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7: 심연의 숨결)
카인의 손에 들린 수정등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뿌렸다. 그 빛은 거대한 지하 통로의 끝을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적어도 낡고 습한 공기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어둠이 주는 압도적인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역할을 했다. 발밑에서는 축축한 흙과 알 수 없는 파편들이 밟혔고, 그 위로 수만 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고대 문자의 잔해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게… 정말 끝이 맞을까?”
나지막이 중얼거린 건 카인이었다. 그의 옆을 걷던 리나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등에는 두툼한 탐사 장비 배낭이 메어져 있었고, 손에는 오래된 양피지 지도가 쥐여 있었다. 지도는 이미 수많은 손때가 묻어 너덜너덜했지만, 붉은색으로 표시된 ‘미지의 영역’은 여전히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끝이 아니라는 게 문제지. 카인. 지도에 따르면 여기부터는 아예 미답 영역이야. 그 어떤 탐사자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곳. ‘심연의 전당’의 진짜 입구 말이지.”
리나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흥분과 함께 경계심이 스며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발견한 ‘잊혀진 고대 지하 유적’은 이미 수십 개의 던전과 고대 도시를 통틀어 가장 거대한 규모였다. 하지만 지도에 표시된 최심부, ‘심연의 전당’은 그야말로 전설 속의 영역이었다.
카인은 수정등을 더 높이 들었다. 희미한 빛이 멀리 떨어진 벽면에 닿자,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바위 문이 아니었다. 검고 매끄러운 금속으로 만들어진 문은 마치 밤하늘을 압축해놓은 듯한 색깔을 띠고 있었다. 표면에는 정교하면서도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흡사 살아있는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문은… 본 적 없어.’
카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의 손이 무의식중에 허리춤에 찬 쌍검의 손잡이를 찾았다.
리나는 문에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차가운 금속 표면에 닿는 순간,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거… 어떤 에너지로 움직이는 것 같아. 그리고 이 문양들… 이건 단순한 장식이 아니야. 전부 의미를 가지고 있어. 흡사 거대한 퍼즐 같기도 하고…”
그녀의 눈이 고대 문양을 훑으며 빠르게 움직였다. 리나는 고대 언어와 유적학에 조예가 깊은 학자형 모험가였다. 그녀의 지식은 카인이 무수히 많은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퍼즐이라… 좋아, 그럼 자네의 지식이 이 미친 문을 열어줄 수 있는지 보자고.”
카인이 말했다. 그 순간, 리나의 손끝에 닿아있던 문양 중 하나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었다. 그 빛은 다른 문양으로 빠르게 번져나갔다. 마치 전류가 흐르는 회로처럼, 검은 금속 문 전체에 푸른빛의 선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우우우우웅-**
낮게 깔리는 진동음이 지하 전체를 흔들었다. 천장에서 먼지와 작은 돌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카인이 검을 뽑아들었다.
“진정해, 카인! 뭔가… 반응하고 있어! 내가 만진 문양이 시동 스위치였나 봐!” 리나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푸른빛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문 중앙에서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금속 패널이 튀어나왔다. 패널은 허공에 떠오르더니, 그 표면에 홀로그램 같은 이미지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고대 문자와 기하학적인 도형, 그리고 낯선 행성들의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건… 고대 문명의 제어판이야!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문명하고도 달라!” 리나가 패널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화면 위를 스치자, 이미지들이 빠르게 바뀌었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멈췄다.
그곳에는 거대한 눈을 가진 듯한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눈동자는 심연처럼 깊었고, 그 주변에는 수많은 별들이 회전하고 있었다. 마치 우주 자체를 담고 있는 듯한 형상이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카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직관적으로 저 형상에서 뭔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리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니… 이건… 아니야. 내가 이전에 탐사했던 유적에서, 이 눈을 ‘재앙의 눈’이라고 불렀던 기록이 있었어. 그 기록은 불완전했지만, 이 눈이 재앙을 불러온다고 경고하고 있었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홀로그램 속 ‘재앙의 눈’이 붉은빛으로 섬뜩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패널에서부터 거대한 문 전체로 붉은 균열이 퍼져나갔다. 그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핏줄처럼 문을 뒤덮었고, 검은 금속 문은 이내 붉고 거대한 눈동자처럼 변해버렸다.
**쉬이이이이익-!**
고압의 공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문 중앙의 붉은 눈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는 어둠조차 집어삼킬 듯한 심연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물러서, 리나!” 카인이 외치며 리나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문틈으로 뿜어져 나온 거대한 에너지 파동이 그들이 서 있던 바닥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바닥이 폭발하고, 거대한 돌무더기가 솟구쳤다.
간신히 폭발의 여파를 피한 카인과 리나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골랐다. 그들의 눈앞에는 완전히 열린 문과, 그 너머로 펼쳐진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그곳은 전당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심연 그 자체였다. 빛은 단 한 조각도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문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만이 그 공간의 윤곽을 희미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정중앙에, 거대한 구조물이 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별들을 엮어 만든 듯한 검은 수정체였다. 수정체의 표면에서는 무수한 빛의 조각들이 뿜어져 나오며 공간을 일렁이게 했다. 그런데 수정체의 가장자리에 무언가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은 길고 검은 촉수였고, 촉수의 끝에는 날카로운 갈고리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끼이이이이이익-!**
사방이 울릴 듯한 섬뜩한 마찰음이 심연 속에서 들려왔다. 검은 수정체에서 뿜어져 나온 촉수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촉수들은, 마치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뱀처럼, 카인과 리나가 있는 입구를 향해 빠르게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젠장! 이 문이, 저걸 깨운 건가?!” 카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쌍검이 붉은 불꽃으로 타올랐다.
“카인, 조심해! 저 촉수, 단순한 공격이 아니야! 뭔가… 흡수하려는 것 같아!” 리나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렸다.
촉수 하나가 번개처럼 빠르게 뻗어와 카인이 서 있던 벽을 후려쳤다. **콰자자작!** 견고했던 고대 석벽이 두부처럼 으스러졌다. 그 충격에 카인은 몸을 날려 피했지만, 촉수가 남긴 자국에서는 희미한 붉은 에너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벽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었다.
“빌어먹을! 이건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니야!” 카인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들의 모험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했지만, 이렇게 전대미문의 위기에 직면한 적은 없었다.
“카인, 저 수정체에 새겨진 문양을 봐! 방금 홀로그램에서 본 ‘재앙의 눈’과 똑같아! 이 모든 것이… 저것과 연결되어 있어!” 리나가 외쳤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한 수정체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사방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심연의 문어가 깨어나 움직이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탈출로를 막아버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리나, 뒤로 물러서! 내가 시간을 벌게!”
카인은 재빨리 검을 고쳐 잡고, 달려드는 촉수들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검기가 어둠을 갈랐다.
**쉬이이이익! 콰앙!**
하나의 촉수가 격렬한 소리와 함께 잘려나갔지만, 그 단면에서는 끈적한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오며 순식간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재생한다?!” 카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수정체는 점점 더 격렬하게 진동하며, 그 몸체에서 붉은빛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동시에, 전당의 모든 촉수가 일제히 카인과 리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굶주린 생명체가 먹이를 향해 촉수를 뻗는 것처럼.
“카인! 안 돼! 도망쳐야 해!” 리나의 절규가 좁은 통로를 울렸다.
그러나 이미 늦은 듯했다. 수십 개의 촉수가 사방에서 그들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거대한 수정체는 전당 중앙에서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쿵쾅거렸다.
두 사람은 과연 이 심연의 전당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이 수정체는 무엇이며, 어떤 비밀을 품고 있는 것일까?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