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이 희건

  • 따뜻한 시골 마을의 비밀 – 제228화

    오래된 진실의 서막

    할머니의 낡은 서랍장 깊숙한 곳, 지훈의 손이 닿는 모든 나무 틈새에서 희미한 먼지 내음과 함께 지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며칠째 밤낮으로 집 안을 뒤지고 있었지만, 그가 찾던 ‘무언가’는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남겼던 알 수 없는 한마디, “달빛 샘의 오래된 속삭임에 귀 기울여라…” 그 말이 지훈의 마음을 짓눌렀다. 이 평화롭고 따뜻해 보이는 마을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불길한 예감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선명해졌다.

    거친 손으로 서랍장 밑바닥을 훑던 지훈은 문득 손가락 끝에 닿는 미세한 틈새를 느꼈다. 낡은 나뭇결 사이로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작은 틈. 조심스럽게 힘을 주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감춰진 바닥판이 들렸다. 그 안에는 먼지 앉은 작은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자, 오래된 종이 냄새와 함께 색 바랜 끈으로 묶인 편지 뭉치가 드러났다. 할머니의 필체였다.

    지훈은 침을 꿀꺽 삼키며 첫 번째 편지를 펼쳤다. 날짜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있었다. 편지는 할머니가 젊은 시절, 마을의 오랜 친구에게 보낸 것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글자 한 자 한 자를 따라가던 지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편지 속에는 ‘달빛 샘’의 충격적인 진실이 담겨 있었다.

    오래전, 마을 사람들은 달빛 샘이 병을 치유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실제로는 마을의 번영을 위해 샘 주변에 심었던 특별한 약초가 샘물을 오염시켰고, 이 물을 마신 몇몇 사람들이 이유 모를 병에 시달리다 결국 목숨을 잃었다는 내용이었다. 그중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는 ‘소연’이라는 이름의 젊은 여인이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소연의 병세가 악화되자, 외부의 조사가 들어올 것을 두려워했다. 마을의 평판과 경제를 지키기 위해, 그들은 끔찍한 선택을 했다. 소연의 가족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이 사건을 영원히 함구하고 마을을 떠나게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을 묻기 위해 모든 마을 사람들이 침묵의 맹세를 했다. 할머니는 그 맹세 속에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노라 고백하고 있었다.

    지훈의 손에서 편지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돌덩이가 굴러떨어지는 듯했다. 그가 평생 느꼈던 이 마을의 따뜻함은, 바로 이 잔혹한 침묵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지켜온 평화는 누군가의 희생을 덮은 거짓된 평화였다. 할머니의 고백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깊은 허무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창밖에는 해 질 녘 노을이 마을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평화로운 풍경이었겠지만, 지금 지훈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그 순간, 익숙한 그림자가 대문 앞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을의 최고 어른이자, 할머니와 가장 가깝게 지냈던 김 노인이었다. 김 노인의 얼굴은 늘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지훈의 눈에 비친 김 노인의 얼굴은 어딘가 모르게 깊은 수심과 감춰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김 노인의 온화한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그의 눈빛은 지훈의 손에 들린 편지 뭉치를 스치듯 보더니, 이내 깊고 알 수 없는 빛으로 변했다. 지훈은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이 따뜻한 시골 마을의 비밀은, 이제 비로소 지훈의 손에서 그 껍질을 깨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227화

    찬란했던 슬픔

    오랜 세월을 버텨온 낡은 일기장은 이제 몇 장 남지 않은 채, 지우의 손 안에서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었다. 희미한 잉크 자국마다 할머니, 순희의 젊은 날의 숨결이 깃들어 있었고, 그 이야기는 지우의 심장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오늘은 유난히 두툼하게 접힌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 안에는 바스락거리는 얇은 종이 한 장이 숨어 있었다. 빛바랜 편지였다.

    순희 할머니의 글씨체는 아니었다. 조금 더 굵고, 굳건하지만 떨림이 느껴지는 남자의 필체. 봉투도 없이 접혀 있던 그 편지에는 단 한 줄의 날짜만이 적혀 있었다. 1958년 가을, 단풍이 가장 붉게 타오르던 어느 날. 지우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일기장을 읽어오며 늘 궁금했던 이름, 흐릿하게 언급되다가 사라져버렸던 한 남자, 정우였다.

    지워지지 않는 이름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펼쳤다. 종이에서 희미하게 흙과 오래된 나무 향기가 나는 듯했다. 편지의 내용은 짧고, 절절했다.

