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다크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대본: 잃어버린 그림자

    **장르:** 다크 판타지
    **핵심 줄거리:**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

    **에피소드 1: 폐허의 속삭임**

    **[장면 #1]**
    **[배경]** 폐허가 된 도시, 아케론. 한때 거대했던 문명의 흔적만이 을씨년스러운 바람 속에 앙상하게 남아있다. 무너진 고층 건물들의 실루엣이 회색빛 하늘을 찢고, 금이 간 도로에는 먼지와 돌멩이만이 뒹군다. 그 위를 스산한 안개가 낮게 깔려 기어 다닌다. 어딘가에서 뼈를 긁는 듯한 바람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캐릭터]** 카인. 20대 초반. 낡고 해진 가죽 옷을 걸치고 있다. 등에는 녹슨 금속 조각들과 알 수 없는 기계 부품들로 가득 찬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다. 얼굴은 먼지와 흙으로 얼룩져 있고, 눈빛은 피곤하고 메말라 있지만, 동시에 한 조각의 맹렬함이 서려 있다. 손에는 끝이 뭉툭해진 낡은 단검을 쥐고 있다.

    **[지문]**
    카인의 발소리가 고요한 폐허 속에 메아리친다. 그는 굳게 다문 입술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바닥의 잔해들을 훑는다.

    **카인:** (독백,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빌어먹을… 오늘은 또 아무것도 없군.

    **[장면 #2]**
    **[배경]** 카인이 무너진 건물 잔해 옆을 지나가다가 멈춘다. 그의 발치에 뒹굴던 돌멩이 하나가 굴러가더니, 뻥 뚫린 지하 통로의 입구로 사라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그곳에서 꿈틀거린다.

    **[지문]**
    카인이 멈춰 선다. 그의 눈이 지하 통로의 어둠을 응시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는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다.

    **카인:** (독백) 젠장. 며칠째 제대로 된 걸 먹지 못했어. (주변을 다시 살피며) 이 근처는 ‘그림자 파편’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인데… 위험 부담이 너무 커.

    **[지문]**
    잠시 망설이던 카인은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고 지하 통로로 향한다. 그의 낡은 단검이 손에서 땀으로 축축해진다.

    **카인:** (독백) 죽으나 사나… 이대로 굶어 죽는 것보단 나아. 어쩌면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몰라.

    **[장면 #3]**
    **[배경]** 지하 통로.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코를 찌른다.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카인의 등 뒤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지상의 빛이 점점 멀어져 가고, 어둠이 그를 완전히 삼켜 버린다.

    **[지문]**
    카인이 배낭에서 낡은 랜턴을 꺼내 불을 밝힌다. 칙칙한 빛이 겨우 몇 걸음 앞을 비출 뿐이다. 그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늘어져 불길하게 흔들린다.

    **카인:** (숨소리) 으읍… 이 냄새… 역겨워.

    **[지문]**
    카인이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그의 눈은 주변의 벽과 바닥을 꼼꼼히 살핀다. 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카인:** (독백) 이런 곳에 누가 살았을까? 아니, 누가 이런 곳을 만들었을까? 아케론의 기록에도 없는…

    **[지문]**
    그때, 멀리서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카인의 몸이 순간 굳는다. 그는 랜턴의 빛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비춘다.

    **카인:** (작은 목소리) …!

    **[장면 #4]**
    **[배경]** 랜턴 빛이 비춘 곳. 벽의 갈라진 틈새에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는 듯한 형체가 꿈틀거린다. 작지만 날카로운 발톱과 찢어진 입을 가진 ‘그림자 파편’이다. 그 모습은 마치 짙은 어둠이 형체를 얻은 것 같다.

    **[지문]**
    그림자 파편이 카인을 발견하자마자, ‘키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든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단검을 쥐고 몸을 웅크린다.

    **카인:** (놀라 외침) 젠장! 벌써 나타날 줄이야!

    **[지문]**
    그림자 파편이 빠르게 카인의 팔을 스쳐 지나간다. 팔에 검은 흔적이 남으며, 피부가 따끔거린다. 카인이 단검을 휘둘러 반격하지만, 그림자 파편은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며 다시 덤벼든다.

    **카인:** (거친 숨) 크윽… 이 자식, 빠르잖아!

    **[지문]**
    카인이 뒷걸음질 치다 발을 헛디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지하 통로의 바닥에 파묻혀 있던 낡은 석판 위로 넘어진다. 석판은 그 충격에 ‘콰앙!’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고, 카인은 균열 속으로 추락한다.

    **카인:** (비명) 으아아아악!

    **[장면 #5]**
    **[배경]** 카인이 떨어진 곳은 어둠 속 깊이 숨겨져 있던 고대의 방이다. 방의 공기는 방금까지 있던 지하 통로와는 전혀 다른, 정제되고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벽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보라색의 고대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낡은 석재 제단이 놓여 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자체가 불길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는다.

    **[지문]**
    카인이 ‘털썩!’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다. 그의 몸에서는 ‘흐읍, 흐읍’ 하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랜턴을 들어 주변을 비춘다. 그의 눈이 크게 뜨인다.

    **카인:** (독백) 여긴… 뭐야?

    **[지문]**
    그의 시선이 제단으로 향한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지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검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여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희미하게 박동하는 수정 구슬이었다. 그 구슬은 빛을 흡수하는 듯, 주변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

    **카인:** (떨리는 목소리) 저건…

    **[지문]**
    카인은 홀린 듯이 제단으로 다가간다.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끌림에 저항할 수 없다. 그의 손이 천천히, 하지만 멈출 수 없다는 듯, 그 수정 구슬을 향해 뻗어간다. 손끝이 구슬에 닿으려는 순간, 구슬이 더욱 강렬하게 박동하며 주변의 고대 문양들이 섬광처럼 빛난다.

    **[장면 #6]**
    **[배경]** 수정 구슬에 손을 댄 카인.

    **[지문]**
    카인의 손이 수정 구슬에 닿는 순간, ‘쉬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양의 어둡고 차가운 에너지가 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의 전신이 마치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비틀린다. 눈동자는 순식간에 보랏빛 섬광으로 물들고, 이빨을 악물고 버티는 그의 입에서 ‘으으으으아아아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카인:** (절규) 크아아아악!

    **[지문]**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고대의 비명, 잊혀진 저주, 파괴된 문명, 그리고 심연의 끝에서 속삭이는 이름 없는 존재의 목소리. 카인의 몸은 전율하고, 그의 피부 위로 검은 기운이 마치 그림자처럼 솟아오른다.

    **[지문]**
    고통 속에서, 카인은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육체는 더욱 강렬하게 반응하며,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기시감이 엄습한다. 수정 구슬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그 에너지는 완전히 카인에게 흡수된다.

    **카인:** (고통과 함께 섞인 혼란스러운 신음) 이게… 뭐야…?

    **[장면 #7]**
    **[배경]** 에너지가 모두 흡수된 후의 방. 수정 구슬은 차갑게 식은 돌멩이가 되어 제단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방을 밝히던 고대 문양의 빛도 모두 사라졌다. 오직 카인의 랜턴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지문]**
    카인이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축축하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제 이전과는 다른, 어딘가 음침하면서도 깊은 빛을 띠고 있다. 그는 서서히 손을 들어 올린다. 손바닥 위에서 아주 희미하게,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사라진다.

    **카인:** (독백, 떨리는 목소리) 이… 힘은…

    **[지문]**
    그의 귀에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려온다. ‘깨어났구나… 나의 아이여…’

    **카인:** (움찔) 누구야…?

    **[지문]**
    그때, 방의 가장 깊숙한 곳, 어둠에 가려져 있던 벽이 ‘쿠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벽의 중앙이 서서히 갈라지며, 그 안에서 짙은 어둠이 흘러나온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두 개의 붉은 눈이 카인을 응시한다. 그 눈에는 수천 년의 세월이 담긴 듯한 깊은 고요함과 동시에 맹렬한 파괴의 의지가 서려 있다.

