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무제: 운명에 이끌린 자
## 첫 번째 장: 푸른 하늘 아래, 낯선 세상
지루하고 팍팍한 하루였다. 이진우는 허리가 뻐근한 것을 느끼며 낡은 사무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텅 빈 사무실에는 형광등의 차가운 불빛만이 지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야근. 그의 삶은 늘 이런 식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특별할 것 없는 미래. 그저 주어진 대로 흘러가는 물결 위 부유물 같은 존재.
“젠장, 비까지 오네.”
퇴근길, 하늘에서는 제법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후드티 모자를 뒤집어쓰고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던 순간이었다. 찢어질 듯한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거대한 쇳덩어리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며, 이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아, 이렇게 끝나는 건가? 너무 허무하잖아….*
이어지는 충격.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고통. 그리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는 절대적인 어둠과 차가운 공허. 그는 그 순간,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시간도, 공간도, 그리고 ‘나’라는 존재 자체도.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얼마나 흘렀을까. 수십 년일 수도, 단 일 초일 수도 있는 그 혼돈의 시간을 지나, 이진우는 눈을 떴다.
새하얀 빛이 눈꺼풀을 비집고 들어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새소리, 그리고 풀 내음. 분명 죽었던 것 같았는데, 왜 이런 것이 느껴지지?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기는?”
시야에 들어온 것은, 놀랍게도 울창한 숲이었다. 키가 수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은 신비로운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발밑에는 푹신한 낙엽들이 쌓여 있었고, 맑고 청량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호흡을 했다. 몸이 놀랍도록 가벼웠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데 이상했다. 손바닥을 내려다본 순간, 이진우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잔근육 하나 없이 매끈하고 하얀 손. 손등에는 핏줄조차 도드라지지 않은, 마치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앳된 손이었다. 그는 몸을 더듬었다. 입고 있던 양복은 흔적도 없었고, 대신 허름한 베옷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얼굴을 만져보았다. 뺨은 매끄러웠고, 수염 자국 하나 없었다. 그의 30대 중반의 거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익숙한 도시의 풍경은커녕, 인적 하나 없는 깊은 산속이었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신비로운 숲. 그때였다.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물소리. 그는 본능적으로 그 소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걷지 않아 작은 폭포가 나타났고, 그 아래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진우는 물가로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젠장…!”
탄성이 절로 나왔다. 거울에 비친 것은 분명 자신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흔적이 지워진 듯, 앳되고 생기 넘치는 모습. 스무 살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의 얼굴이었다. 자신의 기억 속 마지막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게 꿈인가? 아니, 너무 생생해. 그렇다면… 내가 젊어진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온 건가?*
혼란과 함께 묘한 기시감이 밀려들었다. 이 기분, 어딘가 웹소설에서 본 듯한 전개인데…?
갑자기 머릿속이 지끈거렸다. 마치 누군가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낯선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 몸의 주인은 ‘운휘’라는 이름의 고아였다. 그는 작은 산촌에서 홀로 살아가던 평범한 소년… 아니, 소년이었어야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산 정상에 있는 ‘영봉’에 올랐다가 정신을 잃었고, 그 후 모든 것이 변했다.*
이진우는 고통에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는 죽었고, 그리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 그것도 다른 사람의 몸에 빙의한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영혼이 젊은 육신에 깃든 채로. 흔히 말하는 ‘이세계 전생’이었다.
“하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안 나오네.”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고통 속에서도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평범했던 인생이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익숙한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세상에 던져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는 묘한 기대감이 더 컸다. 무채색이던 삶에 갑자기 강렬한 색채가 덧입혀진 기분이었다.
그는 무언가 느껴지는 듯한 기분에 손을 뻗어 계곡물에 담갔다. 차가운 물속에서 묘한 에너지가 손끝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의 몸속을 흐르는 피와 살을 깨우는 듯한 감각. 그는 그것을 ‘기(氣)’라고 직감했다.
바로 그때였다.
“어린 총각! 정신이 드셨구려!”
갈라지는 듯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진우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은 삼베옷을 입고 지팡이를 짚은 노파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허리는 굽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할머니… 제가 얼마나 기절해 있었습니까?” 이진우는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사용했다.
노파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사흘 밤낮이 지났지. 영봉 근처에서 자네를 발견했을 때, 숨은 붙어 있었으나 혼백이 흐트러진 듯 보였네. 하지만 자네의 기운은… 참으로 묘하더군.”
