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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천랑호. 그 이름처럼 우주를 유영하는 거대한 늑대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천랑호는 은하의 가장자리, 그 누구의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심연 속에서 한낱 먼지보다 작은 존재였다. 함장 강호진은 함교의 창밖으로 펼쳐진 검푸른 어둠을 응시했다. 무수한 별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지만, 그 모든 빛은 이곳까지 도달하는 데 수억 년이 걸렸을 터였다. 살아있는 빛이 아니었다. 죽은 빛, 혹은 아득한 과거의 유령 같은 것.

    “함장님, 보고드립니다.”

    항해사 한수연의 차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녀는 늘 침착했다. 호진은 고개를 돌려 주 모니터를 보았다. 푸른 홀로그램이 우주선의 상태와 주변 정보를 띄웠다.

    “말해봐, 수연.”

    “새로운 에너지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극도로 희미하지만, 비정상적인 패턴입니다. 자연적인 현상 같지는 않습니다.”

    호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10년 가까이 우주를 떠돌았지만, 자연 현상이 아닌 ‘무언가’를 마주하는 것은 언제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우주의 경이로운 선물일 수도, 혹은 죽음의 전조일 수도 있었다.

    “이지훈 박사에게 알리고, 심층 분석 지시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기관실은 최대 출력 대기 상태로 전환하고.”

    “알겠습니다, 함장님.”

    곧 과학 담당 이지훈 박사의 목소리가 통신으로 흘러나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잠 못 이루는 아이 같은 흥분이 가득했다.

    “함장님! 이거 정말 굉장한데요! 분석 결과, 저희가 아는 어떤 에너지 스펙트럼에도 해당하지 않습니다. 유기체도, 무기체도, 심지어 암흑 물질의 변형 같지도 않아요! 미지의… 미지의 존재입니다!”

    이지훈은 천재였다. 가끔 그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이 골칫거리였지만,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흥분하지 말고, 지훈 박사. 정확한 위치와 특징부터 파악해.”

    “네, 네! 현재 추정 위치는 천랑호로부터 약 0.5광시 초속에 있습니다. 겉보기 크기는… 거대합니다. 소행성 정도 될 것 같아요.”

    호진은 침을 삼켰다. 0.5광시 초속이면 그리 멀지 않았다. 천랑호가 이곳까지 오기 위해 헤쳐 온 시간과 비교하면 찰나에 불과했다.

    “항해사, 접근 경로 계산해. 이지훈 박사는 탐사선에 탑승할 준비를 해.”

    “함장님! 제가 직접 가겠습니까?!” 이지훈의 목소리가 들떴다.

    “탐사선에 보낼 건 당신뿐만이 아냐. 박철우 기관사도 동행해. 예상치 못한 문제에 대비해야지.”

    박철우 기관사는 투덜거리는 소리가 통신으로도 들릴 정도였다. “젠장, 함장님! 평화롭게 우주에서 고철 뜯는 줄 알았더니 이제는 미지 외계 생명체랑 술래잡기라도 하라는 겁니까?”

    “외계 생명체인지 뭔지 아직 확실하지 않아, 철우. 그리고 너의 그 미숙한 잔소리만큼은 확실히 생명체 같으니 걱정 마.” 호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천랑호가 미지의 신호원을 향해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이윽고 육안으로도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거리에 도달했을 때, 함교의 모든 이들은 숨을 헙 들이켰다.

    “세상에….” 한수연이 낮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것은 소행성이 아니었다. 거대한, 완벽한 육각형의 수정체였다.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크기. 검푸른 우주의 심연 속에서 마치 살아 숨 쉬는 심장처럼, 희미한 보랏빛과 금빛이 뒤섞인 빛을 은은하게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단순한 반사가 아니었다. 수정체 내부에서 솟아나는 듯한, 끊임없이 일렁이는 생명의 파동 같았다.

    “측정 결과… 이상합니다. 중력도, 자기장도, 심지어 열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에너지는… 존재 자체가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 같습니다.” 이지훈의 목소리가 경외감으로 떨렸다.

    “정말 아름답네요…” 한수연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수정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호진은 그것을 응시했다. 어딘가 익숙한,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이질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마치 꿈속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혹은 먼 고향 행성의 전설 속에 등장할 법한, 신화적인 존재 같았다.

    “탐사선 출격 준비해. 철우, 지훈, 조심해. 아무것도 만지지 마. 어떤 신호도 발산하지 마.”

    작은 탐사선이 수정체를 향해 나아갔다. 박철우가 조종간을 잡았고, 이지훈은 각종 센서와 분석 장비를 점검했다.

    “젠장, 함장님 말대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고요. 이 녀석, 기분 나빠.” 철우가 투덜거렸다. 탐사선의 센서들이 알 수 없는 노이즈를 뿜어내고 있었다.

    “기분 나쁘다고요? 철우 씨, 이건 인류의 역사를 바꿀 발견입니다! 저 내부의 에너지 패턴 좀 보세요! 마치… 살아있는 우주 그 자체 같아요!” 이지훈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탐사선이 수정체의 거대한 표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표면은 놀랍도록 매끄러웠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매끄러움 속에는 무한에 가까운 미세한 기하학적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형되고 춤추는 듯했다.

    “함장님, 보고드립니다. 수정체 표면에서 미세한 균열을 발견했습니다.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마치… 누군가 파괴하려 했던 흔적 같아요.” 철우가 경고했다.

    호진은 모니터를 통해 그 균열을 보았다. 균열 사이로 수정체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금빛 에너지가 더욱 강렬하게 번뜩였다.

    “조심해. 그리고… 균열이 하나만 있는 건가?”

    “아닙니다, 함장님. 이 균열은 마치 길처럼 안쪽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틈이… 제법 넓습니다.” 이지훈이 말했다.

    “뭐? 그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소리냐?!” 철우가 놀라 소리쳤다.

    “기회를 놓칠 순 없어요, 철우 씨! 저 안에는 분명 저 수정체의 핵심이 있을 겁니다!” 이지훈의 눈빛은 이미 탐욕과 열정으로 이글거렸다.

    “절대 안 돼, 지훈! 함장님의 명령을 잊었어?!” 철우가 탐사선을 멈추려 했다.

    하지만 이지훈은 이미 철우의 손에서 조종간을 낚아채듯 잡고는 균열 안으로 탐사선을 몰아넣었다.

    “이지훈 박사! 당장 멈춰!” 호진의 분노한 목소리가 통신을 찢었다.

    “죄송합니다, 함장님!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습니다! 인류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있을지도 모릅니다!”

    탐사선은 거대한 수정체의 균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균열은 통로로 이어져 있었고, 통로의 벽면은 온통 금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빛으로 휘황찬란했다. 그 빛은 단순한 조명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에너지 그 자체로 벽면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

    “맙소사… 이건….” 철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통로의 끝,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공간의 중앙에서 빛나는, 탐사선보다 훨씬 거대한 금빛 덩어리가 맥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제된 에너지 그 자체였다. 거대한 별의 심장처럼, 우주의 근원처럼,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장엄한 빛이었다.

    “이것이야말로… ‘기’의 근원이다…!” 이지훈이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이미 광기에 가까운 희열로 가득했다. “우주의 모든 존재를 이루는 정수! 만물의 생명력! 수억 년을 거슬러 올라간 고대 신선들이 추구하던 영원의 힘!”

    철우는 온몸에 닭살이 돋는 것을 느꼈다. 지훈의 말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그의 뇌리에 직접 박히는 기분이었다. 탐사선의 모든 센서가 먹통이 되었지만, 그의 심장만은 거대한 금빛 덩어리의 맥동에 맞춰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 순간, 거대한 금빛 덩어리에서 하나의 빛줄기가 뻗어 나와 탐사선을 관통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지훈의 몸을 꿰뚫었다.

    “크아악!” 이지훈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온몸이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혈관이, 근육이, 심지어 그의 뼈마저도 투명한 금빛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지훈! 무슨 짓이야?!” 철우는 경악했다.

    그러나 이지훈은 고통스러워하는 듯했으면서도, 동시에 황홀경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빛났다. 그는 손을 뻗어 마치 허공을 그러쥐는 듯했다.

    “보여… 보여! 우주의 진리가… 기의 흐름이… 모든 생명의 연결고리가… 나의 것이 된다…! 나는… 나는…!”

    이지훈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금빛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고, 탐사선 내부는 온통 영롱한 빛으로 가득 찼다. 그는 마치 신화 속의 신선이 강림하는 것처럼 보였다.

    “함장님! 이지훈이… 이지훈이 이상해졌습니다! 뭔가에 홀린 것 같아요! 그의 몸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철우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천랑호 함교에서도 상황은 급변했다. 이지훈에게서 뿜어져 나온 에너지가 수정체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고, 수정체는 거대한 태양처럼 섬광을 터뜨렸다. 그 빛은 천랑호의 보호막을 뚫고 함교의 창문을 뒤흔들었다.

    “박철우! 이지훈을 끌고 나와! 당장 탈출해!” 호진이 소리쳤다.

    “안 됩니다, 함장님! 제 몸이… 제 몸이 움직이지 않아요! 마치 거대한 힘에 눌린 것 같습니다! 지훈… 지훈이…!”

    철우는 필사적으로 조종간을 잡으려 했지만, 그의 몸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지훈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금빛 아우라가 탐사선 전체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지훈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투명하게 빛나며 마치 별들의 은하가 그의 안에서 춤추는 듯 보였다.

    “나는… 나도… 보았다…!” 이지훈은 허공에 손을 뻗었고, 그의 손끝에서 거대한 금빛 에너지가 뻗어 나갔다. 그 에너지는 탐사선을 꿰뚫고, 수정체의 통로를 지나 우주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 에너지는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의지, 혹은 태초의 영혼이 담긴 생명력 그 자체였다. 천랑호의 모든 시스템이 경고음을 토해냈다.

    “함장님! 에너지 과부하! 이지훈 박사의 에너지 파동이 우주선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수연이 다급하게 외쳤다.

    호진은 창밖을 보았다. 탐사선이 있던 수정체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기둥이 우주의 어둠을 찢고 있었다. 그 빛은 멀리 떨어진 천랑호의 외벽마저 투명하게 비추는 듯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이지훈의 형체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듯, 순수한 에너지 존재로 변하고 있었다.

    “함장님…” 철우의 목소리가 통신으로 들려왔다.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 대신 알 수 없는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저는… 저는 그가 신선이 되는 것을 본 것 같습니다….”

