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이 밤의 문은 누구에게 닫혔는가

    강하랑은 진지했다. 눈앞의 스크린에 비치는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턱을 괸 채 검지로 입술을 느리게 쓸었다. 왼쪽 눈동자는 화면 중앙의 녹색 점을 쫓았고, 오른쪽 눈동자는 그 점이 그리는 궤적의 예상 경로를 읽는 듯 허공을 방황했다. 그의 주변은 온통 쓰레기였다. 방금 전까지 그가 열과 성을 다해 분석하고 추론했던 간식 봉투들, 엉뚱한 모양으로 구겨진 종이컵, 그리고 아무렇게나 던져진 책 더미들. 완벽한 지저분함 속에 완벽한 질서가 숨어있는 그의 세계.

    “젠장.”

    나직이 읊조린 그에게서 짜증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화면 속 초록 점은 그의 예측을 완벽하게 빗나가, 그가 설정한 수치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며 게임 오버 사인을 띄웠다.

    “이게 말이 돼? 이 완벽한 수의 세계에서 찰나의 오류가 발생했다고? 시스템의 결함인가, 아니면…”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탁자 위 휴대폰이 맹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이름 두 글자, ‘이슬비’가 선명했다. 하랑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지금 중요한 연구 중인데.”

    “하랑 씨! 중요한 연구는 무슨! 또 게임하고 있었죠?” 수화기 너머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날카로운데 은근히 듣기 좋은, 이슬비 형사 특유의 목소리였다.

    “게임이 아니야, 이슬비 형사님. 이건 무작위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심오한 실험이라고. 자네 같은 직관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닥쳐요! 지금 장난할 시간 없어요. 빨리, 당장, 지금 즉시, 검은 연못가에 있는 박 회장님 별장으로 와요. 긴급 상황이에요!”

    검은 연못가 별장. 박성철 회장. 그 이름에 하랑의 느슨했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대한민국 경제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 중의 거물. 그런 사람의 별장에 긴급 상황이라니.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일 터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또 회장님 금고 번호를 까먹으셨대?”

    “사람이 죽었어요! 밀실 살인이라고요, 밀실!”

    ‘밀실 살인’이라는 단어에 하랑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빛났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장난감 가게의 새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미묘한 흥분감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오호라. 밀실이라. 그거 재미있겠는데.”

    “재미? 지금 제정신이에요? 지금 난리가 났는데!”

    “알았어, 알았어. 갈게. 대신, 오늘 저녁은 자네가 사야 해. 내 심오한 연구를 방해한 대가로.”

    하랑은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방은 언제나 그랬듯 난장판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놀랍도록 또렷했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그에게는 언제나 풀 수 있는 퍼즐이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퍼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검은 연못가 박 회장 별장은 과연 소문대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높은 담벼락을 따라 삼엄하게 경비가 서 있었고, 별장 앞마당은 이미 경찰차와 과학수사팀 차량으로 빼곡했다. 붉은색과 푸른색 경광등이 밤하늘을 가르며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랑은 자신의 낡은 세단을 주차장에 던져놓듯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이슬비 형사가 그에게로 달려왔다. 항상 단정하게 묶어 올리던 머리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랑 씨! 이제 와요? 전화는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늦다니? 내가 차 키를 찾느라 그랬지. 그리고 형사님은 왜 이렇게 초췌해졌어? 범인한테 쫓기기라도 했나?” 하랑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이거 진짜! 지금 장난할 때 아니거든요?” 슬비는 그의 손을 쳐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자, 어서 와요. 현장으로 안내할게요.”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눅진하고 끈적한 공기가 하랑을 감쌌다. 겉만 번지르르한 빈 껍데기 같은 집이었다. 거실을 지나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낮은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요. 박 회장님 서재.” 슬비가 무거운 참나무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 앞에는 이미 여러 명의 형사들과 감식반 요원들이 초조하게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한결같이 당혹감과 좌절감이 묻어 있었다.

    “다들 지금 뭐 하는 거죠? 그냥 구경하는 건가?” 하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아니,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슬비가 한숨을 쉬었다. “서재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창문은 이중 잠금장치에 방탄 유리였고요. 내부에는 부러진 흔적이나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어요. 완벽한 밀실이죠.”

    “완벽한 밀실이라…” 하랑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이자, 동시에 오만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하랑은 문으로 다가섰다. 그는 잠시 문손잡이를 만져보고, 문틈을 유심히 살폈다.

    “강력계 이반장님이 지금 현장 통제 중이세요. 섣불리 만지면… 안 돼요!” 슬비가 급히 그를 말리려 했지만, 하랑은 이미 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봐, 강하랑! 자네는 대체 뭔데 함부로 현장에 들어서나?!” 안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력계 이반장이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함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경찰의 비효율적인 수사 방식이 나를 부르는군요.” 하랑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이미 방 안을 훑고 있었다.

    서재 안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중앙에는 거대한 참나무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벽면 가득 책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값비싼 예술품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한 남자의 싸늘한 시신 앞에서 의미를 잃었다.

    박성철 회장이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은 채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등에는 선명한 칼자국이 나 있었고, 책상 위에는 붉은 액체가 흥건하게 번져 있었다. 그의 눈은 형형하게 뜨여 있었고, 그 속에 담긴 것은 공포와 놀라움이었다.

    하랑은 시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시신 앞에서 보인 유일한 감정은 마치 정교한 기계장치를 해부하는 엔지니어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의 시선은 시신을 넘어, 책상 위, 그리고 바닥으로 향했다.

    “이 슬비 형사님.” 그가 나직이 불렀다.

    “네, 네?!”

    “여기 바닥에 깔린 이 고급스러운 양탄자 말이야. 혹시 제작 연도가 언제쯤인지 알아?”

    슬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그걸 왜 물어요? 시신이나 먼저 살펴보는 게 우선 아닌가요?!”

    “이게 다 연관이 있다니까. 형사님 눈에는 그저 낡은 양탄자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이 방의 모든 역사가 새겨진 중요한 단서로 보인다고.”

    이반장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강하랑, 제발 좀 진지하게 임해라. 피해자는 등 뒤에서 칼에 찔렸어. 정황상 피해자는 살해당할 때까지 범인이 누군지 몰랐을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이 완벽한 밀실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무도 모르고!”

    하랑은 피식 웃었다. 그가 웃는 순간, 슬비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또 다른 기괴한 추론을 내놓을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글쎄요. 정말 아무도 몰랐을까요?” 하랑은 박 회장의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크게 뜨여 있었고, 그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이 회장님 눈빛 말이야. 저건 마치… 아주 가까운 사람을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인데.”

    하랑은 다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굳게 닫힌 창문으로 다가섰다. 그는 창문 유리에 손가락을 대고 톡톡 두드려 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 슬비 형사님.”

    “네? 또 뭔데요?”

    “여기, 이 창문 말이야. 이 창문은… 닫힌 적이 없는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하랑은 고개를 돌려 이슬비 형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슬비는 그 눈빛 속에서 그가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기이한 확신을 느꼈다. 이 밤의 문은 과연 누구에게 닫히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 열린 문으로 들어선 그림자의 정체는? 이슬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 균열의 시작**

    이진우는 눈을 감은 채 익숙한 침대 매트리스의 푹신함을 느끼고 있었다. 길고 지루했던 하루의 끝. 쨍한 형광등 아래에서 숫자와 씨름하다 겨우 탈출한 참이었다. 옆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나지막이 재즈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유로운 주말 밤. 도시의 소음은 20층 높이까지는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 창밖은 검푸른 어둠 속에 점점이 박힌 불빛들로 가득했다. 그의 아늑한 보금자리는 고층 아파트의 한 조각이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적어도, 그 밤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으음…….”