    **카인:** (경악에 찬 표정) …!

    **[마지막 장면]**
    거대한 어둠의 형체가 갈라진 벽 틈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이 폐허의 심장과도 같은, 고대적이고 끔찍한 존재의 그림자였다. 카인의 등 뒤에서 스산한 냉기가 느껴진다.

    **[지문]**
    카인의 얼굴에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결의가 스친다. 그는 방금 얻은 힘을 감지하려는 듯, 손을 꽉 움켜쥔다.

    **카인:** (독백, 혼잣말처럼) 대체… 뭘 깨워버린 거지?

    **[끝]**

  • 심리 스릴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심연 아래의 속삭임

    어둠은 늘 그랬듯, 존재하지 않는 것에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유하는 손전등이 비추는 좁은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 내려갔다. 낡은 석조 계단은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텅 빈 공간을 울리며 마치 누군가 유하의 뒤를 쫓아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셀 마법 학원, 그 웅장하고 아름다운 지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이 지하 3층에 존재했다. ‘봉인된 아카이브’.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학원의 가장 깊은 금고이자 동시에 가장 오랫동안 잊힌 무덤이었다.

    “젠장, 아론 교수님은 왜 하필 지금….”

    유하는 입술을 씹었다. 밤 11시. 모두가 꿈나라를 헤매거나, 기숙사 카페에서 친구들과 한창 수다를 떨고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유하는 ‘고대 흑마법의 기원과 소멸에 관한 연구’라는 해묵은 논문의 원본을 찾아야 한다는 아론 교수의 말에 끌려 이 음침한 곳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교수는 으레 그렇듯 유하가 이 모든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학생이라며 칭찬했지만, 유하는 그저 자신이 언제나 성가신 일에 가장 먼저 불려나가는 ‘희생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자, 냉기가 확 끼쳐왔다. 코끝이 시큰거릴 정도로 차가운 공기는 오래된 흙먼지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비릿한 금속성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유하는 손전등을 들어 주위를 비췄다. 복도 양쪽으로는 끝없이 늘어선 철제 서가들이 보였다. 낡은 가죽 장정의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지만, 그 책들 위로는 두껍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마치 시간 자체가 이곳에서 멈춰버린 듯했다.

    “세 번째 서가, 다섯 번째 칸….”

    교수가 건넨 쪽지에 적힌 지시사항을 되뇌며 유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철제 서가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듯했다. 유하는 그 소리가 서가의 마찰음이 아니라, 그 안에 갇힌 무언가의 신음 소리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이곳의 음습한 분위기는 모든 합리적인 사고를 마비시키는 듯했다.

    드디어 목표한 서가 앞에 섰다. 손전등을 들어 책등을 훑었다. 먼지투성이 책들 사이에서 쪽지에 적힌 제목을 찾아냈다. 조심스럽게 책을 뽑아내자, 쿰쿰한 냄새와 함께 먼지가 후루룩 일어났다. 유하는 기침을 하며 책을 품에 안았다.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때였다.
    유하의 귀에, 아주 희미한, 하지만 명확한 소리가 들렸다.
    *철컥.*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서가 끝, 복도와 연결되는 지점이었다. 그곳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교수가 건넨 설계도면에도, 학원 내부에 배부된 일반 지도에도 그곳은 막다른 벽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하의 손전등 빛이 닿은 곳에는, 분명히, 낡은 철문이 있었다. 벽과 완전히 동일한 색으로 칠해져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만은 거대했다. 문고리조차 보이지 않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 투박한 철문이었다.

    유하는 홀린 듯 그 문으로 다가갔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코끝을 스치는 금속성 냄새가 더욱 강렬해졌다. 문에 손을 대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수십 년간 지하 깊은 곳에 갇혀 있던 한기가 손목을 타고 심장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리 밀고 당겨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겨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굳게 닫힌 것인가?
    유하는 손전등을 들어 문 주변을 비췄다. 그리고 문틀의 가장자리, 바닥과 만나는 지점에 아주 희미한 틈새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치 누군가 칼날로 억지로 쑤셔 넣은 듯한 미세한 틈새. 그 틈새 안쪽에서, 아주 작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붉은색에 가까운, 어둡고 끈적이는 듯한 빛.

    그것은 단순한 틈새가 아니었다. 틈새가 아니라, *구멍*이었다.
    유하는 몸을 숙여 눈을 가까이 댔다. 구멍 너머는 어두웠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그림자. 그리고,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낌.*
    아니, 흐느낌보다는 훨씬 더 원초적이고 기괴한 소리였다. 마치 짐승이 발톱으로 긁어대는 듯한, 그러나 그 안에 어떤 고통이 스며든 듯한 소리. 불규칙하고 억눌린, 웅얼거리는 소리.

    유하의 등골을 차가운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아카이브가 아니었다. 분명히, 무언가가 *갇혀* 있었다.
    더 자세히 보려고 구멍에 눈을 더 바싹 대는 순간, 유하의 발밑에 뭔가 채이는 느낌이 들었다.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발밑을 손전등으로 비추자, 거기에는 녹슨 쇠사슬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그 쇠사슬은 끊어져 있었는데, 한쪽 끝은 마치 강한 힘에 의해 억지로 뜯겨 나간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그리고 쇠사슬 조각 옆에는, 아주 작고 낡은, 헝겊 인형의 머리 부분이 놓여 있었다. 한쪽 눈은 꿰매지다 만 듯 실밥이 튀어나와 있었고, 솜이 터져 나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섬뜩했다. 이곳의 분위기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소리와, 이 낡은 인형의 조합은, 유하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아론 교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가 건넨 쪽지, 그리고 그가 유하에게만 특별히 이 임무를 맡긴 이유. 어쩌면 교수는 유하가 이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혹은… 유하가 이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이미 어떤 거대한 계획의 일부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두려움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유하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이 철문 안쪽에 있는 것은 단순한 ‘금기’가 아니라, 살아있는, 그리고 어쩌면 숨 쉬고 있는, 끔찍한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 지금 당장.

    유하가 몸을 돌려 서가를 향해 막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등 뒤의 철문에서, 다시 한번,
    *철컥… 덜그럭.*
    이번에는 쇠사슬이 흔들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그 소리 뒤에는, 좀 더 선명해진, 낮고 끈적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왔구나.”
    아주 희미한, 하지만 분명히 인간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마치 유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유하의 모든 신경이 곤두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그녀는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문틈으로 새어 나오던 붉은 빛이, 아주 조금씩, 박동하는 것처럼 깜빡이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그 문 너머에서 유하를 주시하고 있었다.
    유하는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켰지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녀의 몸을 움직이게 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유하는 미친 듯이 복도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낡은 책들이 빼곡한 서가들 사이를 헤치며, 어둠 속으로, 다시 지상으로.

    하지만 그녀의 등 뒤에서는, 끈적하고 기이한 웃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우며 쫓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의 낮은 속삭임이 섞여 들려왔다.
    “찾았다….”

    유하는 숨이 턱 막혔다. 이 지하실은 단순한 아카이브가 아니었다.
    이곳은 거대한 무덤이자, 동시에 살아있는 무언가를 가두는 감옥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십 년간 잊혔던 끔찍한 금기가, 방금 깨어난 참이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 다크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대본: 잃어버린 그림자

    **장르:** 다크 판타지
    **핵심 줄거리:**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

    **에피소드 1: 폐허의 속삭임**

    **[장면 #1]**
    **[배경]** 폐허가 된 도시, 아케론. 한때 거대했던 문명의 흔적만이 을씨년스러운 바람 속에 앙상하게 남아있다. 무너진 고층 건물들의 실루엣이 회색빛 하늘을 찢고, 금이 간 도로에는 먼지와 돌멩이만이 뒹군다. 그 위를 스산한 안개가 낮게 깔려 기어 다닌다. 어딘가에서 뼈를 긁는 듯한 바람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온다.