    사랑하는 순희에게,
    부디 이 편지가 그대에게 닿을 때쯤이면, 나는 이미 멀리 떠나 있을 것이오. 그대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그대의 가족을 위한 희생은 숭고하며, 나는 그 앞에서 한낱 내 욕심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소. 허나, 나의 마음은 단 한 순간도 그대를 떠난 적이 없음을 알아주오. 우리가 함께 꿈꾸었던 그 모든 순간들이 내 생의 가장 찬란한 빛이었음을.
    부디 행복하시오. 비록 내가 그 행복의 곁에 없을지라도.
    영원히 그대를 사랑할 정우가.

    편지를 읽는 내내 지우의 눈가에는 뜨거운 물기가 차올랐다. 할머니의 일기장에는 정우라는 이름이 몇 번 스쳐 지나갔을 뿐, 그의 존재는 늘 안개에 싸여 있었다. 할머니는 그에 대해 단 한 번도 자세히 적지 않았다. 마치 그 이름이 주는 고통이 너무 커서, 차마 글로 옮길 수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이 짧은 편지 한 통이, 할머니의 평생을 관통한 애잔한 슬픔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움의 흔적

    지우는 편지를 가슴에 품고, 그 페이지에 이어지는 할머니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날 이후, 할머니가 쓴 짧은 몇 줄의 문장들이 찢어질 듯한 아픔을 담고 있었다.

    ‘그의 편지를 받고 나서, 나는 내가 살았던 것이 살아있던 것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심장이 없는 몸으로 어떻게 숨을 쉬었을까. 가슴을 찢는 고통보다 더한 것은, 내가 그에게 행복하라고 말해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내 행복은 이미 그와 함께 떠나버렸기에. 하지만 나의 가족을 위해, 나는 이 고통을 평생 짊어져야 한다.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리라. 다만, 나의 정우여, 부디 나의 마음만은 잊지 말아다오.’

    지우는 낡은 일기장을 덮었다. 오랜 세월 침묵했던 할머니의 비밀이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늘 강인하고 생활력 넘치던 할머니의 뒷모습에서 지우는 이유 모를 쓸쓸함을 느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눈빛에서 언뜻 보았던 깊은 우수가 바로 이것이었을까. 가족을 위해 자신의 가장 찬란했던 사랑을 포기해야 했던 한 여인의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가슴에 품고 평생을 살아온 흔적. 낡은 일기장과 빛바랜 편지 한 장이 할머니의 삶 전체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지우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이토록 고요하고 깊은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가, 자신의 할머니의 삶 속에 숨어 있었다니. 지우는 일기장을 꼭 끌어안으며, 말없이 울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의 슬픔이, 고스란히 지우의 가슴에 파고드는 밤이었다.

  •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226화

    찬란한 그림자

    지우는 낡은 일기장을 덮었다. 익숙한 페이지들 사이에서 그녀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는 듯했다. 지난 수많은 밤들, 일기장 속 할머니의 삶은 지우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기쁨과 슬픔, 작은 행복과 거대한 시련들이 지우의 마음을 채웠다. 하지만 오늘 밤은 유독 마음이 허했다. 마치 중요한 퍼즐 조각 하나가 계속 빠져 있는 기분이었다.

    책장 맨 아래, 가장 오래된 책들 사이에 놓여 있던 일기장을 다시 꺼내 들었다. 낡은 가죽 표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손때 묻은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던 지우의 손에 무언가 얇은 것이 느껴졌다. 표지 안쪽에 덧대어 놓은 듯한 작은 틈새. 그 안에서 바스러질 듯 얇은 종이 한 장이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페이지들과는 확연히 다른, 잉크가 번지고 종이 자체가 누렇게 변색된,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조각이었다. 날짜는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필체는 분명 할머니의 것이었다. 다만, 평소보다 훨씬 거칠고, 절박함이 묻어나는 글씨체였다.

    “1957년 겨울, 그 눈 오던 밤. 어린 영호의 손을 잡고 나는 밤새 걸었단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차가운 바람이 볼을 때리고 발은 얼어붙었지만, 마음은 타들어 가는 숯불 같았지. 이 작은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나는 세상 모든 것을 속여야 했다. 내 젊음, 내 사랑, 그리고 나의 모든 꿈까지도….”

    지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영호? 이 이름은….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어렸을 적, 명절 때마다 찾아오던 외가 쪽 먼 친척 아저씨의 이름이 영호였다. 늘 말없이 따뜻한 눈으로 지우를 바라보던,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던 그 아저씨. 할머니는 그 아저씨를 유독 아끼셨고, 지우의 엄마는 “우리 할머니가 잠시 맡아 키우셨던 분”이라고 얼버무렸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세상은 죄 없는 아이에게 손가락질할 것이고, 너의 어미는 너무 어려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을 터. 나는 너를 내 품에 안고 세상의 비난으로부터 숨겼다. 내가 너의 할머니가 되고, 네 어미의 언니가 되어 모든 것을 감당하리라 맹세했다. 내 아들아. 아니, 내 손자야… 이 모든 거짓이 너를 위한 것이었음을 언젠가는 알아주렴. 내 가슴에 묻은 이 이름, 영호.”