    나른한 한숨과 함께 뒤척였다. 딱히 잠이 오진 않았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였다.

    딸깍.

    아주 작고 미세한 소리. 너무 작아서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이진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신경은 이미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딸깍.

    이번엔 좀 더 선명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리모컨이 저절로 굴러 떨어진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은 건전지 덮개가 살짝 열려 있었다.

    “뭐야, 헛것을 봤나?”

    그는 피식 웃으며 리모컨을 주워 제자리에 놓았다. 낡은 물건이라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 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벽 두 시쯤이었을까. 잠이 들락말락 하던 찰나, 주방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 이진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침입자? 강도?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어둠 속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작은 스탠드 조명을 켰다. 은은한 불빛이 집안을 밝혔다.

    주방은 멀쩡했다. 깨진 유리 조각도, 엎어진 물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완벽하게 놓여 있었다.

    “젠장, 꿈인가?”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히 들었는데. 그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겨우 잠을 청했다.

    며칠이 지났다. 이진우의 아파트는 점점 기묘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거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가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매번 똑바로 맞춰놓아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려 있는 날도 있었다. 처음엔 자기가 대충 닫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틀 연속 같은 일이 반복되자,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가장 신경을 거슬리게 한 건, 소리였다.

    삐걱. 삐그덕. 덜컥.

    마치 낡은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밤마다 벽 속에서, 혹은 천장 위에서 들려왔다. 단순한 건물 노후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규칙적이었다. 어떤 때는 마치 금속이 무언가에 갈리는 듯한 긁히는 소리가 들렸고, 또 어떤 때는 낮은 주파수의 웅웅거리는 진동이 온몸을 울렸다.

    “윗집 이사라도 왔나?”

    이진우는 윗집 현관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양옆집도 마찬가지. 그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민원을 넣었지만, 기계적인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누수나 배관 문제일 수 있습니다. 점검반을 보내보겠습니다.”

    하지만 점검반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배관은 멀쩡했고, 벽에도 균열은 없었다. 이진우는 점점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피곤함은 극에 달했지만, 밤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그날 밤, 모든 것이 폭발했다.

    이진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는 어김없이 벽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훨씬 강렬했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콰앙!

    갑작스러운 굉음.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오래된 금속 스탠드 조명이 쓰러지며 테이블에 부딪혔다. 거친 충격음과 함께 전구가 박살 났다. 어둠 속에서 이진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게 뭐야…! 누가… 누구야!”

    그는 소리쳤다. 아무도 없었다. 방 안은 그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공기마저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

    철컥!

    이번엔 현관문 잠금장치가 스스로 열리는 소리였다. 이진우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처 손쓸 틈도 없이, 현관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 열렸다. 칠흑 같은 복도의 어둠이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주방에서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앙! 쾅! 쾅! 콰아앙!

    마치 냉장고가 통째로 뽑혀 나가는 듯한 굉음이었다. 금속이 뒤틀리고 부서지는 소리, 거대한 기어가 맞물리는 듯한 삐걱거림, 그리고 무언가가 바닥을 긁으며 끌려가는 듯한 마찰음까지. 평범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육중하고 기계적인 소음이었다.

    이진우는 공포에 질려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주방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음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냉장고가 저절로 움직여 주방 한가운데로 끌려 나왔다. 그 육중한 몸체가 바닥을 긁으며 찢어발겼다. 냉장고 뒤쪽 벽면이, 마치 내부에 갇힌 무언가에 의해 뜯겨 나가는 것처럼, 거친 파열음을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금속 패널들이 찢겨지고, 콘크리트 가루가 흩날렸다.

    크윽! 끄으으윽!

    벽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제는 숨 쉬는 듯한, 혹은 거대한 짐승이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갈라진 벽 틈새로, 붉고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다. 일초, 이초, 삼초. 짧고 강렬한 빛이 반복적으로 벽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일반적인 전기 스파크와는 달랐다. 마치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열기처럼, 벽 틈새가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빛이 터져 나올 때마다, 집 안의 모든 전등이 번쩍이며 깜빡였다.

    이진우는 이제 더 이상 공포에만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호기심이 피어났다.

    이건 단순한 유령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지금 그의 벽 속에서 부활하고 있었다.

    “…나와.”

    이진우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부서지는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젠장, 대체 너는… 정체가 뭐야.”

    다시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의 아파트, 그의 삶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균열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미지의 존재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빌딩 숲의 심장부, 버려진 채 잊혀진 옥상 정원은 스산한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립된 세계였다. 한때 화려했을 꽃들은 시들어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이파리 없는 덩굴들만이 앙상하게 철제 구조물을 휘감고 있었다. 도윤은 숨을 헐떡이며 이아의 가는 어깨를 감쌌다. 등 뒤로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그 빛은 따스함 대신 차가운 감시의 눈동자처럼 느껴졌다.

    이아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섬뜩하게 빛났다.

    “도윤… 미안해.”
    이아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속삭였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도윤의 옷깃을 움켜쥔 손가락은 힘없이 파르르 떨렸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이곳은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했다. 그는 불과 몇 분 전, 그들을 턱밑까지 쫓아왔던 그림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아의 종족, 밤의 그림자에 속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차가웠고, 경고는 명확했다.

    “우리가… 우리가 저지른 일은 용서받지 못할 거야.”
    이아의 말은 비수처럼 도윤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이 그녀가 느끼는 공포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용서받지 못하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이아.”
    도윤은 억지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의 손이 이아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운 그녀의 피부가 그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흡수하길 바라면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길고 어두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내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는 규율이자 법이야. 그런데 내가, 감히 인간과… 이런 관계를 맺었으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아의 눈물은 마치 유리 구슬처럼 투명하고 빛났다.
    “이제 정말 끝인 것 같아, 도윤. 우리… 이 이상은 안 돼.”

    도윤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끝낼 수 없어. 널 포기할 수 없어.”
    그는 이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가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내 세상은 달라졌어. 어두웠던 모든 것이 선명해졌고, 의미 없던 모든 것이 특별해졌어. 널 포기하는 건,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

    이아는 그의 말에 잠시 잊었던 듯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희망의 그림자가 스쳤다. 하지만 그 희망은 곧 차가운 현실에 잠식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에게는 중징계가 내려질 거고, 너는… 너는 기억을 잃게 될지도 몰라. 그게 그들의 방식이야.”

    도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 이아에 대한 모든 추억이 사라지고, 마치 그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조여왔다.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거야.”

    “어떻게? 네가 어떻게 막을 수 있어? 그들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들이야. 너는…”
    이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녀는 도윤이 자신과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그를 상기시키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싸아아아…*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고요 속에, 아주 미세한, 그러나 이아의 예민한 감각에 포착된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발자국 소리…”
    이아가 몸을 굳혔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익숙해… 아주 익숙한 발자국 소리야.”

    도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파리 없는 덩굴들이 밤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웅성거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아는 틀린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감각은 인간과는 달랐다.
    “누구야?”
    도윤의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섞였다.