“기운이라니요…?”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허나 스스로도 모르는 듯하니. 어쨌든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다. 내 이름은 명화다. 이 작은 암자에서 홀로 지내고 있지.”
명화 할머니는 이진우를 자신의 암자로 이끌었다. 좁지만 정갈하게 정돈된 암자는 평화로웠다. 할머니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주며 이진우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다. 하지만 이진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지구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말을 믿어줄 리 없을 터. 그는 기억을 잃은 고아라고 둘러댔다.
명화 할머니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기억을 잃은 것은 큰 불행이겠으나, 어쩌면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겠지.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자네는 이 세상의 사람이 된 것이니.”
“이 세상이라니요… 이곳은 대체 어디입니까?”
이진우의 물음에 명화 할머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이곳은 ‘무림계’라 불리는 세상이다. 무(武)로써 법이 되고, 강함이 곧 진리가 되는 곳이지.”
무림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이진우의 머릿속에 번뜩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었다. 무협소설, 강호, 문파, 절대고수….
“제가 알고 있는 세상과는 너무 다릅니다….”
“그렇겠지. 자네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니. 어쩌면… 자네는 운명에 이끌려 이곳에 오게 된 것일지도 모르네.”
명화 할머니는 차분하게 이 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무림계에는 수많은 문파와 세력이 존재했다. 정의를 표방하는 ‘정파’와 어둠을 숭상하는 ‘마교’, 그리고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파’들.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그들의 갈등은 지금, 정점에 달해 있었다.
“백 년에 한 번, 천하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회가 열린다네. 바로 ‘천무대회’다.”
명화 할머니의 눈빛이 깊어졌다.
“천무대회는 천하의 무림 고수들이 모두 모여 최강을 가리는 대회이지. 승자는 ‘천무지존’의 칭호를 얻고, 그가 속한 세력이 앞으로 백 년간 무림의 패권을 쥐게 된다. 그 힘으로 천하를 안정시키거나, 아니면… 피로 물들이거나.”
이진우는 숨을 들이켰다. 천하의 운명을 건 무술 대회라니. 그의 삶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지금은 마교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네. 정파는 분열되어 힘을 잃었고. 만약 이번 천무대회에서 마교가 승리한다면… 이 무림계는 피와 살육으로 뒤덮일 것이 분명해.”
명화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이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자네, 어린 총각. 영봉에 떨어진 자. 자네는 분명, 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나타난 운명의 이방인이다. 자네의 몸에 흐르는 묘한 기운… 그것은 이 무림계의 근원적인 힘과는 또 다른,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
“제가… 뭘 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진우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섞였다. 그는 고작 평범한 회사원이었을 뿐이었다. 싸움은커녕, 운동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천무대회는 한 달 뒤, 무림맹의 본산인 천마봉에서 열린다. 거기까지 가는 길은 험난하겠지. 하지만 자네의 운명은 이미 그곳을 향하고 있네.”
명화 할머니는 오래된 나무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누렇게 바랜 두루마리 책자와 작은 호리병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자네 몸속의 기운을 다스리는 초식이다. 아주 기본적인 것이지만, 자네라면 빠르게 익힐 수 있을 것이야. 그리고 이 호리병 속에는 기력을 회복시키는 영약이 담겨 있다.”
이진우는 두루마리를 받아들었다. 표지에 적힌 글자는 해독하기 어려웠지만, 그림으로 된 동작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눈에 비친 동작들은 마치 몸이 기억하는 듯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아까 계곡물에서 느꼈던 그 ‘기’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할머니… 저는 싸움을 할 줄 모릅니다. 무술은커녕,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평범함이 무엇이겠나. 자네가 살아온 세상에서는 평범했을지 모르나, 이곳에서는 아닐 수도 있지. 중요한 것은 자네의 마음가짐이다.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자네는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명화 할머니의 질문은 이진우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노을이 지는 하늘은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그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동시에, 살아 있다는 생생한 감각과 함께 알 수 없는 열정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평범하게 죽는 것보다는… 뭔가 특별한 일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저는… 이 세상에 왜 오게 되었는지, 제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이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방황하는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무림계, 그리고 천하의 운명을 건 천무대회. 그 모든 것이 그의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다.
“좋아, 총각. 자네가 스스로 운명을 선택했으니, 이제 그 길을 나아가야 할 차례다.”
명화 할머니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붉게 물든 하늘 아래, 이진우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었다. 푸른 하늘 아래, 낯선 세상에 떨어진 한 명의 무림인이었다.
그의 새로운 여정이, 지금 막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