    통신이 끊겼다. 이지훈과 박철우가 탄 탐사선은, 거대한 금빛 기둥 속에서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사라졌다. 그들이 있던 수정체는 더욱 강렬하게 빛나더니, 이윽고 우주선을 삼킬 듯한 섬광을 내뿜으며 다시 거대한 육각형의 존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빛은 꺼지지 않고, 여전히 심장처럼 맥동하며 미지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강호진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우주선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모든 시스템은 고요히 정지한 듯했다. 단지 함교의 모니터만이, 사라진 탐사선과 이지훈, 박철우의 생체 신호를 추적하며 텅 빈 우주 공간을 표시할 뿐이었다.

    이곳은 은하의 가장자리, 그 누구의 지도에도 없는 심연이었다. 천랑호는 그곳에서 인류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우주 태초의 ‘기’와 조우했다. 이제 강호진과 한수연만이 남았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신선이 된 자와 그것을 목격한 자의 흔적을 쫓아 홀로 유영해야 하는 두 사람만이.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단순한 외계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의 심장에 봉인되어 있던, 영원불멸의 진리를 향한 문이었고, 동시에 인류의 나약한 존재를 산산이 부숴버릴 수 있는 광대한 힘이었다.

    호진은 조용히 한수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했다. 공포, 경외, 그리고 알 수 없는 탐구심.

    “수연아…” 호진이 나지막이 불렀다.

    “네, 함장님.”

    “우리…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한수연은 다시 창밖의 빛나는 수정체를 응시했다. 그 속에서 어쩌면 이지훈과 박철우가 영원히 함께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이 항해를 멈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함장님.”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단호했다. “우리는 너무 깊이 들어왔어요. 이제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천랑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항해는 단순한 탐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와 인간, 그리고 영원불멸의 ‘기’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자 고독한 추구의 여정이었다. 우주의 심연은 여전히 침묵했지만, 그 침묵 속에는 이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과 위험이 함께 숨 쉬고 있었다.

  • 다크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황혼의 평원, 그 끝없이 펼쳐진 암갈색 대지 위로 찢겨 나간 하늘이 시시각각 피를 토하는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한때 생명으로 가득했던 초목들은 이제 검게 말라 비틀어져 송장처럼 널려 있었고, 메마른 바람은 절망의 울음을 토하며 거친 모래와 잿더미를 흩뿌렸다. 그 모든 파멸의 중심에, 뼈대만 남은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우뚝 솟아 있었다. ‘철혈투기장.’ 세상의 마지막 숨결이 닿는 곳이자, 운명이 결정될 곳.

    련은 투기장 한가운데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 쥐인 묵영도(墨影刀)는 희미한 달빛조차 빨아들이는 듯 검고 차가웠다. 투기장의 바닥은 오래된 핏자국들로 얼룩져 있었고, 공기 중에는 흙먼지와 함께 희미한 철분 냄새,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무인들의 시선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광기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살아남고자 하는 자,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 혹은 그저 파멸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는 자들.

    “이게… 마지막인가.”

    련의 목에서 메마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심장 속 깊이 묻어둔 상처가 다시금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는 과거의 영광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저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 투기장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심판대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내 한 인물이 그림자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검은 비단으로 감싼 채, 얼굴은 철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존재의 압도적인 기운에 투기장을 가득 메운 모든 무인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그 침묵은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죽어버린 듯 고요했다.

    “그대들, 천하의 운명이 그대들의 칼날과 주먹 끝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마라!”

    심판관의 목소리는 쇠붙이가 부딪히는 것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 울림은 평원의 끝까지 메아리쳤다.

    “어둠의 심연은 이미 세상을 삼키고 있다. 그대들이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은 이제 그 심연의 그림자에 갇혀 마지막 고통을 비명 지르고 있다! 오직 한 명의 승자만이 그 심연을 꿰뚫고 ‘창세의 심장’을 쟁취하여 세상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련은 고개를 들어 심판관을 응시했다. 창세의 심장. 태초의 힘이 담겨 있다는 전설의 유물. 그것이 어둠의 심연을 물리칠 유일한 열쇠라고 했다. 하지만 그 심장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명뿐. 그리고 그 힘은 사용자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고도 했다. 승자가 곧 희생자가 되는 잔혹한 섭리.

    “대신… 승자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심판관의 말이 련의 귓가에 맴돌았다. 모든 것을 잃는다. 잃을 것조차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속 한편에는 여전히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흐릿한 기억 속, 따뜻했던 웃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자, 이제 시작이다.”

    심판관의 손짓과 함께 투기장의 거대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서서히 열렸다. 그 안에서 어둠 속의 첫 번째 대결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거대한 철퇴를 어깨에 멘 거구의 사내였다. ‘철쇄마인(鐵鎖魔人)’ 갈륜.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진동했고, 그의 눈빛은 굶주린 짐승처럼 광기로 번들거렸다.

    “하하하! 첫 번째 먹잇감이 저리도 연약해 보이는군!” 갈륜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철퇴를 휘둘러 보였다. “세상의 운명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그저 힘을 쟁취하고 싶을 뿐!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은 찢어발겨주마!”

    련은 아무 말 없이 묵영도를 고쳐 잡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심연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시끄럽군.” 련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처럼 낮게 깔렸다. “그 입 다물게 해주지.”

    갈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육중한 몸에서 검붉은 투기(鬪氣)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투기장의 바닥에 균열이 생기고, 주변의 공기가 비틀리는 듯했다.

    “건방진 꼬맹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갈륜은 지축을 뒤흔드는 발걸음으로 련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철퇴가 허공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련의 머리 위로 쇄도했다. 파괴적인 힘에 의해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련은 그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한 송이 꽃잎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그의 묵영도는 빛보다 빠르게 허공을 갈랐고, 갈륜의 철퇴가 바닥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내기도 전에, 련은 이미 갈륜의 등 뒤에 서 있었다.

    “크헉!”

    갈륜의 등에 깊은 참격이 새겨졌다. 검은 피가 솟구치며 그의 갑옷을 적셨다. 그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련의 움직임은 그보다 몇 수 앞서 있었다. 련의 묵영도가 다시 한번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갈륜의 거대한 팔 하나가 뚝 떨어져 나가며 바닥에 뒹굴었다.

    “이… 이럴 수가…!” 갈륜의 눈빛에 광기 대신 경악이 가득 찼다. 그는 한 팔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끓어오르는 투지를 다시 불태우려 했다. 하지만 이미 승부는 결정된 후였다.

    련의 눈빛은 마치 죽음을 선고하는 심판관처럼 차가웠다. 그의 묵영도가 갈륜의 심장을 정확히 겨냥했다. 그림자가 칼날을 따라 움직이는 듯, 련의 기술은 마치 실체가 없는 환영 같았다.

    “너의 광기는 여기까지다.”

    묵영도가 갈륜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그의 거대한 몸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갈륜은 바닥에 쓰러졌고, 그의 눈은 텅 빈 채 천장을 응시했다. 심판관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심판의 무도회’의 시작이었다. 자비도, 영광도 없는 오직 파괴와 생존만이 존재하는 잔혹한 연대기.

    련은 묵영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그의 시선은 투기장 바깥, 어둠의 심연이 스멀거리는 황혼의 평원 저 너머로 향했다. 이 싸움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끝없는 어둠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남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그는 스스로 어둠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잔혹한 예감과 함께.

  • 다크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황혼의 평원, 그 끝없이 펼쳐진 암갈색 대지 위로 찢겨 나간 하늘이 시시각각 피를 토하는 것처럼 붉게 물들었다. 한때 생명으로 가득했던 초목들은 이제 검게 말라 비틀어져 송장처럼 널려 있었고, 메마른 바람은 절망의 울음을 토하며 거친 모래와 잿더미를 흩뿌렸다. 그 모든 파멸의 중심에, 뼈대만 남은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우뚝 솟아 있었다. ‘철혈투기장.’ 세상의 마지막 숨결이 닿는 곳이자, 운명이 결정될 곳.

    련은 투기장 한가운데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 쥐인 묵영도(墨影刀)는 희미한 달빛조차 빨아들이는 듯 검고 차가웠다. 투기장의 바닥은 오래된 핏자국들로 얼룩져 있었고, 공기 중에는 흙먼지와 함께 희미한 철분 냄새,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장함이 감돌았다.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무인들의 시선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광기와 결의가 서려 있었다. 살아남고자 하는 자,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자, 혹은 그저 파멸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으려는 자들.

    “이게… 마지막인가.”

    련의 목에서 메마른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심장 속 깊이 묻어둔 상처가 다시금 저릿하게 아파왔다. 그는 과거의 영광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저 이 모든 것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때, 투기장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심판대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이내 한 인물이 그림자를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을 검은 비단으로 감싼 채, 얼굴은 철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 존재의 압도적인 기운에 투기장을 가득 메운 모든 무인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그 침묵은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죽어버린 듯 고요했다.

    “그대들, 천하의 운명이 그대들의 칼날과 주먹 끝에 달려 있음을 잊지 마라!”

    심판관의 목소리는 쇠붙이가 부딪히는 것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 울림은 평원의 끝까지 메아리쳤다.

    “어둠의 심연은 이미 세상을 삼키고 있다. 그대들이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은 이제 그 심연의 그림자에 갇혀 마지막 고통을 비명 지르고 있다! 오직 한 명의 승자만이 그 심연을 꿰뚫고 ‘창세의 심장’을 쟁취하여 세상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련은 고개를 들어 심판관을 응시했다. 창세의 심장. 태초의 힘이 담겨 있다는 전설의 유물. 그것이 어둠의 심연을 물리칠 유일한 열쇠라고 했다. 하지만 그 심장을 감당할 수 있는 자는 오직 한 명뿐. 그리고 그 힘은 사용자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고도 했다. 승자가 곧 희생자가 되는 잔혹한 섭리.

    “대신… 승자는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심판관의 말이 련의 귓가에 맴돌았다. 모든 것을 잃는다. 잃을 것조차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속 한편에는 여전히 지키고 싶은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흐릿한 기억 속, 따뜻했던 웃음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자, 이제 시작이다.”

    심판관의 손짓과 함께 투기장의 거대한 철문이 굉음을 내며 서서히 열렸다. 그 안에서 어둠 속의 첫 번째 대결 상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거대한 철퇴를 어깨에 멘 거구의 사내였다. ‘철쇄마인(鐵鎖魔人)’ 갈륜. 그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닥이 진동했고, 그의 눈빛은 굶주린 짐승처럼 광기로 번들거렸다.