    “그들이… 다시 온 거야.”
    이아는 거의 울부짖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시자야. 그가 우리를 찾아냈어.”

    옥상으로 이어지는 비상계단 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낡은 금속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비명처럼 처절했다.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숨을 만한 곳은 더 이상 없었다. 옥상 위는 사방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호리호리한 체형, 밤색 옷을 입었지만 그 어떤 위장술보다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였다. 그의 얼굴은 밤하늘처럼 검은 망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깊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눈은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형형했다.

    그는 이아의 친오라버니, 동시에 그녀의 감시자이자 심판자 역할을 하는 자였다. 그의 이름은 ‘카엘’. 그는 밤의 그림자 종족에서 가장 냉정하고 잔혹한 규율 집행자로 통했다.

    카엘은 천천히, 마치 먹이를 조롱하듯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 하나 없이 옥상 바닥에 닿았다. 주변의 낡은 철제 구조물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희미하게 떨리는 듯했다.

    “이아.”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밤공기처럼 날카로웠다. 심장을 꿰뚫을 듯한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규칙을 어긴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이아는 도윤의 뒤로 숨으려 했지만, 이미 다리가 풀려 움직일 수 없었다. 도윤은 그녀를 자신의 등 뒤에 완전히 감춘 채, 카엘을 노려보았다.
    “물러서.”
    도윤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카엘의 시선이 도윤에게 닿았다. 인간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인간. 너는 감히 우리의 영역을 침범했다. 그녀의 영혼을 더럽혔고, 우리의 질서를 파괴하려 했다.”
    카엘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차가운 분노와 경멸만이 느껴졌다.
    “인간과의 유대는 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이아. 이 배신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카엘의 손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어둠이 피어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도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것은 단순한 주먹이나 발길질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마치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

    “이아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도윤이 소리쳤다. 그는 이아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더욱 단단히 세웠다.

    카엘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죄는 이미 네 존재 자체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너의 죄는…”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을 존재하게 만든 것.”

    어둠이 손끝에서 응축되어 칼날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질적인 칼날이 아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인식조차 하기 힘든, 존재 그 자체를 지워버릴 듯한 무형의 힘이었다.

    도윤은 이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는 결코 놓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그 끝이 자신의 소멸이라 할지라도.

    카엘의 손에서 피어난 어둠의 칼날이 섬광처럼 두 사람을 향해 뻗어 나갔다.
    옥상 정원을 감싼 밤공기가 울부짖는 듯했다.

    “도윤…!”
    이아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심연의 속삭임

    아르카나 마법 학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곳. 찬란한 마법의 빛이 밤하늘을 수놓고, 고대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이 캠퍼스를 감싸는 곳. 전 세계의 수재들이 모여 차원 마법과 정령술, 고대 언어학을 탐구하는, 그야말로 마법의 정수와도 같은 배움의 전당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진.
    그 찬란함 속에서 존재감을 잃은 채, 그저 졸업 학점이나 겨우 채우려 발버둥 치는 평범한 마법학도였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젠장, 또 이론 수업이야?”

    내 옆자리에서 한숨을 쉬는 이한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박혔다. 이한은 나와 정반대였다. 뛰어난 마법 재능과 귀족적인 외모, 그리고 한없이 여유로운 성격까지. 아르카나의 빛나는 별 중 하나. 그는 늘 내게 불평을 털어놓곤 했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이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얄미운 친구였다.

    “어차피 너는 다 외울 거잖아.” 내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외우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거지, 임마. 그래도 지루한 건 지루한 거야. 차라리 실습 수업이나 늘려줬으면 좋겠네.”

    이한은 펜을 턱에 대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드넓은 마나의 바다를 갈망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마나의 바다보다는, 그 바다 밑에 숨겨진 어둡고 축축한 비밀에 더 흥미가 있었다. 특히, 이 거대한 학원의 발밑에 잠들어 있다는 ‘그것’에 대해서는 더욱더.

    교수님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자, 모두 주목! 이번 학기 고대 마법학 심화 과정의 마지막 과제는 특별하다.”

    칠판에 뜬금없이 ‘미개척 지하 탐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학생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미개척? 보통은 고대 유물 보관소나 안전한 마법 실험실 구역만 탐사하잖아?” 이한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늘 그랬지.” 나 역시 의아했다.

    아르카나 학원 지하에는 수많은 마법 구역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고대 문명의 유적을 그대로 활용한 곳부터, 역대 현자들이 마법 실험을 위해 직접 구축한 공간까지. 하지만 이 모든 곳에는 철저한 등급과 안전 관리가 적용되었다. ‘미개척’이라는 단어는 학원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 없는 용어였다.

    교수님은 학생들의 동요를 즐기는 듯 미소를 지었다.

    “놀랄 필요 없다. 물론, 학원에서 지정한 안전 구역 내에서의 탐사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좀 더 깊이 내려갈 것이다. 심도 3구역까지.”

    심도 3구역. 그곳은 일반적인 학생들에게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학원 내에서도 극소수의 연구원이나 고위 교수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일종의 금지 구역 같은 곳이었다. 물론 ‘접근 금지’라는 딱지가 붙은 심도 4구역보다는 덜했지만.

    “심도 3구역이라면, 과거 ‘대재앙’ 이후 봉인된 마법 도서관의 잔해가 있는 곳 아니던가요?”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그곳에는 아직 해독되지 않은 고대 문헌과, 미발견된 유물들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너희는 팀을 이루어, 지정된 구역 내에서 탐사 및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나는 이한과 눈을 마주쳤다. 이한은 이미 신이 난 표정이었다.
    “크으, 역시 아르카나! 이런 미지의 탐사까지!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군!”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평소와 다른 이례적인 조치. 그리고 ‘대재앙’이라는 단어. 아르카나 학원이 지금의 명성을 얻기 전, 마법 세계를 뒤흔들었던 미증유의 참사.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는 학원 역사서에도 단 몇 줄만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

    며칠 후, 우리는 탐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 지하 입구에 모였다. 두터운 마법 강화 방호복, 빛을 뿜는 마나 랜턴, 그리고 비상용 마법 물약들. 평소 실습과는 차원이 다른 준비물들이었다.

    입구는 거대한 마법 문으로 막혀 있었다. 낡고 거대한 돌문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문지기는 거친 턱수염을 가진, 마치 지하 세계의 문지기 같은 인상의 마법사였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고 마법 문을 개방했다.

    “절대,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지 마라. 그리고 어떤 유물을 발견하든,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즉시 보고해라.”

    그의 경고는 섬뜩하리만치 진지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밀려 나왔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나 랜턴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발밑에는 축축한 이끼와 곰팡이가 가득했고, 벽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마나의 흐름으로 반짝였다.

    우리의 팀은 나, 이한, 그리고 마법 역사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수아, 이렇게 셋이었다. 수아는 꼼꼼하게 지도를 확인하며 앞장섰다.

    “지도에 따르면, 심도 3구역으로 가는 길은 이곳이 유일해. 과거의 마법사들이 사용했던 통로라서, 마나 트랩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

    우리는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벽에 새겨진 고대 마법 문양들이 랜턴 빛에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기묘한 문양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오싹하지 않냐?” 이한이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야. 뭔가… 기분 나쁜 마나가 흐르는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일반적인 학원의 지하 마법 구역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기운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억압되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그런 섬뜩한 느낌.