    지우의 손에서 종잇조각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눈물이 차올라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할머니가 숨겨온 이야기. 젊은 날, 세상의 시선과 싸우며 어린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던 거대한 사랑. 엄마의 언니가 되어… 그렇다면 영호는 사실 할머니의 자식이 아니라, 할머니의 자식, 즉 지우 엄마의 언니가 낳은 아이였던 걸까? 아니면 할머니의 자식이면서도, 할머니가 숨겨야만 했던 자식이었을까?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 모든 혼란 속에서도 명확하게 빛나는 것은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단순한 희생을 넘어선, 한 생명을 지키기 위한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투쟁이었다. 영호 아저씨의 늘 외로워 보이던 눈빛, 그리고 할머니의 깊은 슬픔이 이제야 이해되었다.

    지우는 낡은 액자 속 할머니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 속 할머니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지우는 이제 그 미소 속에 숨겨진 겹겹의 세월과 묵묵한 희생을 읽을 수 있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과 비밀을 넘어선, 찬란한 사랑의 그림자였다. 지우는 조용히 종잇조각을 다시 주워 들고, 할머니의 숨겨진 마음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제 이전과는 다른, 깊고 아련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 오래된 사진관에서 생긴 일 – 제225화

    오래된 사진관의 유리문 너머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스며들었다. 먼지 섞인 공기 속에서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은빛 입자들처럼 유영했다. 지훈은 익숙한 침묵 속에서 현상액 냄새와 낡은 종이 냄새를 맡으며 카메라 렌즈를 닦고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긴 이 공간은 그에게 단순한 일터가 아닌, 수많은 삶의 조각들이 스며든 거대한 기억의 상자였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오래도록 손대지 않았던 캐비닛 깊숙한 서랍을 정리해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서랍을 잡아당기자 켜켜이 쌓인 오래된 먼지가 훅 끼쳐왔다. 그 안에는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낡은 인화지 묶음과 빛바랜 명함들이 가득했다. 서랍 바닥까지 손을 뻗어 마지막 뭉치를 들어 올리자, 천 조각에 감싸인 무언가가 손에 잡혔다.

    조심스럽게 낡은 천을 풀자, 빛에 바래 검게 변한 필름 네거티브 뭉치가 나타났다. 지훈은 그것들을 하나씩 빛에 비춰보았다. 대부분은 흐릿하거나 너무 오래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 유독 한 장의 네거티브가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꽤 선명하게 찍힌 듯한 실루엣. 직감적으로 그는 이 필름이 무언가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음을 느꼈다.

    서둘러 암실로 들어갔다. 현상액에 필름을 담그고, 정착액에 옮기는 일련의 과정이 손에 익숙하게 흘러갔다. 희미했던 이미지들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숨을 죽이고 인화지를 트레이에 넣자, 붉은 암실등 아래에서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사진 속에는 한 젊은 여인과 어린 소녀가 있었다. 여인의 얼굴에는 깊은 슬픔이 드리워져 있었고, 소녀는 그 여인의 손을 꼭 잡은 채 어딘가를 불안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비록 흑백 사진이었지만, 그들의 감정은 선명하게 전달되어 지훈의 가슴을 저몄다.

    사진을 집어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던 지훈의 눈이 순간 크게 뜨였다. 사진 속 어린 소녀… 그 아이의 눈매, 오뚝한 코, 그리고 입술을 앙다문 모습이 너무나 낯익었다. 그는 곧바로 떠오르는 얼굴과 비교했다. 사진관의 단골손님이자 가끔씩 와서 오래된 사진들을 말없이 응시하곤 했던, 미나의 어린 시절 모습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아니, 거의 동일하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미나가 할머니가 어릴 적 다녔던 신비한 사진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는 사실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필름 뭉치를 뒤적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장의 네거티브 뒤편에 작은 종이 조각이 테이프로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희미한 글씨로 “1957년 5월, 그날의 약속”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알아보기 힘든 필체로 누군가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이름은 바로 미나의 할머니 성함과 일치했다.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이 사진은 미나의 가족사와 사진관의 역사를 잇는 잃어버린 고리였던 것이다.