    **[캐릭터]** 카인. 20대 초반. 낡고 해진 가죽 옷을 걸치고 있다. 등에는 녹슨 금속 조각들과 알 수 없는 기계 부품들로 가득 찬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있다. 얼굴은 먼지와 흙으로 얼룩져 있고, 눈빛은 피곤하고 메말라 있지만, 동시에 한 조각의 맹렬함이 서려 있다. 손에는 끝이 뭉툭해진 낡은 단검을 쥐고 있다.

    **[지문]**
    카인의 발소리가 고요한 폐허 속에 메아리친다. 그는 굳게 다문 입술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바닥의 잔해들을 훑는다.

    **카인:** (독백,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빌어먹을… 오늘은 또 아무것도 없군.

    **[장면 #2]**
    **[배경]** 카인이 무너진 건물 잔해 옆을 지나가다가 멈춘다. 그의 발치에 뒹굴던 돌멩이 하나가 굴러가더니, 뻥 뚫린 지하 통로의 입구로 사라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 그곳에서 꿈틀거린다.

    **[지문]**
    카인이 멈춰 선다. 그의 눈이 지하 통로의 어둠을 응시한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울린다. 그는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다.

    **카인:** (독백) 젠장. 며칠째 제대로 된 걸 먹지 못했어. (주변을 다시 살피며) 이 근처는 ‘그림자 파편’들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인데… 위험 부담이 너무 커.

    **[지문]**
    잠시 망설이던 카인은 이내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고 지하 통로로 향한다. 그의 낡은 단검이 손에서 땀으로 축축해진다.

    **카인:** (독백) 죽으나 사나… 이대로 굶어 죽는 것보단 나아. 어쩌면 쓸 만한 게 있을지도 몰라.

    **[장면 #3]**
    **[배경]** 지하 통로. 습하고 축축한 공기가 코를 찌른다.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카인의 등 뒤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지상의 빛이 점점 멀어져 가고, 어둠이 그를 완전히 삼켜 버린다.

    **[지문]**
    카인이 배낭에서 낡은 랜턴을 꺼내 불을 밝힌다. 칙칙한 빛이 겨우 몇 걸음 앞을 비출 뿐이다. 그의 그림자가 벽에 길게 늘어져 불길하게 흔들린다.

    **카인:** (숨소리) 으읍… 이 냄새… 역겨워.

    **[지문]**
    카인이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그의 눈은 주변의 벽과 바닥을 꼼꼼히 살핀다. 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카인:** (독백) 이런 곳에 누가 살았을까? 아니, 누가 이런 곳을 만들었을까? 아케론의 기록에도 없는…

    **[지문]**
    그때, 멀리서 ‘쉬이이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카인의 몸이 순간 굳는다. 그는 랜턴의 빛을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비춘다.

    **카인:** (작은 목소리) …!

    **[장면 #4]**
    **[배경]** 랜턴 빛이 비춘 곳. 벽의 갈라진 틈새에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는 듯한 형체가 꿈틀거린다. 작지만 날카로운 발톱과 찢어진 입을 가진 ‘그림자 파편’이다. 그 모습은 마치 짙은 어둠이 형체를 얻은 것 같다.

    **[지문]**
    그림자 파편이 카인을 발견하자마자, ‘키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달려든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단검을 쥐고 몸을 웅크린다.

    **카인:** (놀라 외침) 젠장! 벌써 나타날 줄이야!

    **[지문]**
    그림자 파편이 빠르게 카인의 팔을 스쳐 지나간다. 팔에 검은 흔적이 남으며, 피부가 따끔거린다. 카인이 단검을 휘둘러 반격하지만, 그림자 파편은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하며 다시 덤벼든다.

    **카인:** (거친 숨) 크윽… 이 자식, 빠르잖아!

    **[지문]**
    카인이 뒷걸음질 치다 발을 헛디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지하 통로의 바닥에 파묻혀 있던 낡은 석판 위로 넘어진다. 석판은 그 충격에 ‘콰앙!’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고, 카인은 균열 속으로 추락한다.

    **카인:** (비명) 으아아아악!

    **[장면 #5]**
    **[배경]** 카인이 떨어진 곳은 어둠 속 깊이 숨겨져 있던 고대의 방이다. 방의 공기는 방금까지 있던 지하 통로와는 전혀 다른, 정제되고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하다. 벽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보라색의 고대 문양들이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낡은 석재 제단이 놓여 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그 자체가 불길하면서도 신비로운 기운을 내뿜는다.

    **[지문]**
    카인이 ‘털썩!’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다. 그의 몸에서는 ‘흐읍, 흐읍’ 하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랜턴을 들어 주변을 비춘다. 그의 눈이 크게 뜨인다.

    **카인:** (독백) 여긴… 뭐야?

    **[지문]**
    그의 시선이 제단으로 향한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했지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검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여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희미하게 박동하는 수정 구슬이었다. 그 구슬은 빛을 흡수하는 듯, 주변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었다.

    **카인:** (떨리는 목소리) 저건…

    **[지문]**
    카인은 홀린 듯이 제단으로 다가간다.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끌림에 저항할 수 없다. 그의 손이 천천히, 하지만 멈출 수 없다는 듯, 그 수정 구슬을 향해 뻗어간다. 손끝이 구슬에 닿으려는 순간, 구슬이 더욱 강렬하게 박동하며 주변의 고대 문양들이 섬광처럼 빛난다.

    **[장면 #6]**
    **[배경]** 수정 구슬에 손을 댄 카인.

    **[지문]**
    카인의 손이 수정 구슬에 닿는 순간, ‘쉬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양의 어둡고 차가운 에너지가 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의 전신이 마치 불에 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비틀린다. 눈동자는 순식간에 보랏빛 섬광으로 물들고, 이빨을 악물고 버티는 그의 입에서 ‘으으으으아아아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온다.

    **카인:** (절규) 크아아아악!

    **[지문]**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고대의 비명, 잊혀진 저주, 파괴된 문명, 그리고 심연의 끝에서 속삭이는 이름 없는 존재의 목소리. 카인의 몸은 전율하고, 그의 피부 위로 검은 기운이 마치 그림자처럼 솟아오른다.

    **[지문]**
    고통 속에서, 카인은 자신이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의 육체는 더욱 강렬하게 반응하며, 내면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기시감이 엄습한다. 수정 구슬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그 에너지는 완전히 카인에게 흡수된다.

    **카인:** (고통과 함께 섞인 혼란스러운 신음) 이게… 뭐야…?

    **[장면 #7]**
    **[배경]** 에너지가 모두 흡수된 후의 방. 수정 구슬은 차갑게 식은 돌멩이가 되어 제단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방을 밝히던 고대 문양의 빛도 모두 사라졌다. 오직 카인의 랜턴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지문]**
    카인이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쉰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축축하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제 이전과는 다른, 어딘가 음침하면서도 깊은 빛을 띠고 있다. 그는 서서히 손을 들어 올린다. 손바닥 위에서 아주 희미하게,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사라진다.

    **카인:** (독백, 떨리는 목소리) 이… 힘은…

    **[지문]**
    그의 귀에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환청이 들려온다. ‘깨어났구나… 나의 아이여…’

    **카인:** (움찔) 누구야…?

    **[지문]**
    그때, 방의 가장 깊숙한 곳, 어둠에 가려져 있던 벽이 ‘쿠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다. 벽의 중앙이 서서히 갈라지며, 그 안에서 짙은 어둠이 흘러나온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두 개의 붉은 눈이 카인을 응시한다. 그 눈에는 수천 년의 세월이 담긴 듯한 깊은 고요함과 동시에 맹렬한 파괴의 의지가 서려 있다.

    **카인:** (경악에 찬 표정) …!

    **[마지막 장면]**
    거대한 어둠의 형체가 갈라진 벽 틈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이 폐허의 심장과도 같은, 고대적이고 끔찍한 존재의 그림자였다. 카인의 등 뒤에서 스산한 냉기가 느껴진다.