    한참을 걸었을까, 우리는 거대한 홀에 도착했다. 폐허가 된 도서관의 흔적이었다. 책장은 무너져 내렸고, 고대 문헌들은 먼지와 습기에 훼손된 채 바닥에 뒹굴었다. 한때 지식의 보물창고였을 이곳은, 이제는 비참한 잔해로 가득했다.

    “여기까지가 지정된 탐사 구역이야.” 수아가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각자 조를 나눠서 문헌이나 유물의 흔적을 찾아보자.”

    나는 본능적으로 가장 어둡고, 가장 외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빛이 닿지 않는 곳. 폐허가 된 서고의 가장 안쪽, 으스러진 책장 더미 뒤편이었다. 그곳에는 무언가 묘한 기운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상하다…’

    다른 곳과는 다른, 희미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마법 잔류물과는 다른, 살아있는 듯한 미약한 떨림이었다. 나는 낡은 책장 더미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다른 벽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벽이 있었다. 다른 벽은 옅은 회색빛의 석회암이었지만, 이 벽만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긁힌 듯한, 섬뜩한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아니, 새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생채기 같았다. 끔찍하게 긁히고 파인 흔적들.
    그리고 그 흔적들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균열이 가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균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차가웠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감촉.
    그리고 그 순간, 균열 안쪽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붉은빛.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듯한, 규칙적인 박동과 함께 빛을 발하는 붉은 섬광.
    그리고 그 빛과 함께, 아주 희미한 속삭임이 내 귓가를 스쳤다.

    ***열려라.***

    나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아니, 환청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균열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언가 ‘금지된’ 곳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학원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어야 할,
    끔찍하고 거대한 금기가 숨 쉬고 있었다.

    “진! 뭐 해! 빨리 이리 와봐!”

    멀리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돌벽에서 물러섰다.
    붉은 빛은 사라졌고, 속삭임도 멈췄다.
    다시금 그곳은 침묵과 어둠에 잠긴, 평범한 돌벽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금기의 문을,
    방금 전,
    아주 미세하게나마,
    건드리고 말았다.
    학원의 가장 깊은 심연이, 나를 향해 서서히 입을 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심연의 속삭임

    아르카나 마법 학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곳. 찬란한 마법의 빛이 밤하늘을 수놓고, 고대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이 캠퍼스를 감싸는 곳. 전 세계의 수재들이 모여 차원 마법과 정령술, 고대 언어학을 탐구하는, 그야말로 마법의 정수와도 같은 배움의 전당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진.
    그 찬란함 속에서 존재감을 잃은 채, 그저 졸업 학점이나 겨우 채우려 발버둥 치는 평범한 마법학도였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젠장, 또 이론 수업이야?”

    내 옆자리에서 한숨을 쉬는 이한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박혔다. 이한은 나와 정반대였다. 뛰어난 마법 재능과 귀족적인 외모, 그리고 한없이 여유로운 성격까지. 아르카나의 빛나는 별 중 하나. 그는 늘 내게 불평을 털어놓곤 했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이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얄미운 친구였다.

    “어차피 너는 다 외울 거잖아.” 내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외우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거지, 임마. 그래도 지루한 건 지루한 거야. 차라리 실습 수업이나 늘려줬으면 좋겠네.”

    이한은 펜을 턱에 대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드넓은 마나의 바다를 갈망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마나의 바다보다는, 그 바다 밑에 숨겨진 어둡고 축축한 비밀에 더 흥미가 있었다. 특히, 이 거대한 학원의 발밑에 잠들어 있다는 ‘그것’에 대해서는 더욱더.

    교수님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자, 모두 주목! 이번 학기 고대 마법학 심화 과정의 마지막 과제는 특별하다.”

    칠판에 뜬금없이 ‘미개척 지하 탐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학생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미개척? 보통은 고대 유물 보관소나 안전한 마법 실험실 구역만 탐사하잖아?” 이한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늘 그랬지.” 나 역시 의아했다.

    아르카나 학원 지하에는 수많은 마법 구역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고대 문명의 유적을 그대로 활용한 곳부터, 역대 현자들이 마법 실험을 위해 직접 구축한 공간까지. 하지만 이 모든 곳에는 철저한 등급과 안전 관리가 적용되었다. ‘미개척’이라는 단어는 학원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 없는 용어였다.

    교수님은 학생들의 동요를 즐기는 듯 미소를 지었다.

    “놀랄 필요 없다. 물론, 학원에서 지정한 안전 구역 내에서의 탐사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좀 더 깊이 내려갈 것이다. 심도 3구역까지.”

    심도 3구역. 그곳은 일반적인 학생들에게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학원 내에서도 극소수의 연구원이나 고위 교수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일종의 금지 구역 같은 곳이었다. 물론 ‘접근 금지’라는 딱지가 붙은 심도 4구역보다는 덜했지만.

    “심도 3구역이라면, 과거 ‘대재앙’ 이후 봉인된 마법 도서관의 잔해가 있는 곳 아니던가요?”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그곳에는 아직 해독되지 않은 고대 문헌과, 미발견된 유물들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너희는 팀을 이루어, 지정된 구역 내에서 탐사 및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나는 이한과 눈을 마주쳤다. 이한은 이미 신이 난 표정이었다.
    “크으, 역시 아르카나! 이런 미지의 탐사까지!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군!”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평소와 다른 이례적인 조치. 그리고 ‘대재앙’이라는 단어. 아르카나 학원이 지금의 명성을 얻기 전, 마법 세계를 뒤흔들었던 미증유의 참사.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는 학원 역사서에도 단 몇 줄만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

    며칠 후, 우리는 탐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 지하 입구에 모였다. 두터운 마법 강화 방호복, 빛을 뿜는 마나 랜턴, 그리고 비상용 마법 물약들. 평소 실습과는 차원이 다른 준비물들이었다.

    입구는 거대한 마법 문으로 막혀 있었다. 낡고 거대한 돌문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문지기는 거친 턱수염을 가진, 마치 지하 세계의 문지기 같은 인상의 마법사였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고 마법 문을 개방했다.

    “절대,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지 마라. 그리고 어떤 유물을 발견하든,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즉시 보고해라.”

    그의 경고는 섬뜩하리만치 진지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밀려 나왔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나 랜턴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발밑에는 축축한 이끼와 곰팡이가 가득했고, 벽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마나의 흐름으로 반짝였다.

    우리의 팀은 나, 이한, 그리고 마법 역사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수아, 이렇게 셋이었다. 수아는 꼼꼼하게 지도를 확인하며 앞장섰다.

    “지도에 따르면, 심도 3구역으로 가는 길은 이곳이 유일해. 과거의 마법사들이 사용했던 통로라서, 마나 트랩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

    우리는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벽에 새겨진 고대 마법 문양들이 랜턴 빛에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기묘한 문양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오싹하지 않냐?” 이한이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야. 뭔가… 기분 나쁜 마나가 흐르는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일반적인 학원의 지하 마법 구역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기운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억압되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그런 섬뜩한 느낌.

    한참을 걸었을까, 우리는 거대한 홀에 도착했다. 폐허가 된 도서관의 흔적이었다. 책장은 무너져 내렸고, 고대 문헌들은 먼지와 습기에 훼손된 채 바닥에 뒹굴었다. 한때 지식의 보물창고였을 이곳은, 이제는 비참한 잔해로 가득했다.