    사진 속 여인의 슬픔과 소녀의 불안한 시선이 다시금 지훈의 눈에 들어왔다. ‘그날의 약속’이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약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었을까? 미나는 이 사진을 보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할머니의 오래된 비밀을 마주하게 될 때, 그녀는 슬퍼할까, 아니면 비로소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을 맞추게 될까. 지훈은 차가운 사진을 손에 든 채 한참을 서 있었다. 어둠이 창밖을 잠식하고, 사진관 안의 모든 빛이 꺼져가는 순간에도, 사진 속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살아있는 듯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 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기적 – 제224화

    따스한 위로, 한 조각의 빛

    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새벽은 언제나 고요하면서도 생동감 넘쳤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스름 속에서, 제빵사 지우의 손은 익숙한 리듬으로 움직였다. 반죽은 그녀의 손길 아래 부드럽게 숨 쉬었고, 오븐 속에서는 갓 구워낸 빵들의 고소한 향기가 굽이굽이 피어올랐다. 오늘따라 특별한 발효를 거친 효모종 빵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지우는 평소보다 더욱 세심하게 온도를 살폈다.

    그때였다. 찌릿, 하고 전기 불빛이 한순간 깜빡이더니 이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지우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 미묘한 온도 변화가 애써 키워온 효모종의 생명력을 해칠까 봐. 그녀는 재빨리 오븐 문을 열어 반죽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지우의 마음 한켠에는 짙은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던 오늘의 빵이었다.

    새벽의 정적이 깨지고 여명이 동트는 시간, 빵집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른 아침 손님은 주로 단골들이었지만, 오늘 들어선 이는 낯선 젊은 여인이었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은 단정했지만, 얼굴에는 짙은 피로와 함께 지울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갓 내린 눈밭에 찍힌 발자국처럼, 슬픔이 그녀의 걸음걸이마다 새겨진 듯했다. 그녀는 진열대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크림빵 하나 주세요.”

    지우는 여인의 목소리에서 떨림을 감지했다.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기 위한 주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무언가 깊은 사연을 품고 온 듯한 그 모습에, 지우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갓 구워낸 따끈한 꿀바른 시나몬 롤 하나를 봉투에 담아 여인에게 내밀었다.

    “오늘 아침에 특별히 구운 거예요. 따뜻할 때 드시면 몸도 마음도 조금은 나아질 거예요.”

    여인은 놀란 눈으로 지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가에는 금세 물기가 차올랐다. 작은 친절이 그녀의 굳게 닫힌 마음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녀는 봉투를 받아 들고는 주춤거리며 말했다.

    “이, 이건… 주문한 게 아닌데요.”

    “서비스예요. 힘들 땐 달콤한 게 최고잖아요. 그리고… 빵은 나누면 더 맛있어요.” 지우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따뜻한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여인은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소리 없는 흐느낌이 빵집 안에 가득 퍼졌다. 그녀는 빵을 든 채 조용히 벽 한쪽 의자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지우는 아무 말 없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제빵 작업에 몰두했다. 빵을 만들며 풍겨 나오는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는 슬픔에 잠긴 여인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듯했다. 한참 후, 여인은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그녀의 눈은 아직 붉었지만, 처음에 보았던 그림자는 조금 옅어진 듯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오늘… 너무 힘든 소식을 들어서, 어디 기댈 곳이 없었어요.”

    여인은 작게 속삭였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으로 말했다.

    “여기 빵집은 언제나 문이 열려 있어요. 빵은…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거든요. 다시 찾아주세요.”

    여인은 말없이 지우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갓 구운 꿀바른 시나몬 롤을 품에 안고 빵집을 나서는 그녀의 뒷모습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지우는 창밖으로 사라지는 여인의 모습을 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오븐 속 효모종 빵을 확인했다. 미세한 전력 불안에도 불구하고, 빵은 훌륭하게 부풀어 올라 황금빛 갈색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마치 힘든 순간 속에서도 피어난 희망처럼. 어쩌면 작은 빵집의 기적은, 빵 자체보다는 빵을 통해 이어지는 마음과 마음 사이의 연결고리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지우는 생각했다. 새벽의 불안감은 사라지고, 따스한 위로의 온기가 빵집 안에 가득 찼다.

  •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223화

    지훈은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서연이 해맑게 웃고 있었다. 벌써 223번째 밤이었다. 아니, 밤이 몇 번이나 지나갔는지 이제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탐정이라는 직업이 무색하게, 그는 자신의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 앞에서 언제나 무력했다. 수많은 단서를 쫓았고, 수많은 허위 정보에 좌절했으며, 수많은 이별 앞에서 다시 길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녀를 찾는 것은 그의 존재 이유가 되어버렸으니까.

    그때, 잠잠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오랜 시간 동안 희미한 그림자처럼 그에게 정보를 제공해왔던 익명의 제보자였다. 지훈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과 절망의 끝없는 반복 속에서, 그는 여전히 작은 단서 하나에도 모든 것을 걸었다.

    메시지는 짧았다. “오래된 숲길 서점. 오후 두 시. 붉은 벽돌 건물.”