    “하하하! 첫 번째 먹잇감이 저리도 연약해 보이는군!” 갈륜이 기괴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철퇴를 휘둘러 보였다. “세상의 운명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나는 그저 힘을 쟁취하고 싶을 뿐! 내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은 찢어발겨주마!”

    련은 아무 말 없이 묵영도를 고쳐 잡았다. 그의 눈빛은 마치 심연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시끄럽군.” 련의 목소리는 바람 소리처럼 낮게 깔렸다. “그 입 다물게 해주지.”

    갈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육중한 몸에서 검붉은 투기(鬪氣)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투기장의 바닥에 균열이 생기고, 주변의 공기가 비틀리는 듯했다.

    “건방진 꼬맹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갈륜은 지축을 뒤흔드는 발걸음으로 련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철퇴가 허공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련의 머리 위로 쇄도했다. 파괴적인 힘에 의해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련은 그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한 송이 꽃잎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그의 묵영도는 빛보다 빠르게 허공을 갈랐고, 갈륜의 철퇴가 바닥에 거대한 구덩이를 파내기도 전에, 련은 이미 갈륜의 등 뒤에 서 있었다.

    “크헉!”

    갈륜의 등에 깊은 참격이 새겨졌다. 검은 피가 솟구치며 그의 갑옷을 적셨다. 그는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돌리려 했지만, 련의 움직임은 그보다 몇 수 앞서 있었다. 련의 묵영도가 다시 한번 번개처럼 휘둘러졌다. 갈륜의 거대한 팔 하나가 뚝 떨어져 나가며 바닥에 뒹굴었다.

    “이… 이럴 수가…!” 갈륜의 눈빛에 광기 대신 경악이 가득 찼다. 그는 한 팔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끓어오르는 투지를 다시 불태우려 했다. 하지만 이미 승부는 결정된 후였다.

    련의 눈빛은 마치 죽음을 선고하는 심판관처럼 차가웠다. 그의 묵영도가 갈륜의 심장을 정확히 겨냥했다. 그림자가 칼날을 따라 움직이는 듯, 련의 기술은 마치 실체가 없는 환영 같았다.

    “너의 광기는 여기까지다.”

    묵영도가 갈륜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 그의 거대한 몸은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갈륜은 바닥에 쓰러졌고, 그의 눈은 텅 빈 채 천장을 응시했다. 심판관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심판의 무도회’의 시작이었다. 자비도, 영광도 없는 오직 파괴와 생존만이 존재하는 잔혹한 연대기.

    련은 묵영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이제 그의 시선은 투기장 바깥, 어둠의 심연이 스멀거리는 황혼의 평원 저 너머로 향했다. 이 싸움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끝없는 어둠 속에서, 진정으로 살아남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둠을 걷어내기 위해, 그는 스스로 어둠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잔혹한 예감과 함께.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첫 번째 장: 심연의 부름

    세상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진무영은 말없이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때는 푸르고 드높았던 창공이었다. 허나 이제 그 위로는 언제나 옅은 먹빛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처럼, 혹은 깊은 심해에서 스며 나온 먹물처럼 희미하게 세상을 뒤덮는 검은 장막. 사람들은 그것을 ‘검은 그림자’라 불렀고, 그 아래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변고들을 운명이라 체념했다.

    강호는 더 이상 강호가 아니었다.

    과거, 의협과 패기가 넘치던 무림인들의 발걸음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림맹의 정파와 사파, 마교의 삼분천하(三分天下)를 논하던 시대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이제는 단 하나의 질문만이 강호를 지배했다.

    살아남을 수 있는가?

    몇 해 전부터였다. 세상의 이치와 어긋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산천은 제 색을 잃고 핏물처럼 검붉게 물들었다. 짐승들은 알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서로를 물어뜯거나 기형적으로 변모했다. 심지어 사람마저도, 명경지수(明鏡止水) 같던 심신이 하루아침에 탁해지거나, 이성을 잃고 제 부모형제를 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특히 기괴한 것은 무림인들이었다.
    수십 년 공력을 쌓아 올린 강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초라한 몰골로 변해, 하늘을 향해 기괴한 울음을 터뜨리거나 제 살점을 뜯어먹는 추태를 보였다. 그들의 단전에서 흘러나와야 할 순수한 내공은 오염된 탁기(濁氣)로 변질되어, 몸과 정신을 갉아먹었다.

    진무영은 폐허가 된 주막터를 지나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한때는 술잔이 오가고 무용담이 꽃피던 곳이었다. 지금은 썩은 나무 기둥과 해골 몇 개가 뒹굴 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허리에 찬 낡은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그의 이름은 진무영. ‘그림자 없는 검’이라 불리던 쾌검의 달인이자, 강호가 가장 암울한 시기에 등장한 기재(奇才) 중 하나였다. 허나 그조차도 이 미지의 재앙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질 뿐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재앙의 근원이 강호의 힘겨루기나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그것은 저 검은 장막 너머에서, 태고의 시간부터 잠들어 있다가 이제야 눈을 뜨기 시작한 무언가의 그림자였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저 차원의 존재. 진무영은 그 존재를 ‘심연’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심연은, 서서히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협객?”

    폐허 속에서 튀어나온 누더기 옷차림의 노인이 진무영을 가로막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희끗한 머리카락, 마른 가지 같은 팔. 노인의 얼굴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진무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황혼객잔으로 가는 길입니다.”

    황혼객잔. 강호의 모든 문파와 세력들이 모이기로 한 약속 장소였다.
    역사상 유례없는 ‘천하비무대전(天下比武大戰)’을 개최하기 위해서.

    “거기로 가면 안 됩니다! 그곳은… 그곳은 이미 눈을 떴소!” 노인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으로 황혼객잔 방향을 가리켰다. “심연이… 심연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오!”

    진무영은 노인의 광기 어린 외침을 무덤덤하게 들었다.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 심연의 기운에 오염된 자들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저마다의 공포에 휩싸여 괴로워했다.

    “저에게 갈 길이 있습니다.” 진무영은 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부드럽게 말했다.

    “안 돼! 당신마저… 그 눈에 사로잡힐 수는 없어! 그 놈들은 인간이 아니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노인은 갑자기 돌변하여 진무영에게 달려들었다. 마른 팔은 짐승처럼 휘둘러졌고, 날카로운 손톱은 진무영의 얼굴을 향했다.

    진무영은 가볍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노인의 눈은 이미 온전치 못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어둠 속의 그림자를 쫓는 짐승의 눈빛이었다.

    진무영은 노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어르신.”

    노인은 짐승 같은 신음을 내며 진무영의 팔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은 검은색이었다. 심연의 기운에 깊이 침식된 자들의 공통된 증상이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고,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진무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 짧은 내공이 모였다. 살기(殺氣) 없는 기운이었지만, 노인의 머리에 닿자 순간적으로 모든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노인은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축 늘어진 팔다리. 광기에 가득했던 얼굴에는 일순간 평화로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편히 쉬세요.”

    진무영은 노인의 눈을 감겨주고 몸을 돌렸다. 강호의 병든 모습이었다. 그는 수많은 이들을 이렇게 직접 제 손으로 편안하게 해주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저며드는 고통을 느꼈다.

    황혼객잔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길가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뻗어 기괴한 형상을 이루었고, 핏빛으로 물든 잎새들은 바람에 스산한 소리를 냈다. 산 능선을 따라 흐르는 기운은 분명 평범한 대지의 기운이 아니었다. 혼탁하고, 끈적이며, 듣기 싫은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진무영은 묵묵히 걸었다. 그의 검이 언젠가 이 세상을 깨끗이 벨 수 있을까?
    아니, 심연은 베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공포였다.

    왜 무림맹은 이 대회를 열었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분명했다.
    “천하비무대전에서 우승한 자에게는 심연의 근원을 찾아 그것을 봉인할 임무가 주어진다.”
    헛소리였다. 봉인이라니. 인간이 감히 봉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무영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또 다른 이유를 직감했다. 무림맹주와 각 문파의 수뇌부가 이토록 필사적인 것은, 단순한 영웅 선발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승자에게 주어질 진정한 ‘임무’가 무엇인지를. 그것은 어쩌면 강호의 가장 강력한 존재를 바치는 제물 의식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걸었을까. 저 멀리, 거대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협곡 사이로 황혼객잔의 지붕이 보였다.
    붉은 노을이 객잔을 비추고 있었지만, 그 빛은 따스함 대신 기이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피를 머금은 불꽃처럼.

    객잔 근처에 다다르자, 진무영은 멈춰 섰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공기 중에 섞인 미세한 탁기(濁氣)가 폐부를 찔렀다. 이 객잔은… 심연의 기운이 더욱 농밀하게 배어 있었다. 마치 심연 자체가 이 객잔의 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객잔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정파의 도복을 입은 자들, 사파의 짙은 옷차림, 마교의 검은 갑옷.
    평소라면 칼끝을 겨눌 원수들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강자 특유의 오만함 대신 깊은 불안과 체념이 서려 있었다.

    진무영은 그들 사이를 헤치고 객잔의 입구로 향했다.
    객잔 문은 육중한 흑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용과 봉황이 새겨져 있었지만, 어딘가 일그러지고 뒤틀린 형상이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웅성거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숨 막히는 정적과,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주 희미한, 뼈를 긁는 듯한 소음이었다.

    진무영은 객잔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둠에 잠겨 있던 객잔 내부에는 거대한 홀이 펼쳐져 있었다. 홀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연무대가 자리했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무림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연무대 정면, 가장 높은 자리에 마련된 단상에는 무림맹주와 각 문파의 수뇌부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깊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진무영의 시선은 단상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석상 하나가 서 있었다. 고대의 신상처럼 보였지만, 그 형상은 어떠한 생명체도 닮지 않았다.
    날개 없는 비행체의 파편처럼, 혹은 태초의 혼돈이 응축된 덩어리처럼.
    그 석상에서는 미약하지만 끊임없이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객잔 안의 모든 무림인들이 그 기운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그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심연의 그림자.
    아니, 그림자가 아니었다. 심연 그 자체였다.
    대회가 열린다는 이 객잔 자체가, 심연의 문이었던 것이다.

    정적이 흘렀다.
    무림맹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울렸다.
    “천하의 모든 무림인들이여, 경청하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공이 실려 객잔 전체를 진동시켰다.