    “여기까지가 지정된 탐사 구역이야.” 수아가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각자 조를 나눠서 문헌이나 유물의 흔적을 찾아보자.”

    나는 본능적으로 가장 어둡고, 가장 외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빛이 닿지 않는 곳. 폐허가 된 서고의 가장 안쪽, 으스러진 책장 더미 뒤편이었다. 그곳에는 무언가 묘한 기운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상하다…’

    다른 곳과는 다른, 희미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마법 잔류물과는 다른, 살아있는 듯한 미약한 떨림이었다. 나는 낡은 책장 더미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다른 벽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벽이 있었다. 다른 벽은 옅은 회색빛의 석회암이었지만, 이 벽만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긁힌 듯한, 섬뜩한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아니, 새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생채기 같았다. 끔찍하게 긁히고 파인 흔적들.
    그리고 그 흔적들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균열이 가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균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차가웠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감촉.
    그리고 그 순간, 균열 안쪽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붉은빛.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듯한, 규칙적인 박동과 함께 빛을 발하는 붉은 섬광.
    그리고 그 빛과 함께, 아주 희미한 속삭임이 내 귓가를 스쳤다.

    ***열려라.***

    나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아니, 환청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균열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언가 ‘금지된’ 곳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학원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어야 할,
    끔찍하고 거대한 금기가 숨 쉬고 있었다.

    “진! 뭐 해! 빨리 이리 와봐!”

    멀리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돌벽에서 물러섰다.
    붉은 빛은 사라졌고, 속삭임도 멈췄다.
    다시금 그곳은 침묵과 어둠에 잠긴, 평범한 돌벽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금기의 문을,
    방금 전,
    아주 미세하게나마,
    건드리고 말았다.
    학원의 가장 깊은 심연이, 나를 향해 서서히 입을 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아파트 1204호. 김현우는 캔맥주를 따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길고 지루했던 회의 끝에 찾아온 이 평화가 세상 어떤 보상보다 달콤했다. 폰으로 배달 앱을 열어 피자를 주문하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영화 한 편과 함께 완벽하게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어라?”

    리모컨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손에 닿기 직전 마치 누군가 툭 건드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액정 화면에 익숙한 로고가 뜨고, 메인 화면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영화는 시작부터 흥미로워 보였다. 치즈가 듬뿍 올라간 피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현우는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거울 앞에 서서 손을 씻는데,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창문을 닫아 놓아 공기는 퍽퍽할 정도로 답답했는데, 피부가 곤두서는 차가운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피곤에 절어 약간 핼쑥했지만, 그 외엔 특별한 점이 없었다. 물방울이 맺힌 거울은 희미하게 그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과로다. 틀림없이.

    세면대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서려는데, 벽에 걸린 수건이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치 누군가 잡아당긴 것처럼. 현우는 순간 숨을 멈췄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기이하게 느껴졌다. 수건 걸이는 분명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떨어진 수건을 주워 다시 걸었다.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화장실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그새 영화는 시작되어 화면 가득 폭발음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으려다 멈칫했다.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테이블이 통째로 떨리는 것도 아니고, 오직 유리잔 하나만이. 투명한 물결이 잔 안에서 일렁였다.

    “이게… 뭐지?”

    그는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그러자 흔들림이 뚝 멎었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기다렸다는 듯이. 현우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평생 그런 유별난 일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섬뜩한 상상력이 그의 뇌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는 유리잔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은 온통 차분했다. 소파, TV, 책장. 모든 것이 제자리에 완벽하게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벽 한쪽에 세워둔 장식장 위에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 하나가 떨어졌다. 액자는 바닥에 부딪히며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현우는 벌떡 일어섰다. 그 액자는 분명 장식장 안쪽으로 밀어 넣어둔 것이었다. 바깥으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것도, 마치 누군가 손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정확히.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감싸는 듯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화장실에서 느꼈던 그 차가운 기운이 다시 한번 온몸을 에워싸는 것 같았다.

    “누구… 없어?”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영화에서 들려오던 배우들의 대화 소리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얄밉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깨진 액자 쪽으로 다가갔다. 액자 속 사진은, 몇 년 전 친구들과 함께 여행 가서 찍은 것이었다. 일그러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액자 조각들을 치우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아래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려는데,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식칼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채 뒹굴고 있었다. 칼날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쩍였다.

    그 칼은 분명 칼꽂이에 꽂혀 있었다. 누가 꺼내서 떨어뜨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툭, 하고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현우의 심장이 발작하듯 쿵쾅거렸다. 이젠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에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손바닥이 느껴졌다. 아니, 손바닥이 아니라… 목덜미 자체가 차가웠다. 마치 얼음물을 부은 것처럼.

    “나가… 나가라고!”

    현우는 소리쳤다. 떨리는 목소리가 집안에 공허하게 울렸다. 아무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거실에서 다시 한번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명확했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숨을 헐떡이며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TV 화면이었다.

    TV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아까 분명 틀어놓았던 영화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손가락으로 꾹 누른 듯한 하얀 지문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는 얼어붙은 채 그 지문을 응시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지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희미하고 가늘어서 환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현우는 똑똑히 들었다.

    *…왔어?*

    낮고 음습한, 마치 수백 년 묵은 흙먼지에서 긁어낸 듯한 목소리.

    현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이 저절로 바지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웠지만 겨우겨우 잠금을 풀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설명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친구, 가족, 하다못해 경찰이라도!

    떨리는 손으로 엄마의 번호를 찾아 겨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을 때였다.

    ‘콰앙!’

    이번에는 안방 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거대한 유리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집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어둠이 현우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휴대폰 액정만이 유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엄마의 통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현우야? 왜 전화했어?”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척과, 깨진 유리 파편들이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가득 채웠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엇’은 그의 존재를 이미 눈치챈 듯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강력한 확신과 함께.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그의 휴대폰 너머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엄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집에서 들려오는 비명이었다.

  • 사이버펑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오염된 공기가 눅진하게 폐부를 짓눌렀다. 강혁은 거친 숨을 내쉬며 낡은 환풍구 통로를 기어갔다. 금속 비린내와 기계 기름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사이버네틱 폐부를 강하게 자극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거친 엔진 소리 같았다. 네오-서울의 최하층, ‘그림자 구역’. 이곳은 빛과 법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이었다. 한때 그에게 일상을 선사했던 구역이 이제는 숨통을 조여오는 감시망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의 등 뒤로는 붉고 푸른 비상등이 깜빡이는 감찰 드론의 엔진음이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종족 감찰단’의 그림자는 항상 도시를 덮고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그 그림자가 짙었다. 마치 그들이 무엇인가를 확신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강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확신하는 것은 단 하나. 바로 엘라, 그리고 그와의 ‘관계’였다.

    통로를 빠져나와 낡은 공장 내부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한때 가동되었던 거대한 산업용 로봇의 잔해들이 거대한 해골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서 강혁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의 오른팔에 박힌 신경 증폭 장치가 찌릿하게 경고 신호를 보냈다. 과부하였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엘라… 엘라를 떠올리자 그의 심장이,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로는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인간적인 장기가 격렬하게 고동쳤다. 엘레니족, 푸른 별의 마지막 후예들. 그들의 피부는 달빛 아래서 은은하게 빛났고, 그들의 눈은 깊은 우주를 담고 있었다. 엘라의 머리카락은 실크처럼 부드러웠고, 그 끝에는 미세한 광섬유가 박혀 마치 살아있는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이질적이고도 아름다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그녀를, 그리고 그들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다.