    숲길 서점. 지훈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들이 어릴 적, 학교가 끝나면 함께 들르곤 했던 작은 헌책방. 서연은 늘 그곳에서 보들레르의 시집이나 낡은 그림책을 한참 들여다보곤 했다. 잊고 있던 이름이 다시 떠오르자, 지훈의 눈앞에 흐릿한 옛 풍경이 그려졌다. 훅 끼쳐오는 종이 냄새, 먼지 앉은 책들 사이로 비추던 오후의 햇살, 그리고 그 햇살 아래에서 책을 읽던 서연의 옆모습.

    그는 서둘러 코트를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오후 두 시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차를 몰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길을 달렸다. 도시는 변했지만, 숲길 서점으로 가는 골목길은 놀랍도록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낡은 상점 간판들, 낮은 담벼락을 타고 오르는 넝쿨. 붉은 벽돌 건물 앞에 차를 세우자, 왠지 모를 긴장감이 그를 짓눌렀다. 이곳에 서연이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실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쿰쿰한 종이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시간마저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낡은 나무 바닥은 발걸음마다 삐걱거렸고, 빽빽하게 꽂힌 책들은 빼곡한 기억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낯선 주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 지훈이 어릴 적 기억하는 주인 할아버지의 얼굴은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찾으시는 책이라도 있으신가요?” 새 주인이 나긋하게 물었다.

    “아… 오래된 책들을 좀 보고 있었습니다.” 지훈은 서연이 좋아했던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집들, 그리고 삽화가 아름다운 소설들. 그의 손이 무심코 꽂혀 있던 한 권의 낡은 시집에 닿았다. 보들레르의 시집.
    책을 펼치자, 얇은 종이 한 장이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워보니, 그것은 말린 꽃잎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서연의 글씨였다.

    “다시 오지 않을 아름다움. 이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발작하듯 요동쳤다. 이 책, 이 글씨, 그리고 이 말린 꽃잎. 모든 것이 서연을 가리키고 있었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그는 카운터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이 시집… 혹시 누가 두고 간 것입니까?”

    주인은 안경을 고쳐 쓰고 시집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아, 이 책 말이군요. 얼마 전에 어떤 여성분이 오셔서, 이 책을 보다가 잠시 다른 곳에 다녀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꼭 다시 찾으러 오겠다고 부탁하셨죠. 그런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네요. 혹시 그분과 아시는 사이신가요? 책갈피로 쓰라고 이 꽃잎을 주셨는데…”

    지훈은 주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서연이 이곳에 왔다. ‘얼마 전’이라니. 도대체 언제? 얼마나 가까이 그가 그녀의 곁을 스쳐갔던 것일까. 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불꽃을 놓지 않았다.
    “그분이… 어디로 가셨는지, 혹시 아십니까?”

    주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동네 지도를 펼쳐놓고 한참을 보시더군요. 저희 서점에서 서쪽으로 난 작은 골목길을 따라 가면 나오는… ‘시간의 쉼터’라는 오래된 카페를 유심히 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고 싶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어요. 마치…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요.”

    시간의 쉼터. 서쪽 골목길.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말에, 가슴이 저릿했다. 어쩌면 그녀도 자신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 길의 끝에서, 그들의 잃어버린 시간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희망이 그의 온몸을 감쌌다. 그는 주인을 향해 급하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서둘러 서점을 나섰다. 붉은 벽돌 건물 밖으로 나오자, 저녁 햇살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지훈의 그림자가 서쪽 골목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가 거기 있을까. 정말로 이번엔.

  • 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222화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빛

    늦가을비가 창밖을 두드렸다. 습기를 머금은 차가운 공기가 창틈을 비집고 들어와 지우의 뺨을 스쳤다. 그녀는 익숙한 낡은 흔들의자에 앉아 빗방울이 유리창에 그리는 물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속에는 눅눅하고 무거운 안개가 내려앉아 있었다. 얼마 전 그녀가 겪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끝없는 미로처럼 그녀를 옥죄어 오는 듯했다. 그 미로의 한가운데서, 그녀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서 있었다.

    고요를 깨고, 문득 익숙한 온기가 발치에 닿았다. 검은 털이 비에 젖어 윤기 없는 자태로, 길고양이가 언제나 그랬듯 소리 없이 그녀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축축한 코를 그녀의 손등에 비비는 감촉이 차갑고도 따뜻했다. 고양이는 늘 비가 오는 날이나 그녀의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홀연히 나타났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며, 지우는 그 아이가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를 직감적으로 알았다.

    “또 왔네, 너도 비가 싫은가 보구나.” 지우는 속삭였다. 그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초록색 눈동자 속에 깊은 우주가 담겨 있는 듯했다. 지우의 마음속에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비는 그저 세상을 씻어내는 과정일 뿐이야, 지우야.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조용히. 하지만 그 후에는 언제나 더 깨끗한 풍경이 펼쳐지지.”