    **[지문]**
    카인의 얼굴에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결의가 스친다. 그는 방금 얻은 힘을 감지하려는 듯, 손을 꽉 움켜쥔다.

    **카인:** (독백, 혼잣말처럼) 대체… 뭘 깨워버린 거지?

    **[끝]**

  • 오컬트 호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최준영은 낡은 창고 구석에 쭈그려 앉아 먼지 쌓인 옛 서책을 뒤적였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뒤 이렇다 할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지방의 작은 향토사 연구소에서 임시직으로 일한 지도 어언 3년. 그마저도 최근엔 예산 문제로 잘려, 그는 이제 그저 백수에 가까운 상태였다. 남은 건 고작 허름한 고물상 아르바이트와 낡은 고서들을 뒤적이는 일. 하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삶의 유일한 활력이었다. 특히,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野史)나 잊힌 유적에 대한 이야기에는 병적으로 집착했다.

    오늘 그의 손에 들어온 책은 ‘지방 비사(地方秘史)’라는 제목의, 활자 인쇄조차 아닌 필사본이었다. 종이는 누렇게 바랬고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했지만, 준영은 마치 보물이라도 찾은 듯 심장이 뛰었다. 책의 중반부에 이르자, 한 구절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당골, 그곳은 망각된 시간의 저편. 천년의 세월이 그 위에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태양의 빛을 온전히 허락한 적 없으니… 결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의 흔적이 그곳에 잠들어 있더라.」

    사당골. 이름은 익숙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줄 때 종종 등장했던, 마을 뒷산 깊은 곳에 있다는 전설 속의 장소. 오래된 절터나 작은 신당이 있을 거라 막연히 짐작만 할 뿐, 실제 그곳을 탐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반인의 발길이 닿지 않는 험준한 산세에 가려져, 그저 노인들의 옛이야기 속에나 존재하는 곳이었다.

    준영은 책을 덮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단순한 노인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필사본은 사당골이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어떤 강력한 ‘결계’로 봉인된 미지의 장소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이곳에서라면 그 지루하고 무의미한 삶에 한 줄기 빛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보다 더 강력한,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 같은 것을 느꼈다.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며칠 뒤, 준영은 최소한의 장비만을 챙겨 사당골로 향했다. 낡은 등산화와 닳은 배낭, 손전등과 작은 곡괭이가 전부였다. 휴대폰은 산 깊숙이 들어서자마자 먹통이 되었다. 숲은 짙었고, 나무들은 하늘을 가려 햇빛 한 줄기 비치지 않는 구간이 태반이었다. 축축한 흙냄새와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만이 그의 동반자였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옛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헤맸을까. 그는 갑자기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공기 자체가 달라진 듯했다. 서늘하고 무거웠으며, 마치 거대한 존재가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나뭇가지 사이로 빛이 완전히 사라진, 마치 검은 늪처럼 침묵하는 공간이 드러났다. 바로 그곳이었다. 사당골.

    오랜 수색 끝에, 그는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덩굴과 이끼로 뒤덮여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된 석축(石築). 자연의 일부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인공적으로 쌓은 흔적이 역력했다. 굳이 이렇게 깊은 산속에, 외부와 단절된 곳에 이런 건축물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 준영은 묘한 흥분과 함께 곡괭이로 덩굴을 걷어냈다. 덩굴 아래에는 마모되고 풍화된 돌문이 숨겨져 있었다. 문의 표면에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와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보는 순간,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엄습했다.

    돌문은 예상외로 쉽게 열렸다. 마치 누군가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어둠이 드러났다. 손전등을 켜자, 한 줄기 빛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간 갇혀 있던 공간을 비췄다. 내부는 경사진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벽면에는 기괴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일그러지고 뒤틀린 형상들. 그들은 마치 고통받는 듯했고, 어떤 존재를 숭배하는 듯했다. 준영은 불안감에 침을 꿀꺽 삼켰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복도의 끝, 지하 깊숙한 곳에 이르자 그는 작은 광장을 발견했다.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돌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붉은빛을 띠는 육각형의 보석이 얹혀 있었다. 보석은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희미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주변에는 촛불을 꽂았던 흔적과 함께 알 수 없는 동물의 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제단 뒤쪽 벽면에는 더욱 기괴하고 거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눈동자였지만, 수많은 겹을 이루고 있었고, 그 안에는 우주 전체가 담겨 있는 듯했다.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현기증이 느껴지는 형상이었다.

    준영은 홀린 듯 제단으로 다가갔다.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기운이 그의 손을 이끌었다. 따뜻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이질적인 감각.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보석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공간이 뒤틀렸다.

    “으악!”

    보석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붉은빛이 그의 온몸을 휘감았다. 빛과 함께 수많은 형상들이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인간의 비명,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소리, 피와 살이 찢기는 잔혹한 환영들… 그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깊고 어두우며, 동시에 수만 년의 세월을 품은 듯한 목소리.

    「…드디어, 왔는가. 나의 계승자여.」

    준영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보석은 붉게 빛나며 그의 혈관을 따라 심장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온몸의 세포가 뒤집히는 듯한 격통과 함께, 그의 눈빛이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 그의 육신은 더 이상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었다. 고대의 힘이, 망각된 존재가, 천년의 봉인을 깨고 그의 심장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홀로 떨고 있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엘리시움: 영원의 서

    ## 1화. 이방인의 그림자

    “접속하시겠습니까?”

    새하얀 공간 속에서 나직하고 부드러운 기계음이 귓가를 스쳤다. 현실의 무게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지후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뜨는 대신, 그가 애용하는 캡슐의 ‘수락’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별똥별 님, 엘리시움: 영원의 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 메시지와 함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언제나처럼 경이로웠다. 풀벌레 소리가 스며드는 싱그러운 바람,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발밑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 완벽한 오감 구현 기술은 매번 그를 현실의 갑갑함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이곳은 ‘엘리시움’, 지후에게는 또 다른 삶의 터전이자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의 캐릭터, ‘별똥별’은 길게 늘어뜨린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었다. ‘숲의 방랑자’라는 이름처럼, 간소한 가죽옷을 걸치고 허리춤에는 오래된 단검 하나를 차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초보자의 모습이었지만, 지후는 이 캐릭터에 애착이 많았다. 광활한 엘리시움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비밀을 찾아 헤매는 것이 그의 목표였으니까.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지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현재 위치는 초보자들이 처음 발을 들이는 ‘시작의 숲’ 변방이었다. 퀘스트를 따라 몬스터를 잡고 아이템을 모으는 것에는 이미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가 찾는 것은 ‘이야기’였다. 게임 시스템이 정해놓은 경로를 벗어나, 이 세계가 품고 있는 미지의 이야기를 파헤치는 것. 그것이 별똥별의 진정한 모험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들뜬 모험가들의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지후는 익숙하게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반적인 필드 몬스터 대신, 그는 숲의 풀잎 하나, 나무껍질 하나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때로는 희귀한 약초를 발견하기도 했고, 때로는 시스템에 기록되지 않은 오래된 유적의 흔적을 찾기도 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숲의 기운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들은 더욱 울창해지고, 햇빛조차 제대로 비치지 않는 음습한 골짜기가 나타났다. 게임 내에서는 ‘잊혀진 골짜기’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몬스터 레벨이 급격히 상승하고, 간혹 네임드 몬스터가 출현하여 초보자들은 물론 어지간한 중급 모험가들에게도 기피 대상 1호인 곳. 하지만 지후는 그런 경고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위험한 곳일수록 숨겨진 이야기가 많았으니까.

    “흐음… 퀘스트 표시는 없군.”

    맵을 띄워 봐도 잊혀진 골짜기는 퀘스트 아이콘 하나 없이 붉은색 경고 구역으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그 말은 곧,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숨기려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직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지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꽃향기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숲은 어두컴컴했고, 오래된 이끼 낀 나무뿌리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던 중, 지후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숲속 깊은 곳, 거대한 암벽 한쪽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뭉쳐진 듯한 영롱한 빛이었다. 지후는 조심스럽게 빛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암벽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만한 좁고 어두운 틈이 있었다. 그 틈새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시스템에는 없는 곳인데.”

