆구리를 노렸으나, 흙이리의 비늘은 예상보다 단단했다. 검날이 튕겨나가며 귀를 찢는 마찰음을 냈다.
“크아악!”
흙이리가 방향을 바꿔 다시 공격해왔다. 련은 재빨리 검을 거두고 후퇴했다. 영기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몸놀림을 가볍게 했다. 그의 수련은 공격보다는 회피와 유연성에 특화되어 있었다. ‘잔영술(殘影術)’이라 불리는 그의 수련법은, 영기가 희박한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었다. 최소한의 영기로 최대의 효율을 내는 것.
그는 흙이리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하며 동굴 벽으로 몸을 숨겼다. 흙이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포효했다.
‘정면 승부는 안 돼. 약점을 찾아야 해.’
련은 흙이리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흙이리는 죽은 동료의 시체 옆을 맴돌며 오색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탐욕스러운 광기가 서려 있었다.
련의 시선은 죽은 흙이리의 시체로 향했다. 시체 주위에는 이미 독성 영기가 퍼져 있었다. 이 녀석은 그 독성에 취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혹시…?
련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그는 재빨리 동굴 안쪽에 굴러다니던 뾰족한 돌멩이 하나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돌멩이에 아주 미약한 영력을 불어넣었다. 영력으로 코팅된 돌멩이는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했다.
흙이리가 다시 련에게 돌진하는 순간, 련은 몸을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흙이리의 머리 위로 뛰어넘으며 죽은 흙이리의 시체에서 솟아나는 독성 영기를 향해 돌멩이를 던졌다.
“크르르르…?”
흙이리는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돌멩이는 예상치 못한 곳에 떨어졌다. 그 순간, 련은 흙이리의 등에 착지했다. 그리고 모든 영기를 검에 집중하여, 가장 약해 보이는 목덜미 비늘 틈새를 향해 내리찍었다.
“흐읍!”
‘잔영술, 천명(天命) 일격!’
날카로운 검날이 비늘 틈새를 꿰뚫었다. 흙이리의 몸이 경련했다. 비명소리와 함께 거대한 몸이 땅바닥으로 쓰러졌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련은 숨을 헐떡이며 흙이리의 몸에서 내려왔다.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주변의 마른 흙을 적시며 검붉은 색으로 물들였다. 흙이리는 잠시 몸부림치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그제야 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그는 쓰러진 흙이리를 잠시 노려본 후, 곧장 오색화로 향했다. 오색화는 여전히 영롱한 빛을 띠며 고고하게 피어 있었다. 주변의 독성 영기 덕분에 다른 영수들의 접근을 막아주었으니, 어찌 보면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련은 조심스럽게 오색화를 뿌리째 뽑았다. 연한 줄기가 손끝에 닿자, 미약하지만 강렬한 영기가 손바닥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갈된 영력을 채워주는 듯한 시원한 감각.
“이 정도면…”
그는 오색화를 품에 소중히 안았다. 이것으로 당분간은 버틸 수 있을 터였다. 어쩌면 이 오색화가, 이 메마른 땅에서 한 줄기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그의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련의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슥… 슥…’
땅을 긁는 듯한 소리. 흙이리의 발자국 소리와는 또 다른, 무언가 질척이는 듯한 소리였다. 련은 다시 검을 움켜쥐었다. 동굴 안쪽 깊숙한 곳. 아까 죽은 흙이리가 나온 곳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단순한 짐승의 소리가 아니었다.
동굴 안쪽의 어둠이 미미하게 일렁였다. 련의 심장이 다시금 날뛰기 시작했다. 오색화가 가져다준 행운 뒤에, 예상치 못한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젠장, 또 뭐란 말인가…”
그의 눈은 어둠 속을 꿰뚫어 보려 했으나, 짙은 암흑은 모든 것을 삼키고 있었다. 오직 소리만이 점차 가까워져 올 뿐이었다. 마치, 죽음이 그를 향해 기어오는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