    지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내 안의 풍경은 아직 흐리기만 해. 지난번 그 일… 그 그림자가 너무 길게 드리워져서 앞이 보이질 않아.” 그녀는 최근에 내린 선택,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온 예상치 못한 파장에 대해 털어놓았다.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할 것 같았던 깊은 절망과 죄책감이 그녀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고양이는 그녀의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몸을 웅크렸다. 부드러운 털이 그녀의 다리에 닿는 감촉이 위안이 되었다.
    “그림자는 빛이 있어야만 생기는 법. 너의 선택이 빛을 향해 있었기에 그림자도 함께 드리워진 것뿐이야. 빛을 잃지 않는 한, 그림자는 너를 삼키지 못해.”

    지우는 고양이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길에 고양이는 작게 골골거렸다. “하지만 때로는… 그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고 싶어져. 모든 것을 잊고 사라져버리고 싶을 때도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억눌러왔던 슬픔이 터져 나오려는 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고양이는 고개를 들어 지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깊은 눈빛이 그녀의 흔들리는 영혼을 똑바로 응시했다.
    “사라지는 것은 답이 될 수 없어, 지우야. 너의 그림자도, 너의 빛도, 모두 너라는 존재의 일부야. 중요한 것은 그 그림자를 외면하지 않고, 너의 빛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지.”

    창밖의 빗줄기는 여전히 굵었지만, 지우의 마음속에 드리웠던 안개는 조금씩 걷히는 듯했다. 그녀는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따뜻하고 작은 생명이 그녀에게 전하는 지혜는 언제나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삶의 깊은 바다 속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이 작은 생명은 그녀에게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고양이의 털에 얼굴을 묻고 깊게 숨을 쉬었다. 그 온기 속에서 그녀는 다시금 자신 안의 빛을 찾아야 할 이유를 되새겼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지우의 목소리는 울먹임에 젖어 있었다. 고양이는 그녀의 품속에서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아직 그림자는 길었고, 앞으로 나아갈 길은 분명 험난할 터였다. 하지만 이제 지우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품속의 고양이에게서 전해지는 따뜻한 맥박을 느끼며, 다시 한번 희망의 빛을 마음에 품었다. 그녀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녀를 따라다니겠지만, 이제 그녀는 그 그림자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 그림자조차도, 결국은 그녀의 빛이 만들어낸 세상임을 알았으니.

  • 비 내리는 골목길의 우산 수리공 – 제221화

    회색빛 하늘 아래, 골목길은 끊임없이 떨어지는 빗방울로 반짝였다. 투둑, 투둑. 낡은 작업실 지붕 위로 빗소리가 춤을 추고, 흙벽돌 사이로 스며든 습한 공기는 오래된 나무와 눅눅한 쇠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수호는 찌그러진 양은 주전자에 보리차를 데우며 창밖을 응시했다. 몇 해 전부터 눈에 띄게 희어진 머리카락은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굳건하고 정확했다.
    그의 손에서 수많은 우산들이 새 생명을 얻어갔고, 그 우산들이 품고 있던 이야기도 비를 맞지 않는 새 잎사귀처럼 다시 피어났다.

    그때였다. 낡은 나무문에 달린 풍경이 맑은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리고, 한 젊은 여인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젖은 머리카락과 어깨에 내려앉은 빗방울이 그녀의 존재를 알렸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되어 색이 바랬지만, 한때는 선명했을 연분홍색의 우산 하나가 들려 있었다. 살 하나가 부러져 기형적으로 꺾인,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기억의 빗물

    수호의 시선이 우산에 닿는 순간, 작업실 안의 모든 소리가 아득해졌다. 뇌리를 스치는 익숙한 색감, 꺾인 살의 각도, 손잡이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스크래치. 잊었다고 생각했던, 아니, 잊으려 애썼던 파편들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수리 가능한가요?” 여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수호의 귀에는 빗소리에 섞인 또 다른 목소리가 맴돌았다. ‘이 우산, 꼭 오래 써야 해요. 우리 추억이 담겨 있잖아요.’
    은서였다. 십여 년 전, 이 비 내리는 골목길을 밝혀주었던 한 줄기 햇살 같던 그녀. 그 연분홍색 우산은 그녀가 가장 아끼던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았을 때도, 그녀는 이 우산을 쓰고 있었다. 낡고 헤진 우산을 고집스레 펼쳐 들고, 축축한 거리를 걸어가던 뒷모습. 그 우산이 이제 그의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수호는 아무 말 없이 우산을 받아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부러진 살을 더듬었다. 삭아버린 천, 녹슨 리벳.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망치질 소리, 펜치의 삐걱거림, 실의 마찰음이 작업실을 채웠다. 그는 마치 시간을 되감듯, 조심스럽게 우산을 분해하고, 녹슨 부품을 교체하고, 찢어진 천을 덧대고 기웠다. 한 땀 한 땀, 바늘이 천을 지날 때마다 과거의 기억이 현재와 겹쳐졌다. 단순한 수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잊혀진 이야기를 다시 짜 맞추는 의식과 같았다.
    그 연분홍색은 비록 세월에 바랬지만, 수호의 기억 속에서는 여전히 처음처럼 선명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우산의 살이 다시 곧게 펴지고, 헐거웠던 부분이 단단히 고정될 때마다, 수호의 마음속 어딘가에도 잊었던 희망의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