    지후는 손에 든 단검을 바싹 쥐었다.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그는 좁은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몸이 완전히 통과하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어둡고 축축했던 바깥과는 달리, 동굴 안은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천장과 벽면에는 수많은 결정들이 박혀 있었고, 그 결정들에서는 푸른색, 보라색, 은색 등 다채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동굴 중앙에는 투명한 물이 고인 작은 연못이 있었고, 연못 위로는 보름달처럼 둥글고 밝은 빛이 떠 있었다. 그 빛은 살아있는 듯 일렁이며 동굴 전체를 신비롭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못가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길고 은빛 머리카락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연못 수면에 닿을 듯했고, 흰 피부는 달빛 아래서 투명하게 빛났다. 등 뒤에는 섬세하고 거대한 날개가 접혀 있었는데, 나비의 날개와 흡사했지만, 투명하면서도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그림으로도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 동굴의 신비로움을 완성하는 듯했다.

    지후는 숨을 꾹 참았다. 움직일 수도, 소리 낼 수도 없었다. 시스템이 생성한 NPC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너무나도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녀는 연못의 물에 손가락을 담그고 있었다. 물에 닿는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물결이 일었고, 그 물결은 빛을 머금은 채 동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녀의 옆모습은 묘한 슬픔을 담고 있는 듯했다. 지후는 그녀가 이 게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엘프나 요정과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직감했다. 어쩌면, 이 엘리시움 세계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혹은 존재가 철저히 숨겨져야 하는, ‘이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였다. 연못에 담겨 있던 그녀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그녀의 시선이 마치 지후의 존재를 느낀 것처럼 고요히 이쪽으로 향했다. 투명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지후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동자에는 놀라움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심연과도 같은 깊은 호기심만이 서려 있었다.

    그 순간, 지후는 현실에서의 그 어떤 충격보다도 강렬한 전율을 느꼈다. 게임이라는 허상 속에서, 이토록 강렬한 감정의 파동이 자신을 덮쳐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지후는 그녀가 자신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지후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게임 시스템이 지정한 ‘적대’ 몬스터가 주는 위협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 자체에 대한 경고였다. 이곳은 그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곳이었고, 그녀는 그가 마주쳐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잊혀진 골짜기의 어둠 속에서, 엘리시움의 모든 규칙을 벗어난 듯한 이방인의 그림자.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미스터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작은 조각 같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금지된 영역, 금지된 존재. 이 모든 경고들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는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끌림으로 변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소리 없는 질문이 그의 입술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답하듯, 동굴 전체를 비추던 보름달 같은 빛이 강렬하게 섬광을 터뜨렸다. 지후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휩싸였다.

    이것은 단순한 게임 오버가 아닐 터였다. 이 만남은, 분명.

    새로운 시작이었다.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균열

    김현우는 익숙한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비명은 물론, 그의 것이 아니었다. 지친 몸으로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아파트 밖 도시는 밤늦도록 꺼질 줄 모르는 생명력으로 거대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 비명은 분명 아래층이나 옆 동에서 들려온 것이리라. 오늘도 야근이었다. 낡은 원목 식탁 위에는 어제 먹다 남긴 인스턴트 커피 잔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는 새벽 3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빈 공간에선 맥주 캔 몇 개만이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혀끝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현우는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한 번 깨어난 잠은 좀처럼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주방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숨을 멈췄다. 도둑? 그러나 소리는 너무나 작고, 마치 유리잔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경쾌한 소리였다. 그는 귀를 기울였지만, 이내 도시의 웅성거림에 묻혀버렸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현우는 출근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젯밤 분명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우유팩이 놓여 있었다. 뚜껑은 비스듬히 열린 채였다.
    “내가 잠결에 꺼내놨었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우유팩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어제 피곤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 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사소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출근하기 전 분명 닫아두었던 창문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세탁기에 돌려둔 양말 한 짝이 사라졌다가 엉뚱하게 거실 한복판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욕실 거울에 김이 서리면,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려다 만 듯한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현우는 처음엔 스스로의 건망증을 탓했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가 기억력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어느 날 저녁, 현우는 늦게까지 TV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맘에 드는 영화를 발견하고는 잠시 집중했다. 그때, 방 구석에 놓아둔 작은 테이블 위의 컵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현우는 눈을 비볐다. “내가 너무 마셨나?”
    그는 손을 뻗어 컵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컵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리듯 다시 스르륵, 원래 위치에서 몇 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현우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술기운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는 숨죽인 채 컵을 응시했다. 컵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누구… 없어요?”
    낮게 속삭이듯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도시의 희미한 웅성거림만이 밤의 장막을 뚫고 들어올 뿐이었다. 현우는 그날 밤, 잠 못 이루고 아침을 맞았다.

    공포는 사소한 균열에서 시작되어 점차 거대한 틈으로 벌어졌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튼 것도, 창문을 연 것도 아니었다. 마치 차가운 손이 등골을 스치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가끔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낮은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의미 없는 소음이었지만, 현우의 신경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휴대폰으로 아파트 내부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거실, 주방, 침실… 밤새도록 녹화 버튼을 눌러두었다. 그러나 다음 날 확인한 영상에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았다. 카메라를 설치해둔 이후로 기묘한 현상들이 잠시 멈춘 듯 보였다. 현우는 안도하면서도 묘한 허탈감을 느꼈다. 자신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해야 할까?

    안심도 잠시였다.
    어느 날 밤, 현우는 평소처럼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불은 꺼져 있었고, 방 안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침대 발치 쪽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스스슥… 득득…
    마치 무언가 딱딱한 것이 바닥을 긁으며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는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소리는 점점 현우의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스스스슥… 득득…
    이제는 그의 발치에 멈춰 선 것 같았다. 현우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때, 이불 위로 뭔가 묵직한 것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차가운 돌덩이라도 던져진 듯한 감각이었다.
    현우는 용기를 냈다.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살짝 걷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그의 열쇠였다. 아침에 분명 현관 신발장 위에 두었던 차 키와 집 열쇠 뭉치.
    하지만 열쇠는 지금, 그의 침대 이불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열쇠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눈앞에서 아주 느리게, 그러나 명확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빙글, 빙글…
    현우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는 이제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열쇠는 계속해서 회전했다. 어둠 속에서 금속성 광택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마치 그를 비웃는 듯이.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온몸의 모공이 열리는 듯한 감각.
    차가움은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마치 수만 년 된 얼음 동굴에 들어선 듯, 모든 생명이 얼어붙을 것 같은 원초적인 냉기였다.
    그리고 그 차가움 속에서, 알 수 없는 형체가 방 한가운데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형체는 검은 안개 같기도 했고, 연기 같기도 했다. 뚜렷한 실루엣은 없었으나, 거대한 기운이 현우를 짓눌렀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주 오래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현우는 겨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 순간, 회전하던 열쇠가 엄청난 속도로 그의 머리 위로 날아와 벽에 **탕!** 하고 부딪혔다.
    벽에 부딪힌 열쇠는 다시 튕겨 나와 침대 발치에 뚝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방 한가운데를 가득 채우고 있던 검은 형체가 스르륵 사라졌다.
    방 안의 냉기도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현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벽에 부딪혀 생긴 희미한 흔적을 만졌다.
    환각이 아니었다. 꿈도 아니었다.
    이 아파트에는, 그와 함께, 무언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사소한 장난으로 그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무엇을? 왜?
    이 아파트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잿빛 도시의 숨소리

    바람은 차가웠지만, 등에 짊어진 낡은 배낭의 무게는 여전히 등줄기에 땀을 배어 나오게 했다. 현우는 한 손에 녹슬었지만 날카롭게 갈아놓은 마체테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폐허가 된 건물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멘트 조각과 유리 파편이 굴러다니는 거리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사흘째였다. 오른쪽 허벅지에 난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고, 미열이 자꾸만 온몸을 끈적하게 만들었다. 덧나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구해야 할 건 소독약과 항생제, 그리고 깨끗한 붕대였다. 어제 지도 조각에서 발견한 ‘희망 복지 센터’라는 곳에 작은 의무실이 딸려 있었다는 정보를 기억해냈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역설적인 이름의 건물이었다.

