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를 가르는 매미 소리는 이미 여름의 끝자락을 알리고 있었지만, 하윤의 가슴속에는 여전히 한겨울의 찬 바람이 휘몰아쳤다.
손에 든 낡은 사진 한 장이 찢어질 듯 구겨졌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분명 환하게 웃고 있는 동구 할머니의 모습이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할머니의 어깨에 기대어 서 있는 여인의 얼굴은… 하윤이 어릴 적부터 익히 들어온 ‘오래전 마을을 떠난 비운의 아가씨’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오히려… 하윤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 푸른 눈동자, 콧등의 점까지도.
“이게 대체… 무슨….”
하윤은 사진을 들고 동구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매번 따뜻한 웃음과 정을 내어주던 할머니의 집이 오늘은 거대한 비밀의 장막처럼 느껴졌다. 문을 두드리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이구, 하윤이 왔어? 웬일이야, 이 아침 일찍.”
문을 연 동구 할머니의 얼굴에는 여전히 잔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주름진 눈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었지만, 그 눈빛만은 언제나 포근했다. 그러나 하윤의 눈에 비친 할머니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할머니…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하윤은 거실로 들어서자마자 사진을 내밀었다. 할머니가 내어준 뜨거운 보리차 잔이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렸지만, 하윤의 목은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
할머니의 시선이 사진에 닿는 순간, 그 포근했던 눈빛이 흔들렸다.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뜨거운 보리차가 마루에 흥건하게 번졌지만, 두 사람은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 이걸… 네가… 어디서….”
갈라지는 목소리로 할머니가 겨우 물었다. 하윤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뒷산 고목 아래, 할아버지께서 숨겨두신 상자에서 찾았어요. 이 여자… 누구예요, 할머니? 마을 사람들은 분명 ‘나갔다’고만 했잖아요. 그런데 이 눈빛… 이 얼굴… 저랑 너무 닮았어요. 설마… 설마 제가….”
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동구 할머니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할머니는 고개를 떨군 채, 묵묵히 사진 속 여인을 응시했다. 오랜 침묵이 방안을 채웠다. 침묵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하윤의 심장을 짓눌렀다.
“…미안하다, 하윤아. 정말… 미안해.”
할머니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마디는 사죄였다. 그 말과 함께, 할머니의 눈에서 주름진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마치 수십 년 묵은 비밀의 둑이 터진 것처럼 끝없이 흘러내렸다.
“그 아이는… 마을을 떠난 것이 아니었단다. 떠날 수가 없었지. 그날… 그 모든 일이 일어난 날….”
할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더 희미해졌다. 하윤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할머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심장에 박히는 듯했다. ‘떠날 수가 없었다’는 말의 무게는 상상 이상이었다.
“하지만… 왜… 저랑 닮았어요? 왜 아무도 이 사진을 말해주지 않았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하윤은 다급하게 물었다. 그러나 동구 할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손으로 흐느낌을 틀어막았다. 그 어깨는 마치 오랜 세월 동안 무거운 짐을 짊어진 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할머니는 하윤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잊어라… 제발… 잊어다오, 하윤아. 이 마을의 평화는… 이 비밀 속에 갇혀야만 해. 네가 더 깊이 파고들면… 모두가 위험해진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간절한 기도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기도는 하윤의 귀에 더 큰 경고로 들렸다. 할머니의 눈빛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 공포는 단순한 걱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죽음을 본 자의 그것이었다. 하윤은 사진 속 자신과 닮은 여인의 얼굴, 그리고 눈물 흘리는 동구 할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따뜻하다고 믿었던 이 마을이, 거대한 거짓 위에 서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할머니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더니, 몸의 힘이 쭉 풀렸다. 할머니는 하윤의 손을 놓치고 그대로 마루 위로 쓰러졌다. 하윤의 비명 소리가 조용한 시골 마을의 아침을 갈랐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뱉은 희미한 속삭임이 하윤의 귓가에 맴돌았다.
“…절대… 저수지 근처엔… 가지 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