    “이 우산… 저에게 아주 소중한 거예요.” 여인이 조용히 말했다. “어머니가 아끼시던 우산인데,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주셨어요. 고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호의 손이 멈칫했다. ‘어머니가 아끼시던…’ 그의 눈빛에 미세한 흔들림이 스쳤다. 여인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흐릿한 기억 속의 은서와 겹쳐지는 듯한 눈매, 굳게 다문 입술. 설마 하는 마음에 가슴이 조여왔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수호의 목소리가 예상보다 더 갈라져 나왔다.

    여인은 고개를 들고 수호를 응시했다. “강예린입니다.”
    강예린. 수호의 머릿속에서 ‘은서’라는 이름과 함께 하나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빗소리가 더욱 거세졌다. 그의 낡은 작업실 창문 너머로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고쳐진 연분홍 우산은 작업대 위에서 젖지 않은 희망처럼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수호의 마음속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잊혀진 세월이 다시 그의 문을 두드리는 것일까.

  • 밤기차에서 만난 낯선 인연 – 제220화

    밤의 장막이 드리운 작은 서재. 낡은 스탠드 조명 아래, 지우는 얇은 편지지 한 장을 손에 쥔 채 앉아 있었다. 펜촉으로 조심스럽게 눌러쓴 한 글자 한 글자가 옅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희미하게 번진 잉크 자국은 그를 닮아 있었고, 차갑게 식어버린 차는 어느새 탁자 위에서 김 한 점 피워 올리지 못했다.

    며칠 전, 그녀에게 도착한 이 편지는 마치 수백 개의 파편으로 된 유리 조각처럼 지우의 마음을 산산이 부수어 놓았다. ‘잠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간결한 문장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지우를 며칠 밤낮으로 잠 못 들게 했다. 떠나야 하는 이유, 어디로 가는지, 언제쯤 돌아올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그저 단 한 번의 작별 인사도 없이, 현우는 그렇게 홀연히 사라진 것이었다.

    차가운 서신의 흔적

    지우는 편지를 다시 내려놓고, 탁자 한편에 놓인 작은 나무 새 조각을 집어 들었다. 현우가 밤기차에서 처음 만나던 날, 서툰 솜씨로 깎아 주었던 선물이었다. 투박하지만 따뜻한 그의 손길이 느껴지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새의 날개 부분을 쓰다듬던 지우의 손가락이, 문득 움푹 파인 작은 홈에 닿았다. 아주 오래전, 현우가 무심코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야’라고 했던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때는 단순한 장난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 그 홈 안에서 빛바랜 종이 조각이 삐져나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나 작고 얇아 눈에 띄지 않았던, 숨겨진 흔적. 지우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냈다. 낡고 닳아 문드러질 듯한 종이에는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그림과 몇 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래된 지도를 연상시키는 그림 위로, 특정 지역의 이름과 날짜, 그리고 ‘밤 11시 30분, 기다릴게’라는 익숙한 필체가 보였다.

    잊혀진 약속의 실마리

    현우가 떠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다. 이 편지는 단순히 이별을 고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찾아내야 할 암호였던 것이다. 마지막 만남에서 그가 보였던 미묘한 행동들, 평소와 달리 깊었던 눈빛, 그리고 왠지 모를 불안감. 모든 조각들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노리는 세력으로부터 지우를 보호하기 위해, 혹은 그녀에게 알려서는 안 될 어떤 임무를 위해, 이런 식으로 이별을 가장했던 것이다.

    그의 어설픈 연기가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혼자 감당하려 했을까. 지우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지만, 더 이상 슬픔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잊혀진 약속의 실마리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다.

    다시 걷는 발자취

    지도는 현우가 처음 그녀에게 밤기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오래된 기차역 근처의 작은 오두막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들은 함께 그곳을 방문해 오래된 추억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곳이 바로 현우가 지우를 기다리는 장소였다. 그리고 날짜는… 내일 밤이었다.