    “젠장….”

    말라붙은 목소리가 찢어지듯 튀어나왔다. 텁텁한 입안을 침으로 겨우 적시며 현우는 낡은 운동화로 부서진 보도블록을 밟았다. 온 신경은 청각에 집중되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신음소리, 알 수 없는 금속성 마찰음,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한, *침묵*. 고요함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법이었다. 그건 언제든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 폭풍전야와 같았다.

    골목을 돌아 나오자, 허물어진 육교 아래로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이 보였다. 건물의 간판은 반쯤 부서져 ‘희망 복지 센터’라는 글자 대신 ‘희망 복’ 정도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 있었고, 마치 거대한 괴물의 눈처럼 검고 비어 있었다. 입구 쪽에는 부패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일반 좀비에게 당한 건 아닌 듯했다. 아마도 약탈자들이 이미 한바탕 휩쓸고 간 흔적일 터였다.

    현우는 건물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창문을 통해 내부를 살펴보려 했지만, 먼지와 이물질로 뒤덮여 안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후문 쪽으로 접근했을 때, 금속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녹슨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를 낼까 봐 최대한 조심하며 문을 밀었다.

    안은 예상대로 어두웠다. 공기 중에는 곰팡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희미한 시체 썩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체테를 든 손에 힘을 주고, 현우는 천천히 발을 들였다.

    “쿨럭… 쿨럭….”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다행히 주위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배낭에서 낡은 손전등을 꺼내 불을 켰다. 좁은 빛줄기가 복도를 가로지르며 먼지 구름을 헤치고 나아갔다. 벽에는 한때 아이들의 그림이 붙어 있었을 법한 흔적만 남아 있었다. 복지 센터였으니, 아이들을 위한 공간도 있었을 것이다. 끔찍한 상상력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과연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의무실은 보통 1층 아니면 2층에 있었지.’

    현우는 신중하게 발을 내디뎠다. 1층을 수색하기로 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방문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문패는 대부분 떨어져 나가거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몇 개의 방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약탈자들이 쓸어갔거나, 이곳에서 생존자들이 잠시 머물렀을 수도 있다.

    세 번째 문 앞에서 현우는 멈춰 섰다. 문패가 희미하게 ‘의무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현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안에서 뭔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주 미세한, 무언가 긁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손잡이는 차가웠다. 천천히 돌리자, 삐걱거리는 소리 대신 눅눅한 마찰음이 들렸다. 문을 아주 살짝 열고 틈새로 손전등 빛을 비췄다.

    안은 어둡고 혼란스러웠다. 진열장은 부서져 있었고, 약품 박스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희뿌연 환자복을 입은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그것은 머리를 푹 숙이고는 무언가를 뜯어 먹고 있었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현우의 귓가에 박혔다. 분명히, 아직 살아있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좀비였다.

    현우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망설일 틈도 없이 그는 문을 활짝 열고 방으로 뛰어들었다. 놈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현우는 마체테를 휘둘렀다. 썩은 살점이 튀었다. 놈의 몸이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크어어어어!”

    놈의 입에서 끔찍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놈의 등 뒤에 있던 진료대 아래에서 또 다른 좀비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며 공격을 피했다. 마체테가 놈의 팔을 스치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두 마리. 동시에 상대하기엔 좁은 공간이었다. 현우는 뒷걸음질 치며 방 한가운데로 물러섰다. 첫 번째 놈은 느렸지만 끈질겼고, 두 번째 놈은 빠르고 민첩했다. 전형적인 조합이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우는 주변을 살폈다. 부서진 진열장 조각, 널브러진 의자, 그리고 바닥에 뒹구는 링거대. 링거대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계산이 번개처럼 스쳤다.

    첫 번째 놈이 느릿하게 다가오는 순간, 현우는 링거대를 발로 걷어차 옆으로 쓰러트렸다. 둔탁한 금속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 소리에 이끌린 빠른 놈이 링거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체테를 휘둘러 첫 번째 놈의 목을 깊게 베었다. 뼈와 살이 끊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굴렀다.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현우는 피를 뒤집어쓴 채 빠르게 자세를 고쳤다. 이제 남은 건 한 마리였다.

    링거대에 걸려 넘어진 빠른 놈은 바닥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현우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놈이 겨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마체테를 놈의 머리에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으읍….”

    목에서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체테를 빼내자 놈은 미동도 없이 축 늘어졌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고, 썩은 내가 더욱 진하게 풍겨왔다. 현우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고, 손전등으로 방을 비췄다.

    진열장은 대부분 비어 있거나 부서져 있었지만, 한쪽 구석에 놓인 약품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먼지를 털어내자, ‘응급 키트’라고 적힌 글씨가 보였다.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거즈, 붕대, 소독약, 그리고 항생제 몇 알이 들어 있었다. 완벽했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 모든 것을 배낭에 챙겨 넣고, 현우는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나설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어쩌면 그 두 마리가 이곳에 숨어있던 마지막 좀비였을지도 몰랐다. 그는 잿빛 하늘 아래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석양이 지평선 너머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폐허가 된 아파트 건물 옥상, 그가 임시로 머무는 은신처였다. 녹슨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현우는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불빛 하나 없는 도시, 침묵 속에 잠겨 있는 거대한 그림자.

    배낭에서 응급 키트를 꺼내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따끔거렸지만, 전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또 하루를 벌었네.”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내일은 또 무엇을 찾아 헤매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다시 해가 뜨면, 또다시 싸우고, 또다시 살아남아야 할 뿐이었다. 끝없는 생존의 굴레 속에서, 그는 잿빛 도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또 하나의 밤을 맞았다.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잿빛 도시의 숨소리

    바람은 차가웠지만, 등에 짊어진 낡은 배낭의 무게는 여전히 등줄기에 땀을 배어 나오게 했다. 현우는 한 손에 녹슬었지만 날카롭게 갈아놓은 마체테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폐허가 된 건물 벽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멘트 조각과 유리 파편이 굴러다니는 거리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사흘째였다. 오른쪽 허벅지에 난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고, 미열이 자꾸만 온몸을 끈적하게 만들었다. 덧나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구해야 할 건 소독약과 항생제, 그리고 깨끗한 붕대였다. 어제 지도 조각에서 발견한 ‘희망 복지 센터’라는 곳에 작은 의무실이 딸려 있었다는 정보를 기억해냈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도시에서, 역설적인 이름의 건물이었다.

    “젠장….”

    말라붙은 목소리가 찢어지듯 튀어나왔다. 텁텁한 입안을 침으로 겨우 적시며 현우는 낡은 운동화로 부서진 보도블록을 밟았다. 온 신경은 청각에 집중되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신음소리, 알 수 없는 금속성 마찰음,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한, *침묵*. 고요함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법이었다. 그건 언제든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는 폭풍전야와 같았다.

    골목을 돌아 나오자, 허물어진 육교 아래로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이 보였다. 건물의 간판은 반쯤 부서져 ‘희망 복지 센터’라는 글자 대신 ‘희망 복’ 정도만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 있었고, 마치 거대한 괴물의 눈처럼 검고 비어 있었다. 입구 쪽에는 부패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일반 좀비에게 당한 건 아닌 듯했다. 아마도 약탈자들이 이미 한바탕 휩쓸고 간 흔적일 터였다.

    현우는 건물 주위를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창문을 통해 내부를 살펴보려 했지만, 먼지와 이물질로 뒤덮여 안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후문 쪽으로 접근했을 때, 금속 문이 조금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녹슨 경첩이 삐걱이는 소리를 낼까 봐 최대한 조심하며 문을 밀었다.

    안은 예상대로 어두웠다. 공기 중에는 곰팡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희미한 시체 썩는 냄새가 섞여 있었다. 마체테를 든 손에 힘을 주고, 현우는 천천히 발을 들였다.