    “우리는 지금, 강호의 존망을 결정할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심연의 그림자는 이미 우리의 발밑까지 드리워졌고, 더 이상 피할 곳은 없다.”
    맹주의 시선이 객잔에 모인 모든 무림인들을 훑었다. 그의 눈빛에는 절박함이 역력했다.

    “이에 우리는 천하비무대전을 개최한다. 이 대회는 강호제일인을 가리는 단순한 무예 대결이 아니다. 이 대회는… 심연에 대항할 마지막 희망을 찾기 위한 것이다.”

    진무영은 맹주의 말을 들으며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 희망이라. 정말 그럴까?

    맹주의 시선이 연무대 뒤편의 거대한 석상을 향했다.
    그리고 그는 끔찍한 진실을 고했다.

    “천하비무대전의 진정한 목적은… 이 심연의 핵과 공명할 수 있는 존재를 찾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승자는… 심연의 힘을 받아들여, 이 강호를… 구원해야 한다.”

    정적. 깊은 정적.
    무림인들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스쳤다.
    심연의 힘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자멸이었다.
    맹주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았다.

    진무영은 석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심연의 핵.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기괴한 존재.
    그것과 공명하는 자.
    그것은 곧 심연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를 의미했다.
    구원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심연의 심장이 될 것인가.

    진무영의 낡은 검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이 대결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강호의 마지막 영광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집어삼킬 심연의 심연인가.
    대회는, 시작되었다.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첫 번째 장: 심연의 부름

    세상은 병들어가고 있었다.

    진무영은 말없이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때는 푸르고 드높았던 창공이었다. 허나 이제 그 위로는 언제나 옅은 먹빛 기운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림자처럼, 혹은 깊은 심해에서 스며 나온 먹물처럼 희미하게 세상을 뒤덮는 검은 장막. 사람들은 그것을 ‘검은 그림자’라 불렀고, 그 아래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변고들을 운명이라 체념했다.

    강호는 더 이상 강호가 아니었다.

    과거, 의협과 패기가 넘치던 무림인들의 발걸음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무림맹의 정파와 사파, 마교의 삼분천하(三分天下)를 논하던 시대는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이제는 단 하나의 질문만이 강호를 지배했다.

    살아남을 수 있는가?

    몇 해 전부터였다. 세상의 이치와 어긋나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산천은 제 색을 잃고 핏물처럼 검붉게 물들었다. 짐승들은 알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서로를 물어뜯거나 기형적으로 변모했다. 심지어 사람마저도, 명경지수(明鏡止水) 같던 심신이 하루아침에 탁해지거나, 이성을 잃고 제 부모형제를 해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특히 기괴한 것은 무림인들이었다.
    수십 년 공력을 쌓아 올린 강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초라한 몰골로 변해, 하늘을 향해 기괴한 울음을 터뜨리거나 제 살점을 뜯어먹는 추태를 보였다. 그들의 단전에서 흘러나와야 할 순수한 내공은 오염된 탁기(濁氣)로 변질되어, 몸과 정신을 갉아먹었다.

    진무영은 폐허가 된 주막터를 지나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한때는 술잔이 오가고 무용담이 꽃피던 곳이었다. 지금은 썩은 나무 기둥과 해골 몇 개가 뒹굴 뿐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허리에 찬 낡은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그의 이름은 진무영. ‘그림자 없는 검’이라 불리던 쾌검의 달인이자, 강호가 가장 암울한 시기에 등장한 기재(奇才) 중 하나였다. 허나 그조차도 이 미지의 재앙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해질 뿐이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 모든 재앙의 근원이 강호의 힘겨루기나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그것은 저 검은 장막 너머에서, 태고의 시간부터 잠들어 있다가 이제야 눈을 뜨기 시작한 무언가의 그림자였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저 차원의 존재. 진무영은 그 존재를 ‘심연’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심연은, 서서히 세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협객?”

    폐허 속에서 튀어나온 누더기 옷차림의 노인이 진무영을 가로막았다. 초점 없는 눈동자와 희끗한 머리카락, 마른 가지 같은 팔. 노인의 얼굴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진무영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황혼객잔으로 가는 길입니다.”

    황혼객잔. 강호의 모든 문파와 세력들이 모이기로 한 약속 장소였다.
    역사상 유례없는 ‘천하비무대전(天下比武大戰)’을 개최하기 위해서.

    “거기로 가면 안 됩니다! 그곳은… 그곳은 이미 눈을 떴소!” 노인이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손가락으로 황혼객잔 방향을 가리켰다. “심연이… 심연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오!”

    진무영은 노인의 광기 어린 외침을 무덤덤하게 들었다. 이미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 심연의 기운에 오염된 자들은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저마다의 공포에 휩싸여 괴로워했다.

    “저에게 갈 길이 있습니다.” 진무영은 검의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부드럽게 말했다.

    “안 돼! 당신마저… 그 눈에 사로잡힐 수는 없어! 그 놈들은 인간이 아니야!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노인은 갑자기 돌변하여 진무영에게 달려들었다. 마른 팔은 짐승처럼 휘둘러졌고, 날카로운 손톱은 진무영의 얼굴을 향했다.

    진무영은 가볍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노인의 눈은 이미 온전치 못했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어둠 속의 그림자를 쫓는 짐승의 눈빛이었다.

    진무영은 노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신 차리세요, 어르신.”

    노인은 짐승 같은 신음을 내며 진무영의 팔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침은 검은색이었다. 심연의 기운에 깊이 침식된 자들의 공통된 증상이었다. 이성을 완전히 잃고,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진무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 짧은 내공이 모였다. 살기(殺氣) 없는 기운이었지만, 노인의 머리에 닿자 순간적으로 모든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노인은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축 늘어진 팔다리. 광기에 가득했던 얼굴에는 일순간 평화로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편히 쉬세요.”

    진무영은 노인의 눈을 감겨주고 몸을 돌렸다. 강호의 병든 모습이었다. 그는 수많은 이들을 이렇게 직접 제 손으로 편안하게 해주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저며드는 고통을 느꼈다.

    황혼객잔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길가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를 뻗어 기괴한 형상을 이루었고, 핏빛으로 물든 잎새들은 바람에 스산한 소리를 냈다. 산 능선을 따라 흐르는 기운은 분명 평범한 대지의 기운이 아니었다. 혼탁하고, 끈적이며, 듣기 싫은 비명 소리가 끊이지 않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진무영은 묵묵히 걸었다. 그의 검이 언젠가 이 세상을 깨끗이 벨 수 있을까?
    아니, 심연은 베어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존재의 근간을 뒤흔드는 공포였다.

    왜 무림맹은 이 대회를 열었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분명했다.
    “천하비무대전에서 우승한 자에게는 심연의 근원을 찾아 그것을 봉인할 임무가 주어진다.”
    헛소리였다. 봉인이라니. 인간이 감히 봉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무영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또 다른 이유를 직감했다. 무림맹주와 각 문파의 수뇌부가 이토록 필사적인 것은, 단순한 영웅 선발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승자에게 주어질 진정한 ‘임무’가 무엇인지를. 그것은 어쩌면 강호의 가장 강력한 존재를 바치는 제물 의식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걸었을까. 저 멀리, 거대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협곡 사이로 황혼객잔의 지붕이 보였다.
    붉은 노을이 객잔을 비추고 있었지만, 그 빛은 따스함 대신 기이한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피를 머금은 불꽃처럼.

    객잔 근처에 다다르자, 진무영은 멈춰 섰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공기 중에 섞인 미세한 탁기(濁氣)가 폐부를 찔렀다. 이 객잔은… 심연의 기운이 더욱 농밀하게 배어 있었다. 마치 심연 자체가 이 객잔의 심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객잔 주변에는 이미 수많은 무림인들이 모여 있었다.
    정파의 도복을 입은 자들, 사파의 짙은 옷차림, 마교의 검은 갑옷.
    평소라면 칼끝을 겨눌 원수들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침묵 속에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강자 특유의 오만함 대신 깊은 불안과 체념이 서려 있었다.

    진무영은 그들 사이를 헤치고 객잔의 입구로 향했다.
    객잔 문은 육중한 흑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위에는 용과 봉황이 새겨져 있었지만, 어딘가 일그러지고 뒤틀린 형상이었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웅성거림이 아니었다.
    오히려 숨 막히는 정적과,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주 희미한, 뼈를 긁는 듯한 소음이었다.

    진무영은 객잔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둠에 잠겨 있던 객잔 내부에는 거대한 홀이 펼쳐져 있었다. 홀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연무대가 자리했고, 그 주변으로 수많은 무림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연무대 정면, 가장 높은 자리에 마련된 단상에는 무림맹주와 각 문파의 수뇌부들이 자리해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눈빛에는 깊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진무영의 시선은 단상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석상 하나가 서 있었다. 고대의 신상처럼 보였지만, 그 형상은 어떠한 생명체도 닮지 않았다.
    날개 없는 비행체의 파편처럼, 혹은 태초의 혼돈이 응축된 덩어리처럼.
    그 석상에서는 미약하지만 끊임없이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왔다.
    객잔 안의 모든 무림인들이 그 기운에 침식당하고 있었다.

    그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심연의 그림자.
    아니, 그림자가 아니었다. 심연 그 자체였다.
    대회가 열린다는 이 객잔 자체가, 심연의 문이었던 것이다.

    정적이 흘렀다.
    무림맹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는 무겁게 울렸다.
    “천하의 모든 무림인들이여, 경청하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내공이 실려 객잔 전체를 진동시켰다.

    “우리는 지금, 강호의 존망을 결정할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심연의 그림자는 이미 우리의 발밑까지 드리워졌고, 더 이상 피할 곳은 없다.”
    맹주의 시선이 객잔에 모인 모든 무림인들을 훑었다. 그의 눈빛에는 절박함이 역력했다.

    “이에 우리는 천하비무대전을 개최한다. 이 대회는 강호제일인을 가리는 단순한 무예 대결이 아니다. 이 대회는… 심연에 대항할 마지막 희망을 찾기 위한 것이다.”

    진무영은 맹주의 말을 들으며 손바닥에 힘을 주었다.
    마지막 희망이라. 정말 그럴까?

    맹주의 시선이 연무대 뒤편의 거대한 석상을 향했다.
    그리고 그는 끔찍한 진실을 고했다.

    “천하비무대전의 진정한 목적은… 이 심연의 핵과 공명할 수 있는 존재를 찾는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승자는… 심연의 힘을 받아들여, 이 강호를… 구원해야 한다.”

    정적. 깊은 정적.
    무림인들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스쳤다.
    심연의 힘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자멸이었다.
    맹주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알았다.

