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는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청월산맥의 심장부, 암연곡의 비경은 늘 그랬다. 며칠째 이어지는 빗줄기는 산등성이를 씻어내리며 진흙과 돌무더기를 쏟아냈고, 진호는 그 빗줄기 속에서 겨우 몸을 가누고 있었다. 낡은 도포는 축축하게 몸에 달라붙었고, 식어버린 몸 안에서는 지쳐버린 내공이 느릿하게 순환할 뿐이었다.
“젠장… 끝도 없군.”
진호는 헐떡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발밑은 미끄러웠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는 방향 감각마저 흐트러뜨렸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보이던 목표는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비를 피할 동굴이라도 찾으면 다행이었다. 무심코 몸을 기댄 바위는 차갑고 거칠었다.
그때였다.
쏴아아아-!
갑자기 귀를 찢을 듯한 폭포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터져 나왔다. 진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분명 이곳에는 그런 큰 폭포가 없었을 텐데. 그는 흐릿한 시야를 비집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심장이 불안하게 울렸다. 이 암연곡은 평범한 곳이 아니었다. 버려진 고대 문명의 유적과 미지의 기운이 뒤섞여 기이한 현상들이 종종 목격되는 곳.
몇 걸음 걷지 않아, 짙은 안개가 일순간 걷히며 거대한 그림자가 진호의 눈앞에 드러났다. 폭포였다. 아니, 폭포 *속*이었다. 절벽을 타고 쏟아지는 엄청난 수량의 물줄기 뒤편에, 희미하게 검은 공간이 존재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절반으로 갈라진 듯한 틈새. 그 틈새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렴풋한 보랏빛이 진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런… 이런 곳에.”
진호는 망설였다. 저 안으로 들어간다면, 다시 돌아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알 수 없는 호기심. 어쩌면 이곳에서 길을 잃은 자신에게 한 가닥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결국 그는 물살을 헤치고 폭포 뒤편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물보라가 온몸을 강타하고, 곧 익숙한 흙냄새 대신 비릿하고 퀴퀴한 돌무덤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밑은 미끄러웠지만, 곧 단단한 바닥이 느껴졌다. 눈을 비비자, 어둠 속에 어렴풋한 형체가 드러났다.
그곳은 동굴이 아니었다.
폭포수 뒤에 숨겨진 것은,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만들었다고 볼 수 없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천장까지 닿을 듯한 기둥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고,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수천, 수만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 이곳은 분명 고대 문명,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의 존재들이 남긴 공간이었다.
석실의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다. 깎아낸 듯 매끄러운 검은 돌로 만들어진 제단 위에는, 한 개의 검은 구체가 놓여 있었다. 사람의 머리통만 한 크기의 구체는 아무런 조명도 없는데도 희미한 보랏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은 살아있는 듯 맥동하며, 석실 전체를 섬뜩하게 물들였다.
진호는 홀린 듯 제단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신호였지만, 그의 의지는 이미 그 검은 구체에 사로잡혀 있었다. 보랏빛 섬광이 그의 눈동자에 반사되었다. 구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 주변의 공기를 뒤틀고 있었다. 진호는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구체에 닿으려는 찰나,
콰아아아앙-!
귓청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구체에서 강렬한 빛이 폭발했다. 보랏빛은 순식간에 석실을 집어삼켰고, 진호의 몸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뒤로 밀려났다.
“크아악!”
등이 차가운 벽에 부딪히며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하지만 고통보다 더 강렬한 것은, 그의 손바닥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뜨겁고 거대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내공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자, 동시에 온몸의 세포를 폭발시킬 것만 같은 맹렬한 에너지였다.
진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등에는 보랏빛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그것은 제단의 구체에서 보았던 문양과 똑같았다.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그의 피부 위에서 꿈틀거렸다.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뜨거운 기운이 혈관을 타고 뇌까지 치고 올라왔고, 그의 눈앞에서는 보랏빛 잔상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었다. 온몸의 내공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마치 거대한 용오름이 그의 기해혈(氣海穴)에서부터 시작되어 전신을 휘감는 듯했다.
“이… 이게 대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닌 듯 떨렸다. 그의 내공이, 평생을 수련하며 쌓아 올린 그의 기운이 이 정체불명의 힘에 의해 압도당하고 있었다. 압도당하는 동시에, 흡수되고 있었다. 그의 기운이 새로운 기운에 녹아들며 전혀 다른 형태로 변형되고 있는 듯했다.
석실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벽면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섬뜩한 보랏빛을 내며 빛나기 시작했다. 제단 위의 검은 구체는 미친 듯이 회전하며, 어둠 속에서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웅장한 소리를 토해냈다.
진호는 균형을 잃고 무릎을 꿇었다. 그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이 힘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평생을 무(武)의 길을 걸으며 익숙했던 모든 상식을 부수는 힘. 그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내공, 어떤 무공과도 비교할 수 없는, 태초의 혼돈을 담고 있는 듯한 힘이었다.
그때, 진호의 시야가 다시 한번 뒤틀렸다. 보랏빛 빛줄기가 그의 눈앞에서 거대한 형체를 이루는 듯했다. 형체는… 뿔 달린 거대한 짐승 같기도 했고, 동시에 수많은 눈동자를 가진 추악한 신 같기도 했다. 환상? 아니면… 이 힘의 근원?
“도망쳐… 어서… 도망쳐라…”
희미하게 들려오는 속삭임. 그것은 분명 그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지만, 동시에 수천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듯한 고색창연한 목소리였다.
진호는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보랏빛 기운이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손등의 문양은 더욱 선명하고 뜨겁게 빛났다. 석실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천장에서 돌가루가 쏟아져 내렸다.
거대한 힘이 진호의 몸 안에서 폭주하고 있었다. 그 힘은 마치 잠자던 거신이 깨어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그의 존재를 잠식해 들어왔다.
진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눈을 감았다. 이대로라면… 그는 이 힘에 완전히 잡아먹힐 것이었다. 존재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깊은 내면에서는 알 수 없는 갈망이 꿈틀거렸다. 이 막대한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콰르르르릉!
석실의 천장이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했다. 쏟아져 내리는 돌무더기들 사이로, 검은 구체는 더욱 거칠게 회전하며 보랏빛 빛줄기를 사방으로 뿜어냈다. 진호의 몸은 그 빛의 핵에 사로잡힌 채, 알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아득해졌고, 의식은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오직 보랏빛만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진호는 깨달았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