    “쿨럭… 쿨럭….”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지만, 다행히 주위에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배낭에서 낡은 손전등을 꺼내 불을 켰다. 좁은 빛줄기가 복도를 가로지르며 먼지 구름을 헤치고 나아갔다. 벽에는 한때 아이들의 그림이 붙어 있었을 법한 흔적만 남아 있었다. 복지 센터였으니, 아이들을 위한 공간도 있었을 것이다. 끔찍한 상상력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과연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의무실은 보통 1층 아니면 2층에 있었지.’

    현우는 신중하게 발을 내디뎠다. 1층을 수색하기로 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방문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문패는 대부분 떨어져 나가거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몇 개의 방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안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약탈자들이 쓸어갔거나, 이곳에서 생존자들이 잠시 머물렀을 수도 있다.

    세 번째 문 앞에서 현우는 멈춰 섰다. 문패가 희미하게 ‘의무실’이라고 적혀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현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안에서 뭔가 인기척이 느껴지는 듯했다. 아주 미세한, 무언가 긁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손잡이는 차가웠다. 천천히 돌리자, 삐걱거리는 소리 대신 눅눅한 마찰음이 들렸다. 문을 아주 살짝 열고 틈새로 손전등 빛을 비췄다.

    안은 어둡고 혼란스러웠다. 진열장은 부서져 있었고, 약품 박스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희뿌연 환자복을 입은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그것은 머리를 푹 숙이고는 무언가를 뜯어 먹고 있었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현우의 귓가에 박혔다. 분명히, 아직 살아있는 것이었다. ‘살아있는’ 좀비였다.

    현우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망설일 틈도 없이 그는 문을 활짝 열고 방으로 뛰어들었다. 놈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현우는 마체테를 휘둘렀다. 썩은 살점이 튀었다. 놈의 몸이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크어어어어!”

    놈의 입에서 끔찍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놈의 등 뒤에 있던 진료대 아래에서 또 다른 좀비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빠르고 위협적이었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며 공격을 피했다. 마체테가 놈의 팔을 스치며 깊은 상처를 남겼다.

    두 마리. 동시에 상대하기엔 좁은 공간이었다. 현우는 뒷걸음질 치며 방 한가운데로 물러섰다. 첫 번째 놈은 느렸지만 끈질겼고, 두 번째 놈은 빠르고 민첩했다. 전형적인 조합이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우는 주변을 살폈다. 부서진 진열장 조각, 널브러진 의자, 그리고 바닥에 뒹구는 링거대. 링거대에 시선이 닿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계산이 번개처럼 스쳤다.

    첫 번째 놈이 느릿하게 다가오는 순간, 현우는 링거대를 발로 걷어차 옆으로 쓰러트렸다. 둔탁한 금속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그 소리에 이끌린 빠른 놈이 링거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마체테를 휘둘러 첫 번째 놈의 목을 깊게 베었다. 뼈와 살이 끊어지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굴렀다.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현우는 피를 뒤집어쓴 채 빠르게 자세를 고쳤다. 이제 남은 건 한 마리였다.

    링거대에 걸려 넘어진 빠른 놈은 바닥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현우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놈이 겨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마체테를 놈의 머리에 사정없이 박아 넣었다.

    “으읍….”

    목에서 신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체테를 빼내자 놈은 미동도 없이 축 늘어졌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었고, 썩은 내가 더욱 진하게 풍겨왔다. 현우는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고, 손전등으로 방을 비췄다.

    진열장은 대부분 비어 있거나 부서져 있었지만, 한쪽 구석에 놓인 약품 상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먼지를 털어내자, ‘응급 키트’라고 적힌 글씨가 보였다.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거즈, 붕대, 소독약, 그리고 항생제 몇 알이 들어 있었다. 완벽했다. 정말로 운이 좋았다. 모든 것을 배낭에 챙겨 넣고, 현우는 더 이상 지체할 것 없이 의무실을 빠져나왔다.

    건물을 나설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없었다. 어쩌면 그 두 마리가 이곳에 숨어있던 마지막 좀비였을지도 몰랐다. 그는 잿빛 하늘 아래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석양이 지평선 너머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폐허가 된 아파트 건물 옥상, 그가 임시로 머무는 은신처였다. 녹슨 철제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현우는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봤다. 불빛 하나 없는 도시, 침묵 속에 잠겨 있는 거대한 그림자.

    배낭에서 응급 키트를 꺼내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 따끔거렸지만, 전보다는 훨씬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또 하루를 벌었네.”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내일은 또 무엇을 찾아 헤매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다시 해가 뜨면, 또다시 싸우고, 또다시 살아남아야 할 뿐이었다. 끝없는 생존의 굴레 속에서, 그는 잿빛 도시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또 하나의 밤을 맞았다.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균열

    김현우는 익숙한 비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비명은 물론, 그의 것이 아니었다. 지친 몸으로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아파트 밖 도시는 밤늦도록 꺼질 줄 모르는 생명력으로 거대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저 비명은 분명 아래층이나 옆 동에서 들려온 것이리라. 오늘도 야근이었다. 낡은 원목 식탁 위에는 어제 먹다 남긴 인스턴트 커피 잔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는 새벽 3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느릿하게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빈 공간에선 맥주 캔 몇 개만이 쓸쓸하게 놓여 있었다. 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혀끝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현우는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한 번 깨어난 잠은 좀처럼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주방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숨을 멈췄다. 도둑? 그러나 소리는 너무나 작고, 마치 유리잔이 굴러떨어지는 듯한 경쾌한 소리였다. 그는 귀를 기울였지만, 이내 도시의 웅성거림에 묻혀버렸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현우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현우는 출근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젯밤 분명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우유팩이 놓여 있었다. 뚜껑은 비스듬히 열린 채였다.
    “내가 잠결에 꺼내놨었나?”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우유팩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어제 피곤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 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사소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출근하기 전 분명 닫아두었던 창문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세탁기에 돌려둔 양말 한 짝이 사라졌다가 엉뚱하게 거실 한복판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욕실 거울에 김이 서리면,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려다 만 듯한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현우는 처음엔 스스로의 건망증을 탓했다.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가 기억력에 영향을 미치는 걸까?

    어느 날 저녁, 현우는 늦게까지 TV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맘에 드는 영화를 발견하고는 잠시 집중했다. 그때, 방 구석에 놓아둔 작은 테이블 위의 컵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현우는 눈을 비볐다. “내가 너무 마셨나?”
    그는 손을 뻗어 컵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하지만 컵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리듯 다시 스르륵, 원래 위치에서 몇 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동했다.
    현우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술기운이 단번에 사라졌다.
    그는 숨죽인 채 컵을 응시했다. 컵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는 고요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누구… 없어요?”
    낮게 속삭이듯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도시의 희미한 웅성거림만이 밤의 장막을 뚫고 들어올 뿐이었다. 현우는 그날 밤, 잠 못 이루고 아침을 맞았다.

    공포는 사소한 균열에서 시작되어 점차 거대한 틈으로 벌어졌다.
    그는 혼자 있을 때면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에어컨을 튼 것도, 창문을 연 것도 아니었다. 마치 차가운 손이 등골을 스치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가끔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낮은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분명 의미 없는 소음이었지만, 현우의 신경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는 결국 휴대폰으로 아파트 내부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거실, 주방, 침실… 밤새도록 녹화 버튼을 눌러두었다. 그러나 다음 날 확인한 영상에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았다. 카메라를 설치해둔 이후로 기묘한 현상들이 잠시 멈춘 듯 보였다. 현우는 안도하면서도 묘한 허탈감을 느꼈다. 자신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해야 할까?

    안심도 잠시였다.
    어느 날 밤, 현우는 평소처럼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불은 꺼져 있었고, 방 안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침대 발치 쪽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스스슥… 득득…
    마치 무언가 딱딱한 것이 바닥을 긁으며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는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소리는 점점 현우의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스스스슥… 득득…
    이제는 그의 발치에 멈춰 선 것 같았다. 현우는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때, 이불 위로 뭔가 묵직한 것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차가운 돌덩이라도 던져진 듯한 감각이었다.
    현우는 용기를 냈다.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살짝 걷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물체가 보였다.
    그것은 그의 열쇠였다. 아침에 분명 현관 신발장 위에 두었던 차 키와 집 열쇠 뭉치.
    하지만 열쇠는 지금, 그의 침대 이불 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열쇠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눈앞에서 아주 느리게, 그러나 명확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빙글, 빙글…
    현우는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는 이제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열쇠는 계속해서 회전했다. 어둠 속에서 금속성 광택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마치 그를 비웃는 듯이.