    진무영은 석상을 다시 바라보았다.
    심연의 핵.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기괴한 존재.
    그것과 공명하는 자.
    그것은 곧 심연의 부름에 응답하는 자를 의미했다.
    구원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심연의 심장이 될 것인가.

    진무영의 낡은 검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이 대결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강호의 마지막 영광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집어삼킬 심연의 심연인가.
    대회는, 시작되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잿빛 새벽

    차가운 밤공기가 허물어진 도시의 뼈대 사이를 휘감았다. 한때 번성했을 거대한 건축물들은 이제 흉측한 상처 자국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달빛마저 희미한 회색 구름에 가려져, 세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잠겨들었다. 바람이 찢어진 천막 조각과 깡통들을 나뒹굴게 하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강하준은 숨을 들이쉬었다. 낡은 방한복 사이로 파고드는 한기는 폐부까지 얼리는 듯했지만, 그의 심장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비루한 삶의 끝에서, 그들은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칼이라기보다는 녹슨 쇠막대와 투박한 곡괭이에 가까웠지만, 그들의 절규는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로웠다.

    “준비됐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하준은 고개를 돌렸다. 이진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두 눈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빛났다. 스무 살, 그녀의 어깨에는 세상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 무게는 그녀를 꺾는 대신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진아는 어둠 속에서 손에 쥔 사제 단검의 날을 엄지로 쓸었다. 싸구려 고철을 벼려 만든 칼날이 달빛을 받아 한순간 번뜩였다.

    “언제든.” 하준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그 속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김노인께서는?”

    “뒤에서 대기 중이셔. 신호만 기다리고 계실 거야.”

    김노인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천상의 황금 제국이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의 역사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노인 중 한 명. 그는 이 반란의 불씨를 지핀 장본인이었다. 황금 제국은 온갖 자원을 독점하고, 백성들의 피땀을 착취하며 거대한 성을 쌓았다. 굶주림은 일상이 되었고, 역병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제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들의 배는 탐욕으로 부풀어 올랐고, 백성들의 절규는 그저 바람 소리에 불과했다.

    이제, 그 바람이 폭풍이 되어 불어닥칠 차례였다.

    하준의 손끝에 닿은 것은 낡은 지도 조각이었다. 제국군 보급창의 배치도. 진아의 동생, 열여섯 살 혁이가 제국군 병사들의 눈을 피해 목숨 걸고 빼내온 정보였다. 어설프게 그려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훑는 하준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보급창 북쪽 외곽에 있는 낡은 환풍구. 보초들의 순찰 경로상 사각지대에 위치한 유일한 침투 지점이었다.

    “예정대로 환풍구를 통해 진입한다. 진아, 넌 후방 경계와 엄호를 맡아줘.”

    “알겠어.”

    그들의 팀은 여섯 명. 대부분이 하준과 진아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굶주림에 지쳐 비쩍 마른 몸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절박한 생존 의지와 불타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 임무의 성패는 그들의 내일에 직결되어 있었다. 실패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는 싸우다 죽는 것을 택하리라.

    허물어진 건물 잔해를 밟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콘크리트 조각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발아래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금 같았다. 제국군 병사들의 검은 그림자가 어둠 속을 배회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그들은 심장을 졸였다. 제국군은 ‘철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검은 제복과 번쩍이는 금속 헬멧, 그리고 등에 매단 자동 소총. 그들의 존재는 평민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마침내 목표 지점, 보급창의 북쪽 벽에 도달했다. 웅장한 철제 담장 너머로 보급창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하자, 녹슨 철제 환풍구가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환풍구의 고정 나사 몇 개가 느슨해져 있었다. 혁이가 준 정보는 정확했다.

    하준은 신호를 보냈다. 두 명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한 명은 몽둥이를 쥔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마른 체구지만 손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소년이었다. 소년은 능숙하게 몽키 스패너를 꺼내들어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끼이익, 쩌억.’ 낡은 금속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조용히 해!” 진아가 속삭였다. 그녀는 사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소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작업했다. 다행히 근처 보초는 순찰 경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몇 분 후, 환풍구 덮개가 느슨해졌다. 하준은 조용히 덮개를 떼어내고 안을 들여다봤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역류했다. 환풍구는 폭이 좁고 어두웠지만, 그들의 몸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은 충분했다.

    “내가 먼저 들어간다.” 하준이 말했다. “진아는 후방 경계 맡아. 나머지는 내가 내부에서 문을 열면 즉시 진입.”

    그는 비좁은 환풍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먼지와 거미줄이 얼굴에 엉겨 붙었다. 숨쉬기가 답답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어갔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어둠 속 터널을 기어 한참 만에야, 하준은 작은 철망에 가로막혔다. 철망 너머로는 거대한 창고의 내부가 어렴풋이 보였다. 산처럼 쌓인 보급 상자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저 안에, 그들의 모든 희망이 담겨 있었다.

    철망을 뜯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철망을 떼어내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발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섰다. 창고 안은 어두웠지만, 멀리서 희미하게 비치는 감시등 빛이 길을 안내했다. 그의 손에 쥔 것은 제국군이 버린 낡은 권총 한 자루였다. 총알은 단 세 발. 최후의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다.

    목표는 창고 관리실. 이곳의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해야 했다. 그는 벽을 따라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콰직.’ 멀리서 쥐 밟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그는 숨을 죽였다. 제국군 병사들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의 묵직한 군화 소리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때였다.

    “거기 누구냐!”

    하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보초였다. 그가 보지 못한 사각지대에 보초가 한 명 더 있었다는 말인가?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쿵, 쿵, 쿵.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하준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권총을 겨눴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병사의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그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제복, 번쩍이는 헬멧. 철벽 부대 병사였다.
    “누구냐고 묻잖아! 귀가 먹었나?”

    병사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준은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숨소리마저 낼 수 없었다. 이대로 들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동료들, 김노인, 그리고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날 터였다.

    그때, 등 뒤에서 희미한 ‘휙’ 소리가 들렸다.
    병사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경악한 눈으로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의 손전등이 바닥을 구르며 사방을 비췄다. 어둠 속에서 진아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단검은 붉은 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말없이 하준을 응시했다. ‘괜찮아?’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침착함은 언제나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괜찮아.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해야겠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진아가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내려오길 잘했네.”

    진아의 합류로 그들은 다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병사의 시신을 은밀하게 처리하고, 관리실 문을 향해 이동했다. 관리실 문은 전자 잠금장치로 굳게 닫혀 있었다. 하준은 낡은 전선 뭉치를 꺼내들었다. 혁이에게 배운 대로, 그는 능숙하게 전선들을 연결하고 끊기를 반복했다. ‘삐빅, 삐비빅.’ 작은 기계음이 울렸다.

    몇 분간의 긴장된 작업 끝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모니터와 수많은 버튼들이 즐비한 제어판. 하준은 망설임 없이 보안 시스템 해제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경고음이 울리는 대신, 모든 화면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성공이야!” 진아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하준은 곧장 외부 문 개방 버튼을 눌렀다. ‘우우웅-‘ 거대한 기계음과 함께 보급창의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찬란한 새벽의 여명이 동쪽 하늘을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린 문 밖에는,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김노인을 필두로 한 그들의 눈빛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하준은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진아가 따랐다.
    “동지들! 보아라! 저 안을 보아라!”
    그가 외치자, 사람들은 주저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보급창 내부는 그야말로 풍요의 보고였다. 제국군이 저장해 둔 곡물 자루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윤기 흐르는 쌀, 튼실한 밀가루, 염장 고기와 통조림. 굶주림에 지쳐 뼈만 남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떤 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정신없이 곡물 자루를 끌어안았다. 아이들은 난생 처음 보는 풍성한 먹거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것이다! 우리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것을 제국이 빼앗아 간 것이었다!”
    하준의 목소리는 새벽 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더 이상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힘으로 빼앗긴 것을 되찾을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한 가닥 희망, 그리고 거대한 제국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작은 확신이었다.

    김노인이 앞으로 나와 하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름진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잘했다, 하준아. 잘했어… 이것이 시작이다.”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국은 그들의 작은 반란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칠 터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는 빼앗긴 희망이 들려 있었고, 그들의 가슴 속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질 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잿빛 새벽

    차가운 밤공기가 허물어진 도시의 뼈대 사이를 휘감았다. 한때 번성했을 거대한 건축물들은 이제 흉측한 상처 자국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달빛마저 희미한 회색 구름에 가려져, 세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잠겨들었다. 바람이 찢어진 천막 조각과 깡통들을 나뒹굴게 하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강하준은 숨을 들이쉬었다. 낡은 방한복 사이로 파고드는 한기는 폐부까지 얼리는 듯했지만, 그의 심장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비루한 삶의 끝에서, 그들은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칼이라기보다는 녹슨 쇠막대와 투박한 곡괭이에 가까웠지만, 그들의 절규는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로웠다.

    “준비됐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하준은 고개를 돌렸다. 이진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두 눈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빛났다. 스무 살, 그녀의 어깨에는 세상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 무게는 그녀를 꺾는 대신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진아는 어둠 속에서 손에 쥔 사제 단검의 날을 엄지로 쓸었다. 싸구려 고철을 벼려 만든 칼날이 달빛을 받아 한순간 번뜩였다.

    “언제든.” 하준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그 속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김노인께서는?”

    “뒤에서 대기 중이셔. 신호만 기다리고 계실 거야.”

    김노인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천상의 황금 제국이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의 역사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노인 중 한 명. 그는 이 반란의 불씨를 지핀 장본인이었다. 황금 제국은 온갖 자원을 독점하고, 백성들의 피땀을 착취하며 거대한 성을 쌓았다. 굶주림은 일상이 되었고, 역병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제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들의 배는 탐욕으로 부풀어 올랐고, 백성들의 절규는 그저 바람 소리에 불과했다.

    이제, 그 바람이 폭풍이 되어 불어닥칠 차례였다.

    하준의 손끝에 닿은 것은 낡은 지도 조각이었다. 제국군 보급창의 배치도. 진아의 동생, 열여섯 살 혁이가 제국군 병사들의 눈을 피해 목숨 걸고 빼내온 정보였다. 어설프게 그려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훑는 하준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보급창 북쪽 외곽에 있는 낡은 환풍구. 보초들의 순찰 경로상 사각지대에 위치한 유일한 침투 지점이었다.

    “예정대로 환풍구를 통해 진입한다. 진아, 넌 후방 경계와 엄호를 맡아줘.”

    “알겠어.”