    지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망설임은 더 이상 없었다. 지난 밤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흘린 눈물로 얼룩졌다면, 이제는 그를 찾아 나설 용기로 가득 채울 때였다. 그 밤기차에서 만난 낯선 인연이, 이렇게 긴 여정을 거쳐 다시 이어질 줄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우는 믿었다. 그와 그녀의 운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지우는 서재 문을 나섰다. 낡은 나무 새 조각을 가슴에 품은 채, 그녀의 발걸음은 굳건했다. 그녀는 이제 현우가 남긴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추러 갈 참이었다. 어쩌면 그 끝에는, 모든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길 위에서 다시 한번 그의 손을 잡을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밤기차의 희미한 불빛처럼,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

  • 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219화

    파도 소리가 모든 생각을 집어삼킬 듯 밀려왔다. 김민준은 거친 숨을 고르며 방파제 끝에 섰다. 낡고 바랜 사진 한 장이 그의 손안에서 축축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사진 속에는 서연이 앳된 얼굴로 등대 아래서 웃고 있었다. 이 사진을 건네준 이는 서연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수십 년 전, 서연이 즐겨 찾던 곳이라 했다. 그리고 그 등대는 지금, 민준의 눈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는 이곳을 찾아내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던가. 지도 속 희미한 선들을 더듬고, 잊힌 이정표를 찾아 헤매며 여기까지 왔다. 희망은 한 올의 실처럼 가늘고 끊어질 듯 위태로웠지만, 결코 놓을 수 없는 유일한 끈이었다.

    등대 아래 작은 언덕에는 캔버스 앞에 앉아 바다를 그리는 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바람에 나부끼는 그녀의 머리카락, 캔버스를 향해 기울어진 어깨선, 붓을 잡은 손의 섬세한 움직임까지… 민준의 심장이 발작하듯 뛰어댔다. 너무나 익숙한 모습이었다. 마치 오랜 꿈속에서 헤매다 현실로 튀어나온 환영 같았다.

    “서연…”

    그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수십 년을 기다려온 순간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다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에게 가까워질수록, 그의 눈은 캔버스 위 그림에 닿았다. 익숙한 등대의 모습, 그 주변의 풍경… 서연의 그림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녀의 숨결이, 그녀의 예술혼이 여기에 깃들어 있는 듯했다.

    바로 그때,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햇살에 살짝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민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의 심장을 찢는 듯한 싸늘한 실망감이 전신을 덮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착각했습니다.”

    여인은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가끔 저를 착각하는 분들이 계시죠. 여기 풍경이 워낙 그림 같아서요.”

    아니었다. 풍경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그림 때문이었다. 그녀의 캔버스, 그녀의 붓놀림… 그 모든 것이 서연을 닮아 있었다. 실망감 속에서도 민준은 끈질기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이 이젤… 오래된 것 같은데, 원래 가지고 계셨던 건가요?”

    여인은 자신의 낡은 이젤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몇 년 전에 우연히 물려받은 거예요. 그림 동호회 선배님이 이제 그림을 못 그리게 되셨다고 이걸 저한테 주셨죠. 왜요?”

    민준은 이젤의 한 귀퉁이에 새겨진 희미한 상처를 발견했다. 날카로운 도구에 긁힌 듯한 작은 자국. 서연이 미대에서 쓰던 이젤에도 똑같은 자국이 있었다. 그녀가 실수로 조각칼을 떨어뜨렸을 때 생긴 상처였다.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혹시 그 선배님 성함이… 서연이라는 분이셨나요?” 민준의 목소리는 희망과 두려움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 어떻게 아셨어요? 맞아요. 서연 선배님. 지금은 연락이 잘 안 되지만요… 아, 그러고 보니 서연 선배님도 저처럼 이 등대 근처에서 그림 그리시는 걸 좋아하셨어요.”

    서연 선배님. 그 이름이 민준의 가슴을 후벼 팠다. 그녀가 이곳에 있었다.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서연이 이곳에 왔었고, 그림을 그렸으며, 이 이젤을 사용했다. 심지어 그 이젤은 그녀가 아끼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왜 그녀는 다시 사라졌을까.

    민준은 이젤 아래쪽에 무심하게 끼워져 있는 작은 스케치 한 장을 발견했다. 반쯤 그려진 그림. 해풍에 살짝 바랜 종이 위에는 익숙한 풍경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등대와 바다, 그리고 그 옆에 홀로 피어난 작은 꽃들… 마치 서연의 영혼이 종이 위에 춤추는 것 같았다. 그 꽃은, 오직 서연만이 그리는 방식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스케치를 집어 들었다. 아직 물감 냄새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울렸다. 그녀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아주 가까이,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한 발자국 늦었다.

    파도 소리는 여전히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했지만, 민준의 귀에는 오직 서연의 이름만이 메아리치는 듯했다. 그녀의 흔적은 그를 다음 행선지로 이끌고 있었다. 놓쳐버린 시간만큼, 그의 발걸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그는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녀를 찾기 위한 또 다른 실마리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