    그 순간, 방 안의 공기가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온몸의 모공이 열리는 듯한 감각.
    차가움은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마치 수만 년 된 얼음 동굴에 들어선 듯, 모든 생명이 얼어붙을 것 같은 원초적인 냉기였다.
    그리고 그 차가움 속에서, 알 수 없는 형체가 방 한가운데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형체는 검은 안개 같기도 했고, 연기 같기도 했다. 뚜렷한 실루엣은 없었으나, 거대한 기운이 현우를 짓눌렀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주 오래된 무언가처럼 느껴졌다.
    현우는 겨우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 순간, 회전하던 열쇠가 엄청난 속도로 그의 머리 위로 날아와 벽에 **탕!** 하고 부딪혔다.
    벽에 부딪힌 열쇠는 다시 튕겨 나와 침대 발치에 뚝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방 한가운데를 가득 채우고 있던 검은 형체가 스르륵 사라졌다.
    방 안의 냉기도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현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벽에 부딪혀 생긴 희미한 흔적을 만졌다.
    환각이 아니었다. 꿈도 아니었다.
    이 아파트에는, 그와 함께, 무언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더 이상 사소한 장난으로 그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무엇을? 왜?
    이 아파트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 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엘리시움: 영원의 서

    ## 1화. 이방인의 그림자

    “접속하시겠습니까?”

    새하얀 공간 속에서 나직하고 부드러운 기계음이 귓가를 스쳤다. 현실의 무게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답답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김지후는 가볍게 눈을 감았다 뜨는 대신, 그가 애용하는 캡슐의 ‘수락’ 버튼을 가볍게 눌렀다.

    “별똥별 님, 엘리시움: 영원의 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 메시지와 함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언제나처럼 경이로웠다. 풀벌레 소리가 스며드는 싱그러운 바람,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발밑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 완벽한 오감 구현 기술은 매번 그를 현실의 갑갑함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이끌었다. 이곳은 ‘엘리시움’, 지후에게는 또 다른 삶의 터전이자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의 캐릭터, ‘별똥별’은 길게 늘어뜨린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청년이었다. ‘숲의 방랑자’라는 이름처럼, 간소한 가죽옷을 걸치고 허리춤에는 오래된 단검 하나를 차고 있었다. 흔하디흔한 초보자의 모습이었지만, 지후는 이 캐릭터에 애착이 많았다. 광활한 엘리시움에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비밀을 찾아 헤매는 것이 그의 목표였으니까.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지후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현재 위치는 초보자들이 처음 발을 들이는 ‘시작의 숲’ 변방이었다. 퀘스트를 따라 몬스터를 잡고 아이템을 모으는 것에는 이미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가 찾는 것은 ‘이야기’였다. 게임 시스템이 정해놓은 경로를 벗어나, 이 세계가 품고 있는 미지의 이야기를 파헤치는 것. 그것이 별똥별의 진정한 모험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들뜬 모험가들의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지후는 익숙하게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일반적인 필드 몬스터 대신, 그는 숲의 풀잎 하나, 나무껍질 하나의 디테일까지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때로는 희귀한 약초를 발견하기도 했고, 때로는 시스템에 기록되지 않은 오래된 유적의 흔적을 찾기도 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숲의 기운이 점점 짙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무들은 더욱 울창해지고, 햇빛조차 제대로 비치지 않는 음습한 골짜기가 나타났다. 게임 내에서는 ‘잊혀진 골짜기’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몬스터 레벨이 급격히 상승하고, 간혹 네임드 몬스터가 출현하여 초보자들은 물론 어지간한 중급 모험가들에게도 기피 대상 1호인 곳. 하지만 지후는 그런 경고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위험한 곳일수록 숨겨진 이야기가 많았으니까.

    “흐음… 퀘스트 표시는 없군.”

    맵을 띄워 봐도 잊혀진 골짜기는 퀘스트 아이콘 하나 없이 붉은색 경고 구역으로만 표시되어 있었다. 그 말은 곧,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스템이 의도적으로 숨기려 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직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이었다. 지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꽃향기가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숲은 어두컴컴했고, 오래된 이끼 낀 나무뿌리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던 중, 지후의 시야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숲속 깊은 곳, 거대한 암벽 한쪽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밤하늘의 별들이 뭉쳐진 듯한 영롱한 빛이었다. 지후는 조심스럽게 빛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암벽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만한 좁고 어두운 틈이 있었다. 그 틈새에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시스템에는 없는 곳인데.”

    지후는 손에 든 단검을 바싹 쥐었다.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지만, 호기심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그는 좁은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몸이 완전히 통과하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숨을 멎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어둡고 축축했던 바깥과는 달리, 동굴 안은 마치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천장과 벽면에는 수많은 결정들이 박혀 있었고, 그 결정들에서는 푸른색, 보라색, 은색 등 다채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동굴 중앙에는 투명한 물이 고인 작은 연못이 있었고, 연못 위로는 보름달처럼 둥글고 밝은 빛이 떠 있었다. 그 빛은 살아있는 듯 일렁이며 동굴 전체를 신비롭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못가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길고 은빛 머리카락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연못 수면에 닿을 듯했고, 흰 피부는 달빛 아래서 투명하게 빛났다. 등 뒤에는 섬세하고 거대한 날개가 접혀 있었는데, 나비의 날개와 흡사했지만, 투명하면서도 영롱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세상의 어떤 그림으로도 담아낼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이 동굴의 신비로움을 완성하는 듯했다.

    지후는 숨을 꾹 참았다. 움직일 수도, 소리 낼 수도 없었다. 시스템이 생성한 NPC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생생하고, 너무나도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녀는 연못의 물에 손가락을 담그고 있었다. 물에 닿는 그녀의 손끝에서 작은 물결이 일었고, 그 물결은 빛을 머금은 채 동굴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녀의 옆모습은 묘한 슬픔을 담고 있는 듯했다. 지후는 그녀가 이 게임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엘프나 요정과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직감했다. 어쩌면, 이 엘리시움 세계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혹은 존재가 철저히 숨겨져야 하는, ‘이종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때였다. 연못에 담겨 있던 그녀의 손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그녀의 시선이 마치 지후의 존재를 느낀 것처럼 고요히 이쪽으로 향했다. 투명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지후를 똑바로 응시했다. 눈동자에는 놀라움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직 심연과도 같은 깊은 호기심만이 서려 있었다.

    그 순간, 지후는 현실에서의 그 어떤 충격보다도 강렬한 전율을 느꼈다. 게임이라는 허상 속에서, 이토록 강렬한 감정의 파동이 자신을 덮쳐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지후는 그녀가 자신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지후는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게임 시스템이 지정한 ‘적대’ 몬스터가 주는 위협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 자체에 대한 경고였다. 이곳은 그가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곳이었고, 그녀는 그가 마주쳐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잊혀진 골짜기의 어둠 속에서, 엘리시움의 모든 규칙을 벗어난 듯한 이방인의 그림자.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미스터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작은 조각 같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금지된 영역, 금지된 존재. 이 모든 경고들이 그의 마음에 새겨지는 동시에, 걷잡을 수 없는 끌림으로 변하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소리 없는 질문이 그의 입술을 맴돌았다. 그리고 그의 질문에 답하듯, 동굴 전체를 비추던 보름달 같은 빛이 강렬하게 섬광을 터뜨렸다. 지후의 시야가 새하얗게 변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한, 아찔한 감각에 휩싸였다.

    이것은 단순한 게임 오버가 아닐 터였다. 이 만남은, 분명.

    새로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