    그들의 팀은 여섯 명. 대부분이 하준과 진아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굶주림에 지쳐 비쩍 마른 몸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절박한 생존 의지와 불타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 임무의 성패는 그들의 내일에 직결되어 있었다. 실패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는 싸우다 죽는 것을 택하리라.

    허물어진 건물 잔해를 밟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콘크리트 조각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발아래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금 같았다. 제국군 병사들의 검은 그림자가 어둠 속을 배회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그들은 심장을 졸였다. 제국군은 ‘철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검은 제복과 번쩍이는 금속 헬멧, 그리고 등에 매단 자동 소총. 그들의 존재는 평민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마침내 목표 지점, 보급창의 북쪽 벽에 도달했다. 웅장한 철제 담장 너머로 보급창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하자, 녹슨 철제 환풍구가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환풍구의 고정 나사 몇 개가 느슨해져 있었다. 혁이가 준 정보는 정확했다.

    하준은 신호를 보냈다. 두 명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한 명은 몽둥이를 쥔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마른 체구지만 손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소년이었다. 소년은 능숙하게 몽키 스패너를 꺼내들어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끼이익, 쩌억.’ 낡은 금속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조용히 해!” 진아가 속삭였다. 그녀는 사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소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작업했다. 다행히 근처 보초는 순찰 경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몇 분 후, 환풍구 덮개가 느슨해졌다. 하준은 조용히 덮개를 떼어내고 안을 들여다봤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역류했다. 환풍구는 폭이 좁고 어두웠지만, 그들의 몸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은 충분했다.

    “내가 먼저 들어간다.” 하준이 말했다. “진아는 후방 경계 맡아. 나머지는 내가 내부에서 문을 열면 즉시 진입.”

    그는 비좁은 환풍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먼지와 거미줄이 얼굴에 엉겨 붙었다. 숨쉬기가 답답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어갔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어둠 속 터널을 기어 한참 만에야, 하준은 작은 철망에 가로막혔다. 철망 너머로는 거대한 창고의 내부가 어렴풋이 보였다. 산처럼 쌓인 보급 상자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저 안에, 그들의 모든 희망이 담겨 있었다.

    철망을 뜯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철망을 떼어내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발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섰다. 창고 안은 어두웠지만, 멀리서 희미하게 비치는 감시등 빛이 길을 안내했다. 그의 손에 쥔 것은 제국군이 버린 낡은 권총 한 자루였다. 총알은 단 세 발. 최후의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다.

    목표는 창고 관리실. 이곳의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해야 했다. 그는 벽을 따라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콰직.’ 멀리서 쥐 밟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그는 숨을 죽였다. 제국군 병사들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의 묵직한 군화 소리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때였다.

    “거기 누구냐!”

    하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보초였다. 그가 보지 못한 사각지대에 보초가 한 명 더 있었다는 말인가?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쿵, 쿵, 쿵.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하준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권총을 겨눴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병사의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그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제복, 번쩍이는 헬멧. 철벽 부대 병사였다.
    “누구냐고 묻잖아! 귀가 먹었나?”

    병사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준은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숨소리마저 낼 수 없었다. 이대로 들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동료들, 김노인, 그리고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날 터였다.

    그때, 등 뒤에서 희미한 ‘휙’ 소리가 들렸다.
    병사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경악한 눈으로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의 손전등이 바닥을 구르며 사방을 비췄다. 어둠 속에서 진아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단검은 붉은 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말없이 하준을 응시했다. ‘괜찮아?’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침착함은 언제나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괜찮아.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해야겠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진아가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내려오길 잘했네.”

    진아의 합류로 그들은 다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병사의 시신을 은밀하게 처리하고, 관리실 문을 향해 이동했다. 관리실 문은 전자 잠금장치로 굳게 닫혀 있었다. 하준은 낡은 전선 뭉치를 꺼내들었다. 혁이에게 배운 대로, 그는 능숙하게 전선들을 연결하고 끊기를 반복했다. ‘삐빅, 삐비빅.’ 작은 기계음이 울렸다.

    몇 분간의 긴장된 작업 끝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모니터와 수많은 버튼들이 즐비한 제어판. 하준은 망설임 없이 보안 시스템 해제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경고음이 울리는 대신, 모든 화면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성공이야!” 진아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하준은 곧장 외부 문 개방 버튼을 눌렀다. ‘우우웅-‘ 거대한 기계음과 함께 보급창의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찬란한 새벽의 여명이 동쪽 하늘을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린 문 밖에는,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김노인을 필두로 한 그들의 눈빛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하준은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진아가 따랐다.
    “동지들! 보아라! 저 안을 보아라!”
    그가 외치자, 사람들은 주저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보급창 내부는 그야말로 풍요의 보고였다. 제국군이 저장해 둔 곡물 자루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윤기 흐르는 쌀, 튼실한 밀가루, 염장 고기와 통조림. 굶주림에 지쳐 뼈만 남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떤 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정신없이 곡물 자루를 끌어안았다. 아이들은 난생 처음 보는 풍성한 먹거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것이다! 우리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것을 제국이 빼앗아 간 것이었다!”
    하준의 목소리는 새벽 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더 이상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힘으로 빼앗긴 것을 되찾을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한 가닥 희망, 그리고 거대한 제국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작은 확신이었다.

    김노인이 앞으로 나와 하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름진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잘했다, 하준아. 잘했어… 이것이 시작이다.”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국은 그들의 작은 반란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칠 터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는 빼앗긴 희망이 들려 있었고, 그들의 가슴 속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질 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 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강현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망가진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댔다. 십 년. 세상이 뒤집힌 지 정확히 십 년이었다. 하늘은 늘 잿빛이었고, 태양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겨우 제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녹슨 철골만이 앙상하게 뼈대를 드러낸 고층 빌딩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 아래, 무너진 잔해들 위로 먼지바람이 춤을 추며 지나갔다. 매번 숨을 쉴 때마다 모래먼지가 기관지를 긁어대는 것 같았다.

    “삼촌, 괜찮아?”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로 폐허를 살피던 유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열여섯 살, 이 황폐한 세상에선 어린 나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유나의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처럼 빛나고 있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낡은 천 조각을 꺼내 입과 코를 가렸다. “괜찮다. 그저 여기가 좀 눅눅해서 말이지. 찾으려는 건 아직이야?”

    유나는 조심스럽게 파손된 통신 장비의 부품들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여기 있던 것들은 전부 고철이야. 멀쩡한 부품이 하나도 없어. 정수기 필터에 필요한 펌프 부품은 더 깊숙이 들어가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정수기. 그들에게 있어 물은 금과 같았다. 오염된 지하수나 빗물을 그대로 마셨다간 며칠을 버티기 힘들었다. 그들의 작은 은신처에 있는 간이 정수기는 생명줄이었다. 그리고 그 생명줄이 지금 멈춰버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강현은 지도를 펼쳤다. 낡고 해진 종이에는 손으로 그린 지형과 위험 구역 표시가 빼곡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외곽 구역이었다. 목표는 도시의 중심부, ‘구역 7’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옛날 공업 단지였다. 공업 단지는 버려진 기계 부품들로 가득할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젠장, 구역 7이라니.” 강현의 입술 새로 낮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거긴 철피견들이 많다고 했잖아.” 유나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묻어났다. 철피견. 변종된 들개 무리였다. 피부는 두꺼운 철판처럼 단단했고, 짐승이라기보다 움직이는 기계에 가까운 괴물이었다. 한번 사냥감을 정하면 끝까지 쫓아오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우린 다른 선택지가 없어. 이곳은 이미 샅샅이 뒤져봤고, 다른 곳으로 갈 시간도 부족해. 펌프가 멈추면 이틀 안에 바닥이 날 거야.” 강현은 무거운 배낭을 고쳐 메며 말했다. “만약 놈들과 마주치면… 넌 내가 신호할 때까지 숨어. 알았지?”

    유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허리춤에 찬 낡은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잿빛 하늘마저 붉은색으로 물드는 순간, 폐허는 더욱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철피견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좀 더 크고, 좀 더 고통스러운, 그러나 동시에 굶주림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강현은 낡은 소총을 단단히 쥐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잔해들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부서진 건물들의 그림자가 그들을 집어삼킬 듯 춤을 추었다. 한때 사무실이었을 공간에는 썩어가는 가구들과 찢겨진 서류들이 뒹굴었다. 벽에는 알 수 없는 핏자국과 함께 긁힌 자국들이 가득했다.

    “여기, 뭔가 기분 나쁜데.” 유나가 속삭였다. 그녀의 발밑에 밟힌 것은 오래된 인형의 팔이었다. 머리가 뜯겨나가고 한쪽 눈마저 없는 인형은 이곳의 비극을 웅변하는 듯했다.

    강현은 대꾸 없이 주변을 경계했다. 냄새가 좋지 않았다. 썩은 시체 냄새와 녹슨 쇠 냄새, 그리고 흙먼지가 뒤섞인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냄새는 철피견의 영역에서 자주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한참을 조용히 이동했을까.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공장 단지의 윤곽이 드러났다. 부서진 담장과 삐뚤어진 간판, 녹슨 굴뚝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저기다.” 강현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안에 부품들이 있을 거야. 유나, 넌 저 폐차량 뒤에 숨어서 대기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도망쳐. 절대 돌아보지 마.”

    유나는 강현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삼촌, 혼자 가는 건 위험해.”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어. 넌 내 뒤를 지켜줄 사람이 없으면 안 돼.” 강현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씁쓸하고 메말라 있었다. “그리고 너까지 다치면 안 되잖아.”

    유나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녀는 강현의 말대로 인근의 폐차량 더미 뒤로 몸을 숨겼다. 강현은 그녀가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후, 공장 단지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내부는 예상대로 거대한 기계들의 무덤이었다. 녹슨 컨베이어 벨트, 부서진 프레스 기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부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먼지가 자욱했고, 창문 없는 벽 사이로 희미한 빛만이 스며들어 안을 비췄다.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눈은 펌프에 맞는 부품을 찾기 위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다 한쪽 구석에서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상자.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작은 기계 부품들이 뒤섞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상자를 열자, 그의 눈에 익숙한 형태의 부품이 들어왔다. 정수기 펌프에 꼭 맞는 압력 조절 밸브. 먼지를 털어내자 새것처럼 번쩍이는 금속의 빛이 드러났다. 완벽했다.