    인간과 이종족 간의 접촉은 ‘금지’였다. 아니, ‘종속’ 이외의 모든 형태의 접촉은 ‘범죄’였다. 이종족 감찰단은 이 법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도시의 가장 잔인한 도구였다. 그들은 엘레니족을, 그들의 지적 능력과 신비로운 문화를 착취하고 노예화하려 했고, 이에 저항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정화’했다. 그리고 강혁과 엘라의 사랑은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가장 위험한 형태의 반역이었다.

    “강혁, 위험해.”

    그의 내장 통신장치에서 엘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고 여린 음성이었지만, 그 속에는 우주의 심연 같은 고통이 담겨 있었다.

    “어디야? 무사해?” 강혁은 급하게 물었다.

    “지금… 나의 은신처 주변으로 감찰단이 들어오고 있어. 네가… 내게 준 그… 신호 교란 장치가 작동하고 있지만, 곧 뚫릴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강혁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엘라가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지난밤, 그녀의 은은한 푸른빛 눈동자 속에서 미래를 그렸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나.

    “움직이지 마. 내가 갈게.”

    “안 돼! 강혁! 넌… 넌 이미 노출됐어. 그들이… 그들이 널 쫓고 있어. 분명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걸 알아낸 거야.”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지켜?” 강혁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목숨 따위는 이미 그 의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멀리서 감찰단의 제트-바이크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굉음이 공장 잔해 사이를 꿰뚫고 들어왔다. 강혁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녀에게 가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잡힐 것이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낡은 제어판과 수십 개의 케이블이었다. 공장 설비를 제어했던 주 시스템의 잔해였다. 그의 사이버네틱 팔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케이블 하나를 뽑아 자신의 신경 증폭 장치와 연결했다. 찌릿, 강렬한 전류가 그의 온몸을 훑었다. 고통과 함께 공장의 버려진 시스템이 다시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엘라, 내 말 잘 들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해.” 강혁은 짧게 명령했다. “네 주변에 있는 모든 기계 장치를 찾아.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아.”

    “강혁… 뭘 하려는 거야?”

    “시간이 없어! 믿어줘. 그리고… 사랑해.”

    마지막 말을 내뱉자마자 강혁은 제어판에 손을 올렸다. 그의 신경 증폭 장치를 통해 도시의 낡은 네트워크 잔해가 깨어났다. 한때 네오-서울을 움직였던 거대한 정보의 흐름이 그의 손끝에서 맥동했다. 목표는 하나, 감찰단의 감시망을 교란하고, 엘라의 주변에 일시적인 맹점을 만드는 것.

    강혁의 눈앞에 펼쳐진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는 수십만 개의 데이터 흐름을 보여주었다. 그의 뇌는 엄청난 속도로 정보를 처리했다. 마치 폭주하는 기관차와 같았다. 땀방울이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의 사이버네틱 폐부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찾았어… 작은 수리 드론이 하나 있어… 강혁!”

    엘라의 목소리에 희망이 섞여 있었다. 강혁은 그 드론의 위치를 파악하고 신경을 집중했다. 그의 의지가 전파를 타고 드론의 제어 시스템에 침투했다. 그리고…

    콰아아앙!

    엘라의 은신처 방향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낡은 건물 잔해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 그리고 감찰단의 욕설과 비명 소리가 그의 귀에 박혔다. 성공했다. 그는 낡은 수리 드론의 폭발을 유도하여 감찰단의 시선을 돌리고, 일시적인 혼란을 야기했다.

    “강혁! 대체… 뭘 한 거야?” 엘라의 목소리는 경악과 동시에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지금이야, 엘라! 내 말 잘 들어. 폭발 지점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 숨겨진 비상 통로가 있을 거야. 내가 예전에 표시해둔 곳… 기억하지?”

    “하지만… 넌?”

    “난 괜찮아. 곧 따라갈게.”

    강혁은 제어판에서 손을 떼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홀로그램은 여전히 감찰단의 이동 경로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엘라를 쫓아 폭발 지점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일시적인 기회였다. 하지만 이 기회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의 등 뒤에서 다시 제트-바이크 엔진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가까웠다. 그는 엘라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미끼가 되어야 했다.

    “젠장.”

    강혁은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사이버네틱 다리가 거친 바닥을 박차고 나갔다. 붉은 눈의 감찰 드론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피하지 않고 드론을 향해 달려갔다. 마치 미친 듯이.

    그는 엘라를 사랑했고, 그 사랑은 모든 금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도시가 그들을 찢어놓으려 해도, 법이 그들을 범죄자로 낙인찍어도, 그의 심장은 오직 그녀만을 향해 뛰었다. 그의 모든 사이버네틱 부품들이 경고음으로 울부짖었지만, 그의 영혼은 오직 한 가지 명령만을 따랐다.

    *엘라를 구한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등 뒤로, 맹렬한 총성과 파괴음이 뒤섞여 울려 퍼졌다. 네오-서울의 잔혹한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아파트 1204호. 김현우는 캔맥주를 따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길고 지루했던 회의 끝에 찾아온 이 평화가 세상 어떤 보상보다 달콤했다. 폰으로 배달 앱을 열어 피자를 주문하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영화 한 편과 함께 완벽하게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어라?”

    리모컨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손에 닿기 직전 마치 누군가 툭 건드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액정 화면에 익숙한 로고가 뜨고, 메인 화면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영화는 시작부터 흥미로워 보였다. 치즈가 듬뿍 올라간 피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현우는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거울 앞에 서서 손을 씻는데,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창문을 닫아 놓아 공기는 퍽퍽할 정도로 답답했는데, 피부가 곤두서는 차가운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피곤에 절어 약간 핼쑥했지만, 그 외엔 특별한 점이 없었다. 물방울이 맺힌 거울은 희미하게 그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과로다. 틀림없이.

    세면대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서려는데, 벽에 걸린 수건이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치 누군가 잡아당긴 것처럼. 현우는 순간 숨을 멈췄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기이하게 느껴졌다. 수건 걸이는 분명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떨어진 수건을 주워 다시 걸었다.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화장실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그새 영화는 시작되어 화면 가득 폭발음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으려다 멈칫했다.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테이블이 통째로 떨리는 것도 아니고, 오직 유리잔 하나만이. 투명한 물결이 잔 안에서 일렁였다.

    “이게… 뭐지?”

    그는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그러자 흔들림이 뚝 멎었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기다렸다는 듯이. 현우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평생 그런 유별난 일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섬뜩한 상상력이 그의 뇌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는 유리잔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은 온통 차분했다. 소파, TV, 책장. 모든 것이 제자리에 완벽하게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벽 한쪽에 세워둔 장식장 위에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 하나가 떨어졌다. 액자는 바닥에 부딪히며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현우는 벌떡 일어섰다. 그 액자는 분명 장식장 안쪽으로 밀어 넣어둔 것이었다. 바깥으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것도, 마치 누군가 손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정확히.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감싸는 듯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화장실에서 느꼈던 그 차가운 기운이 다시 한번 온몸을 에워싸는 것 같았다.