    그는 부품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바로 그때,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세 마리,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철피견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강현은 급히 몸을 돌렸다. 공장 입구 쪽에서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거대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투박한 철판 같은 피부, 날카롭게 빛나는 송곳니, 그리고 핏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놈들은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강현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총을 치켜들었지만, 동시에 절망감에 휩싸였다. 정수기 부품은 손에 넣었지만,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젠장…!”

    맨 앞에 선 철피견이 낮은 자세로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강현은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폐허 가득 울려 퍼졌지만, 놈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의 울부짖음에 더 광포하게 돌진해왔다.

    강현은 간신히 몸을 피하며 다시 한 발을 쐈다. 하지만 놈들의 두꺼운 피부는 총알을 튕겨내거나 약한 상처만을 입힐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가장 약해 보이는 다리 부분을 노렸다. 한 마리가 비틀거렸다.

    그때, 멀리서 또 다른 총성이 울렸다. 강현이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탕!*

    가장 가까이 있던 철피견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쓰러졌다. 놀란 강현의 눈에 폐차량 더미 뒤에서 총을 든 유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강현의 낡은 소총보다 훨씬 작은 구식 권총을 쥐고 있었다.

    “유나! 뭐 하는 거야! 숨어있으라고 했잖아!” 강현은 분노와 동시에 안도감에 휩싸여 소리쳤다.

    “삼촌을 혼자 둘 순 없어!” 유나는 이를 악물고 또 한 발을 발사했다. 총알은 빗나갔지만, 놈들의 시선을 잠깐 분산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은 남은 철피견 중 한 마리의 옆구리를 정확히 노려 쐈다. 놈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제 두 마리. 하지만 남아있는 두 마리는 더욱 잔혹하게 강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나가 다시 총을 쏘려 했지만, 낡은 권총은 장전이 되지 않았다. 탄창이 비어버린 것이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유나는 총을 던져 버리고 다시 단검을 움켜쥐었다.

    “유나! 도망쳐!” 강현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철피견 한 마리가 유나를 향해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강현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남은 한 마리의 철피견을 향해 마지막 총알을 쏟아부으며 달려나갔다. 이대로 유나를 잃을 수는 없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절박한 순간, 강현의 소총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탄창을 비웠다.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현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물어뜯었다. 살이 찢기는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크아악!”

    강현은 비틀거리면서도 남은 팔로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유나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철피견의 등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었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갔다. 유나의 놀란 얼굴, 달려드는 철피견의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자신의 몸을 꿰뚫는듯한 통증.

    그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와 유나에게 돌진하던 철피견을 덮쳤다. 육중한 둔기가 놈의 머리를 강타하는 소리가 폐허에 메아리쳤다. *콰아앙!*

    철피견은 한 번의 공격으로 머리가 으스러진 채 쓰러졌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곧바로 강현을 물고 있던 철피견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으로, 거대한 그림자는 놈의 턱을 붙잡고는 일격에 목을 부러뜨렸다.

    강현은 고통 속에서도 눈을 크게 떴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때 전투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기계 병기였다. 낡고 녹슬었지만, 여전히 위압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계 병기의 어깨 위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낡은 방한모를 쓰고 두터운 가죽 코트를 걸친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들고 있던 투박한 철퇴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겼다.

    남자는 강현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기계 병기를 조종해 유나에게 다가갔다.

    “꼬마 아가씨, 무사한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의외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유나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강현은 팔의 통증을 억누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누구지?”

    남자는 강현을 돌아보았다. “나야, 뭐… 그저 길을 잃은 떠돌이 사냥꾼이지.” 그는 기계 병기를 돌려 강현에게 다가왔다. “보아하니 자네도 사냥꾼인 모양인데, 좀 무모하군. 이 구역에선 한 번에 두 마리 이상을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계 병기의 거대한 팔이 강현에게로 뻗어왔다. 강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팔은 그를 공격하는 대신, 그의 품에서 떨어진 정수기 밸브를 집어 올렸다.

    “꽤 귀한 물건이군. 이런 위험한 곳까지 올 만한 가치가 있었던 건가?” 남자는 밸브를 살펴보며 말했다.

    강현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당신이 뭘 원하는 거지?”

    남자는 피식 웃었다. “원하는 것? 글쎄, 딱히 없어. 그저… 동정심이 좀 발동했을 뿐이지. 그리고 자네가 이 도시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걸 보고 싶진 않았거든.” 그의 시선은 유나에게 향했다.

    유나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남자의 말에 천천히 강현의 곁으로 다가섰다.

    “어쨌든,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아. 이 소란에 다른 놈들이 몰려들 거야.” 남자는 기계 병기를 돌려 공장 입구를 향했다. “가던 길 가. 그리고 다음번엔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거대한 기계 병기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강현은 피 흘리는 팔을 움켜쥐고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그 남자를 경계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삼촌… 우리 정말 살았네.” 유나가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떨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 작은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강현은 유나의 손을 꽉 잡았다. 정수기 밸브는 안전하게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방금 나타났던 의문의 남자와 그의 거대한 기계 병기, 그리고 이 세상의 또 다른 위험과 알 수 없는 희망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을 터였다.

  • 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강현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망가진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댔다. 십 년. 세상이 뒤집힌 지 정확히 십 년이었다. 하늘은 늘 잿빛이었고, 태양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겨우 제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녹슨 철골만이 앙상하게 뼈대를 드러낸 고층 빌딩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 아래, 무너진 잔해들 위로 먼지바람이 춤을 추며 지나갔다. 매번 숨을 쉴 때마다 모래먼지가 기관지를 긁어대는 것 같았다.

    “삼촌, 괜찮아?”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로 폐허를 살피던 유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열여섯 살, 이 황폐한 세상에선 어린 나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유나의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처럼 빛나고 있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낡은 천 조각을 꺼내 입과 코를 가렸다. “괜찮다. 그저 여기가 좀 눅눅해서 말이지. 찾으려는 건 아직이야?”

    유나는 조심스럽게 파손된 통신 장비의 부품들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여기 있던 것들은 전부 고철이야. 멀쩡한 부품이 하나도 없어. 정수기 필터에 필요한 펌프 부품은 더 깊숙이 들어가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정수기. 그들에게 있어 물은 금과 같았다. 오염된 지하수나 빗물을 그대로 마셨다간 며칠을 버티기 힘들었다. 그들의 작은 은신처에 있는 간이 정수기는 생명줄이었다. 그리고 그 생명줄이 지금 멈춰버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강현은 지도를 펼쳤다. 낡고 해진 종이에는 손으로 그린 지형과 위험 구역 표시가 빼곡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외곽 구역이었다. 목표는 도시의 중심부, ‘구역 7’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옛날 공업 단지였다. 공업 단지는 버려진 기계 부품들로 가득할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젠장, 구역 7이라니.” 강현의 입술 새로 낮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거긴 철피견들이 많다고 했잖아.” 유나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묻어났다. 철피견. 변종된 들개 무리였다. 피부는 두꺼운 철판처럼 단단했고, 짐승이라기보다 움직이는 기계에 가까운 괴물이었다. 한번 사냥감을 정하면 끝까지 쫓아오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우린 다른 선택지가 없어. 이곳은 이미 샅샅이 뒤져봤고, 다른 곳으로 갈 시간도 부족해. 펌프가 멈추면 이틀 안에 바닥이 날 거야.” 강현은 무거운 배낭을 고쳐 메며 말했다. “만약 놈들과 마주치면… 넌 내가 신호할 때까지 숨어. 알았지?”

    유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허리춤에 찬 낡은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잿빛 하늘마저 붉은색으로 물드는 순간, 폐허는 더욱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철피견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좀 더 크고, 좀 더 고통스러운, 그러나 동시에 굶주림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강현은 낡은 소총을 단단히 쥐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잔해들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부서진 건물들의 그림자가 그들을 집어삼킬 듯 춤을 추었다. 한때 사무실이었을 공간에는 썩어가는 가구들과 찢겨진 서류들이 뒹굴었다. 벽에는 알 수 없는 핏자국과 함께 긁힌 자국들이 가득했다.

    “여기, 뭔가 기분 나쁜데.” 유나가 속삭였다. 그녀의 발밑에 밟힌 것은 오래된 인형의 팔이었다. 머리가 뜯겨나가고 한쪽 눈마저 없는 인형은 이곳의 비극을 웅변하는 듯했다.

    강현은 대꾸 없이 주변을 경계했다. 냄새가 좋지 않았다. 썩은 시체 냄새와 녹슨 쇠 냄새, 그리고 흙먼지가 뒤섞인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냄새는 철피견의 영역에서 자주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한참을 조용히 이동했을까.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공장 단지의 윤곽이 드러났다. 부서진 담장과 삐뚤어진 간판, 녹슨 굴뚝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저기다.” 강현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안에 부품들이 있을 거야. 유나, 넌 저 폐차량 뒤에 숨어서 대기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도망쳐. 절대 돌아보지 마.”

    유나는 강현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삼촌, 혼자 가는 건 위험해.”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어. 넌 내 뒤를 지켜줄 사람이 없으면 안 돼.” 강현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씁쓸하고 메말라 있었다. “그리고 너까지 다치면 안 되잖아.”

    유나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녀는 강현의 말대로 인근의 폐차량 더미 뒤로 몸을 숨겼다. 강현은 그녀가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후, 공장 단지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내부는 예상대로 거대한 기계들의 무덤이었다. 녹슨 컨베이어 벨트, 부서진 프레스 기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부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먼지가 자욱했고, 창문 없는 벽 사이로 희미한 빛만이 스며들어 안을 비췄다.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눈은 펌프에 맞는 부품을 찾기 위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다 한쪽 구석에서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상자.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작은 기계 부품들이 뒤섞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상자를 열자, 그의 눈에 익숙한 형태의 부품이 들어왔다. 정수기 펌프에 꼭 맞는 압력 조절 밸브. 먼지를 털어내자 새것처럼 번쩍이는 금속의 빛이 드러났다. 완벽했다.

    그는 부품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바로 그때,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세 마리,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철피견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강현은 급히 몸을 돌렸다. 공장 입구 쪽에서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거대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투박한 철판 같은 피부, 날카롭게 빛나는 송곳니, 그리고 핏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놈들은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강현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총을 치켜들었지만, 동시에 절망감에 휩싸였다. 정수기 부품은 손에 넣었지만,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젠장…!”

    맨 앞에 선 철피견이 낮은 자세로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강현은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폐허 가득 울려 퍼졌지만, 놈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의 울부짖음에 더 광포하게 돌진해왔다.

    강현은 간신히 몸을 피하며 다시 한 발을 쐈다. 하지만 놈들의 두꺼운 피부는 총알을 튕겨내거나 약한 상처만을 입힐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가장 약해 보이는 다리 부분을 노렸다. 한 마리가 비틀거렸다.

    그때, 멀리서 또 다른 총성이 울렸다. 강현이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탕!*

    가장 가까이 있던 철피견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쓰러졌다. 놀란 강현의 눈에 폐차량 더미 뒤에서 총을 든 유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강현의 낡은 소총보다 훨씬 작은 구식 권총을 쥐고 있었다.

    “유나! 뭐 하는 거야! 숨어있으라고 했잖아!” 강현은 분노와 동시에 안도감에 휩싸여 소리쳤다.

    “삼촌을 혼자 둘 순 없어!” 유나는 이를 악물고 또 한 발을 발사했다. 총알은 빗나갔지만, 놈들의 시선을 잠깐 분산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은 남은 철피견 중 한 마리의 옆구리를 정확히 노려 쐈다. 놈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제 두 마리. 하지만 남아있는 두 마리는 더욱 잔혹하게 강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나가 다시 총을 쏘려 했지만, 낡은 권총은 장전이 되지 않았다. 탄창이 비어버린 것이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유나는 총을 던져 버리고 다시 단검을 움켜쥐었다.

    “유나! 도망쳐!” 강현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철피견 한 마리가 유나를 향해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강현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남은 한 마리의 철피견을 향해 마지막 총알을 쏟아부으며 달려나갔다. 이대로 유나를 잃을 수는 없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절박한 순간, 강현의 소총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탄창을 비웠다.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현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물어뜯었다. 살이 찢기는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크아악!”

    강현은 비틀거리면서도 남은 팔로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유나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철피견의 등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었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갔다. 유나의 놀란 얼굴, 달려드는 철피견의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자신의 몸을 꿰뚫는듯한 통증.

    그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와 유나에게 돌진하던 철피견을 덮쳤다. 육중한 둔기가 놈의 머리를 강타하는 소리가 폐허에 메아리쳤다. *콰아앙!*

    철피견은 한 번의 공격으로 머리가 으스러진 채 쓰러졌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곧바로 강현을 물고 있던 철피견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으로, 거대한 그림자는 놈의 턱을 붙잡고는 일격에 목을 부러뜨렸다.

    강현은 고통 속에서도 눈을 크게 떴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때 전투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기계 병기였다. 낡고 녹슬었지만, 여전히 위압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계 병기의 어깨 위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낡은 방한모를 쓰고 두터운 가죽 코트를 걸친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들고 있던 투박한 철퇴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겼다.

    남자는 강현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기계 병기를 조종해 유나에게 다가갔다.

    “꼬마 아가씨, 무사한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의외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유나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강현은 팔의 통증을 억누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누구지?”

    남자는 강현을 돌아보았다. “나야, 뭐… 그저 길을 잃은 떠돌이 사냥꾼이지.” 그는 기계 병기를 돌려 강현에게 다가왔다. “보아하니 자네도 사냥꾼인 모양인데, 좀 무모하군. 이 구역에선 한 번에 두 마리 이상을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계 병기의 거대한 팔이 강현에게로 뻗어왔다. 강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팔은 그를 공격하는 대신, 그의 품에서 떨어진 정수기 밸브를 집어 올렸다.

    “꽤 귀한 물건이군. 이런 위험한 곳까지 올 만한 가치가 있었던 건가?” 남자는 밸브를 살펴보며 말했다.

    강현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당신이 뭘 원하는 거지?”

    남자는 피식 웃었다. “원하는 것? 글쎄, 딱히 없어. 그저… 동정심이 좀 발동했을 뿐이지. 그리고 자네가 이 도시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걸 보고 싶진 않았거든.” 그의 시선은 유나에게 향했다.

    유나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남자의 말에 천천히 강현의 곁으로 다가섰다.

    “어쨌든,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아. 이 소란에 다른 놈들이 몰려들 거야.” 남자는 기계 병기를 돌려 공장 입구를 향했다. “가던 길 가. 그리고 다음번엔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거대한 기계 병기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강현은 피 흘리는 팔을 움켜쥐고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그 남자를 경계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삼촌… 우리 정말 살았네.” 유나가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떨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 작은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강현은 유나의 손을 꽉 잡았다. 정수기 밸브는 안전하게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방금 나타났던 의문의 남자와 그의 거대한 기계 병기, 그리고 이 세상의 또 다른 위험과 알 수 없는 희망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을 터였다.

  • 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안개는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청월산맥의 심장부, 암연곡의 비경은 늘 그랬다. 며칠째 이어지는 빗줄기는 산등성이를 씻어내리며 진흙과 돌무더기를 쏟아냈고, 진호는 그 빗줄기 속에서 겨우 몸을 가누고 있었다. 낡은 도포는 축축하게 몸에 달라붙었고, 식어버린 몸 안에서는 지쳐버린 내공이 느릿하게 순환할 뿐이었다.

    “젠장… 끝도 없군.”

    진호는 헐떡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발밑은 미끄러웠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는 방향 감각마저 흐트러뜨렸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보이던 목표는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비를 피할 동굴이라도 찾으면 다행이었다. 무심코 몸을 기댄 바위는 차갑고 거칠었다.

    그때였다.

    쏴아아아-!

    갑자기 귀를 찢을 듯한 폭포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터져 나왔다. 진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분명 이곳에는 그런 큰 폭포가 없었을 텐데. 그는 흐릿한 시야를 비집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심장이 불안하게 울렸다. 이 암연곡은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버려진 고대 문명의 유적과 미지의 기운이 뒤섞여 기이한 현상들이 종종 목격되는 곳.

    몇 걸음 걷지 않아, 짙은 안개가 일순간 걷히며 거대한 그림자가 진호의 눈앞에 드러났다. 폭포였다. 아니, 폭포 *속*이었다. 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엄청난 수량의 물줄기 뒤편에, 희미하게 검은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절반으로 갈라진 듯한 틈새. 그 틈새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렴풋한 보랏빛이 진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런… 이런 곳에.”

    진호는 망설였다. 저 안으로 들어간다면, 다시 돌아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알 수 없는 호기심. 어쩌면 이곳에서 길을 잃은 자신에게 한 가닥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결국 그는 물살을 헤치고 폭포 뒤편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물보라가 온몸을 강타하고, 곧 익숙한 흙냄새 대신 비릿하고 퀴퀴한 돌무덤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밑은 미끄러웠지만, 곧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다. 눈을 비비자, 어둠 속에 어렴풋한 형체가 드러났다.

    그곳은 동굴이 아니었다.

    폭포수 뒤에 숨겨진 것은,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만들었다고 볼 수 없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기둥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수천, 수만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 이곳은 분명 고대 문명,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의 존재들이 남긴 공간이었다.

    석실의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다. 깎아낸 듯 매끄러운 검은 돌로 만들어진 제단 위에는, 한 개의 검은 구체가 놓여 있었다. 사람의 머리통만 한 크기의 구체는 아무런 조명도 없는데도 희미한 보랏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살아있는 듯 맥동하며, 석실 전체를 섬뜩하게 물들였다.

    진호는 홀린 듯 제단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신호였지만, 그의 의지는 이미 그 검은 구체에 사로잡혀 있었다. 보랏빛 섬광이 그의 눈동자에 반사되었다. 구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 주변의 공기를 뒤틀고 있었다. 진호는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구체에 닿으려는 찰나,

    콰아아아앙-!

    귓청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구체에서 강렬한 빛이 폭발했다. 보랏빛은 순식간에 석실을 집어삼켰고, 진호의 몸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뒤로 밀려났다.

    “크아악!”

    등이 차가운 벽에 부딪히며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하지만 고통보다 더 강렬한 것은, 그의 손바닥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뜨겁고 거대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내공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자, 동시에 온몸의 세포를 폭발시킬 것만 같은 맹렬한 에너지였다.

    진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등에는 보랏빛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그것은 제단의 구체에서 보았던 문양과 똑같았다.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그의 피부 위에서 꿈틀거렸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뜨거운 기운이 혈관을 타고 뇌까지 치고 올라왔고, 그의 눈앞에서는 보랏빛 잔상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온몸의 내공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마치 거대한 용오름이 그의 기해혈(氣海穴)에서부터 시작되어 전신을 휘감는 듯했다.

    “이… 이게 대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닌 듯 떨렸다. 그의 내공이, 평생을 수련하며 쌓아 올린 그의 기운이 이 정체불명의 힘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었다. 압도당하는 동시에, 흡수되고 있었다. 그의 기운이 새로운 기운에 녹아들며 전혀 다른 형태로 변형되고 있는 듯했다.

    석실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벽면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섬뜩한 보랏빛을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제단 위의 검은 구체는 미친 듯이 회전하며,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웅장한 소리를 토해냈다.

    진호는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 힘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평생을 무(武)의 길을 걸으며 익숙했던 모든 상식을 부수는 힘. 그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내공, 어떤 무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태초의 혼돈을 담고 있는 듯한 힘이었다.

    그때, 진호의 시야가 다시 한번 뒤틀렸다. 보랏빛 빛줄기가 그의 눈앞에서 거대한 형체를 이루는 듯했다. 형체는… 뿔 달린 거대한 짐승 같기도 했고, 동시에 수많은 눈동자를 가진 추악한 신 같기도 했다. 환상? 아니면… 이 힘의 근원?

    “도망쳐… 어서… 도망쳐라…”

    희미하게 들려오는 속삭임. 그것은 분명 그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지만, 동시에 수천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듯한 고색창연한 목소리였다.

    진호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보랏빛 기운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손등의 문양은 더욱 선명하고 뜨겁게 빛났다. 석실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천장에서 돌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거대한 힘이 진호의 몸 안에서 폭주하고 있었다. 그 힘은 마치 잠자던 거신이 깨어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그의 존재를 잠식해 들어왔다.

    진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눈을 감았다. 이대로라면… 그는 이 힘에 완전히 잡아먹힐 것이었다. 존재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깊은 내면에서는 알 수 없는 갈망이 꿈틀거렸다. 이 막대한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콰르르르릉!

    석실의 천장이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했다. 쏟아져 내리는 돌무더기들 사이로, 검은 구체는 더욱 거칠게 회전하며 보랏빛 빛줄기를 사방으로 뿜어냈다. 진호의 몸은 그 빛의 핵에 사로잡힌 채, 알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아득해졌고, 의식은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오직 보랏빛만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진호는 깨달았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