    “누구… 없어?”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영화에서 들려오던 배우들의 대화 소리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얄밉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깨진 액자 쪽으로 다가갔다. 액자 속 사진은, 몇 년 전 친구들과 함께 여행 가서 찍은 것이었다. 일그러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액자 조각들을 치우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아래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려는데,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식칼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채 뒹굴고 있었다. 칼날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쩍였다.

    그 칼은 분명 칼꽂이에 꽂혀 있었다. 누가 꺼내서 떨어뜨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툭, 하고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현우의 심장이 발작하듯 쿵쾅거렸다. 이젠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에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손바닥이 느껴졌다. 아니, 손바닥이 아니라… 목덜미 자체가 차가웠다. 마치 얼음물을 부은 것처럼.

    “나가… 나가라고!”

    현우는 소리쳤다. 떨리는 목소리가 집안에 공허하게 울렸다. 아무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거실에서 다시 한번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명확했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숨을 헐떡이며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TV 화면이었다.

    TV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아까 분명 틀어놓았던 영화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손가락으로 꾹 누른 듯한 하얀 지문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는 얼어붙은 채 그 지문을 응시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지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희미하고 가늘어서 환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현우는 똑똑히 들었다.

    *…왔어?*

    낮고 음습한, 마치 수백 년 묵은 흙먼지에서 긁어낸 듯한 목소리.

    현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이 저절로 바지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웠지만 겨우겨우 잠금을 풀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설명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친구, 가족, 하다못해 경찰이라도!

    떨리는 손으로 엄마의 번호를 찾아 겨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을 때였다.

    ‘콰앙!’

    이번에는 안방 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거대한 유리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집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어둠이 현우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휴대폰 액정만이 유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엄마의 통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현우야? 왜 전화했어?”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척과, 깨진 유리 파편들이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가득 채웠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엇’은 그의 존재를 이미 눈치챈 듯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강력한 확신과 함께.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그의 휴대폰 너머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엄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집에서 들려오는 비명이었다.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심연의 속삭임

    아르카나 마법 학원.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곳. 찬란한 마법의 빛이 밤하늘을 수놓고, 고대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기운이 캠퍼스를 감싸는 곳. 전 세계의 수재들이 모여 차원 마법과 정령술, 고대 언어학을 탐구하는, 그야말로 마법의 정수와도 같은 배움의 전당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진.
    그 찬란함 속에서 존재감을 잃은 채, 그저 졸업 학점이나 겨우 채우려 발버둥 치는 평범한 마법학도였다.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젠장, 또 이론 수업이야?”

    내 옆자리에서 한숨을 쉬는 이한의 중얼거림이 귓가에 박혔다. 이한은 나와 정반대였다. 뛰어난 마법 재능과 귀족적인 외모, 그리고 한없이 여유로운 성격까지. 아르카나의 빛나는 별 중 하나. 그는 늘 내게 불평을 털어놓곤 했지만, 실상은 누구보다 이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얄미운 친구였다.

    “어차피 너는 다 외울 거잖아.” 내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외우는 게 아니라 이해하는 거지, 임마. 그래도 지루한 건 지루한 거야. 차라리 실습 수업이나 늘려줬으면 좋겠네.”

    이한은 펜을 턱에 대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 드넓은 마나의 바다를 갈망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마나의 바다보다는, 그 바다 밑에 숨겨진 어둡고 축축한 비밀에 더 흥미가 있었다. 특히, 이 거대한 학원의 발밑에 잠들어 있다는 ‘그것’에 대해서는 더욱더.

    교수님의 목소리가 쩌렁 울렸다.

    “자, 모두 주목! 이번 학기 고대 마법학 심화 과정의 마지막 과제는 특별하다.”

    칠판에 뜬금없이 ‘미개척 지하 탐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학생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미개척? 보통은 고대 유물 보관소나 안전한 마법 실험실 구역만 탐사하잖아?” 이한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늘 그랬지.” 나 역시 의아했다.

    아르카나 학원 지하에는 수많은 마법 구역이 얽히고설켜 있었다. 고대 문명의 유적을 그대로 활용한 곳부터, 역대 현자들이 마법 실험을 위해 직접 구축한 공간까지. 하지만 이 모든 곳에는 철저한 등급과 안전 관리가 적용되었다. ‘미개척’이라는 단어는 학원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 없는 용어였다.

    교수님은 학생들의 동요를 즐기는 듯 미소를 지었다.

    “놀랄 필요 없다. 물론, 학원에서 지정한 안전 구역 내에서의 탐사다.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좀 더 깊이 내려갈 것이다. 심도 3구역까지.”

    심도 3구역. 그곳은 일반적인 학생들에게는 거의 접근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학원 내에서도 극소수의 연구원이나 고위 교수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일종의 금지 구역 같은 곳이었다. 물론 ‘접근 금지’라는 딱지가 붙은 심도 4구역보다는 덜했지만.

    “심도 3구역이라면, 과거 ‘대재앙’ 이후 봉인된 마법 도서관의 잔해가 있는 곳 아니던가요?”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물었다.

    교수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그곳에는 아직 해독되지 않은 고대 문헌과, 미발견된 유물들이 잠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너희는 팀을 이루어, 지정된 구역 내에서 탐사 및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나는 이한과 눈을 마주쳤다. 이한은 이미 신이 난 표정이었다.
    “크으, 역시 아르카나! 이런 미지의 탐사까지! 벌써부터 가슴이 뛰는군!”

    나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평소와 다른 이례적인 조치. 그리고 ‘대재앙’이라는 단어. 아르카나 학원이 지금의 명성을 얻기 전, 마법 세계를 뒤흔들었던 미증유의 참사.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는 학원 역사서에도 단 몇 줄만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이었다.

    ***

    며칠 후, 우리는 탐사를 위한 채비를 갖추고 지하 입구에 모였다. 두터운 마법 강화 방호복, 빛을 뿜는 마나 랜턴, 그리고 비상용 마법 물약들. 평소 실습과는 차원이 다른 준비물들이었다.

    입구는 거대한 마법 문으로 막혀 있었다. 낡고 거대한 돌문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문지기는 거친 턱수염을 가진, 마치 지하 세계의 문지기 같은 인상의 마법사였다.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고 마법 문을 개방했다.

    “절대, 지정된 구역을 벗어나지 마라. 그리고 어떤 유물을 발견하든,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즉시 보고해라.”

    그의 경고는 섬뜩하리만치 진지했다.

    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차가운 공기가 밀려 나왔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나 랜턴의 빛이 닿지 않는 곳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발밑에는 축축한 이끼와 곰팡이가 가득했고, 벽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마나의 흐름으로 반짝였다.

    우리의 팀은 나, 이한, 그리고 마법 역사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수아, 이렇게 셋이었다. 수아는 꼼꼼하게 지도를 확인하며 앞장섰다.

    “지도에 따르면, 심도 3구역으로 가는 길은 이곳이 유일해. 과거의 마법사들이 사용했던 통로라서, 마나 트랩이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

    우리는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벽에 새겨진 고대 마법 문양들이 랜턴 빛에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기묘한 문양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오싹하지 않냐?” 이한이 팔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런 곳은 처음이야. 뭔가… 기분 나쁜 마나가 흐르는 것 같아.”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일반적인 학원의 지하 마법 구역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기운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억압되어 있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그런 섬뜩한 느낌.

    한참을 걸었을까, 우리는 거대한 홀에 도착했다. 폐허가 된 도서관의 흔적이었다. 책장은 무너져 내렸고, 고대 문헌들은 먼지와 습기에 훼손된 채 바닥에 뒹굴었다. 한때 지식의 보물창고였을 이곳은, 이제는 비참한 잔해로 가득했다.

    “여기까지가 지정된 탐사 구역이야.” 수아가 지도를 접으며 말했다. “각자 조를 나눠서 문헌이나 유물의 흔적을 찾아보자.”

    나는 본능적으로 가장 어둡고, 가장 외진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빛이 닿지 않는 곳. 폐허가 된 서고의 가장 안쪽, 으스러진 책장 더미 뒤편이었다. 그곳에는 무언가 묘한 기운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상하다…’

    다른 곳과는 다른, 희미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일반적인 마법 잔류물과는 다른, 살아있는 듯한 미약한 떨림이었다. 나는 낡은 책장 더미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다른 벽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색 돌로 만들어진 벽이 있었다. 다른 벽은 옅은 회색빛의 석회암이었지만, 이 벽만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리고 그 표면에는 긁힌 듯한, 섬뜩한 무언가가 새겨져 있었다.

    아니, 새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생채기 같았다. 끔찍하게 긁히고 파인 흔적들.
    그리고 그 흔적들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균열이 가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균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차가웠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감촉.
    그리고 그 순간, 균열 안쪽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붉은빛.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듯한, 규칙적인 박동과 함께 빛을 발하는 붉은 섬광.
    그리고 그 빛과 함께, 아주 희미한 속삭임이 내 귓가를 스쳤다.

    ***열려라.***

    나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것은 환청이 아니었다.
    아니, 환청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단순한 균열이 아니었다.
    이것은, 무언가 ‘금지된’ 곳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학원의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어야 할,
    끔찍하고 거대한 금기가 숨 쉬고 있었다.

    “진! 뭐 해! 빨리 이리 와봐!”

    멀리서 이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재빨리 손을 거두고 돌벽에서 물러섰다.
    붉은 빛은 사라졌고, 속삭임도 멈췄다.
    다시금 그곳은 침묵과 어둠에 잠긴, 평범한 돌벽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금기의 문을,
    방금 전,
    아주 미세하게나마,
    건드리고 말았다.
    학원의 가장 깊은 심연이, 나를 향해 서서히 입을 벌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아파트 1204호. 김현우는 캔맥주를 따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길고 지루했던 회의 끝에 찾아온 이 평화가 세상 어떤 보상보다 달콤했다. 폰으로 배달 앱을 열어 피자를 주문하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오늘 저녁은 오랜만에 영화 한 편과 함께 완벽하게 마무리할 예정이었다.

    “어라?”

    리모컨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손에 닿기 직전 마치 누군가 툭 건드린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액정 화면에 익숙한 로고가 뜨고, 메인 화면이 나타났다. 다행히도 영화는 시작부터 흥미로워 보였다. 치즈가 듬뿍 올라간 피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현우는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거울 앞에 서서 손을 씻는데,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창문을 닫아 놓아 공기는 퍽퍽할 정도로 답답했는데, 피부가 곤두서는 차가운 기운이 목덜미를 타고 스며드는 듯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피곤에 절어 약간 핼쑥했지만, 그 외엔 특별한 점이 없었다. 물방울이 맺힌 거울은 희미하게 그의 뒷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과로다. 틀림없이.

    세면대 수도꼭지를 잠그고 돌아서려는데, 벽에 걸린 수건이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마치 누군가 잡아당긴 것처럼. 현우는 순간 숨을 멈췄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그 순간만큼은 기이하게 느껴졌다. 수건 걸이는 분명 튼튼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떨어진 수건을 주워 다시 걸었다. 손끝이 저절로 떨렸다.

    화장실을 나와 거실로 향했다. 그새 영화는 시작되어 화면 가득 폭발음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앉으려다 멈칫했다.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테이블이 통째로 떨리는 것도 아니고, 오직 유리잔 하나만이. 투명한 물결이 잔 안에서 일렁였다.

    “이게… 뭐지?”

    그는 손을 뻗어 잔을 잡았다. 그러자 흔들림이 뚝 멎었다. 마치 자신의 움직임을 기다렸다는 듯이. 현우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평생 그런 유별난 일이라고는 겪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섬뜩한 상상력이 그의 뇌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는 유리잔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거실은 온통 차분했다. 소파, TV, 책장. 모든 것이 제자리에 완벽하게 놓여 있었다.

    그 순간, 벽 한쪽에 세워둔 장식장 위에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 하나가 떨어졌다. 액자는 바닥에 부딪히며 유리가 산산조각 났다. 현우는 벌떡 일어섰다. 그 액자는 분명 장식장 안쪽으로 밀어 넣어둔 것이었다. 바깥으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그것도, 마치 누군가 손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정확히.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감싸는 듯했다. 그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화장실에서 느꼈던 그 차가운 기운이 다시 한번 온몸을 에워싸는 것 같았다.

    “누구… 없어?”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영화에서 들려오던 배우들의 대화 소리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얄밉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깨진 액자 쪽으로 다가갔다. 액자 속 사진은, 몇 년 전 친구들과 함께 여행 가서 찍은 것이었다. 일그러진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액자 조각들을 치우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아래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꺼내려는데, 갑자기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졌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식칼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채 뒹굴고 있었다. 칼날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섬뜩하게 번쩍였다.

    그 칼은 분명 칼꽂이에 꽂혀 있었다. 누가 꺼내서 떨어뜨린 것 같지도 않았다. 그저… 툭, 하고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현우의 심장이 발작하듯 쿵쾅거렸다. 이젠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에 손으로 목덜미를 감쌌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손바닥이 느껴졌다. 아니, 손바닥이 아니라… 목덜미 자체가 차가웠다. 마치 얼음물을 부은 것처럼.

    “나가… 나가라고!”

    현우는 소리쳤다. 떨리는 목소리가 집안에 공허하게 울렸다. 아무 대답도, 반응도 없었다. 그는 뒤로 물러서며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발이 바닥에 붙어버린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거실에서 다시 한번 ‘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명확했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숨을 헐떡이며 거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TV 화면이었다.

    TV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아까 분명 틀어놓았던 영화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화면 중앙에… 손가락으로 꾹 누른 듯한 하얀 지문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는 얼어붙은 채 그 지문을 응시했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지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희미하고 가늘어서 환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현우는 똑똑히 들었다.

    *…왔어?*

    낮고 음습한, 마치 수백 년 묵은 흙먼지에서 긁어낸 듯한 목소리.

    현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이 저절로 바지 주머니 속 휴대폰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웠지만 겨우겨우 잠금을 풀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이 상황을 설명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친구, 가족, 하다못해 경찰이라도!

    떨리는 손으로 엄마의 번호를 찾아 겨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을 때였다.

    ‘콰앙!’

    이번에는 안방 쪽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거대한 유리가 깨지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집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어둠이 현우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휴대폰 액정만이 유일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엄마의 통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화면이 까맣게 변했다.

    “현우야? 왜 전화했어?”

    수화기 너머로 엄마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척과, 깨진 유리 파편들이 어둠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가득 채웠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무엇’은 그의 존재를 이미 눈치챈 듯했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강력한 확신과 함께.
    그리고 그 순간, 귀를 찢을 듯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그의 휴대폰 너머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엄마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집에서 들려오는 비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