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는 갈라져 있었다. 말라붙은 핏자국처럼 깊게 패인 균열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그 사이사이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바싹 말라붙은 뼈대만 남은 나무들이 앙상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저 위, 하늘은 늘 그랬듯이 잿빛 구름에 덮여 햇빛 한 점 허락하지 않았다.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아니 어쩌면 몇 백 년이고 이 세계는 이렇게 침묵하는 무덤처럼 변해버린 것인지, 운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알고 있는 것은, 숨 쉬는 모든 순간이 고통과 싸움의 연속이라는 것뿐이었다.
“크흑….”
메마른 기침이 목구멍을 찢었다. 쉰 목소리였다. 운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헐떡거렸다. 며칠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등에 짊어진 낡고 헤진 배낭은 더 이상 아무것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영기(靈氣)는 대지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고, 그나마 희미하게 남아있는 기운을 찾아 운은 이 끝없는 황무지를 헤매는 중이었다.
발 밑에 밟히는 자갈들은 그의 낡은 가죽 신발을 비웃기라도 하듯 따갑게 발바닥을 찔렀다. 왼쪽 무릎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며칠 전, 굶주린 짐승에게 쫓기다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면서 얻은 상처였다. 제대로 치유하지 못해 진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닦아낼 물조차 아까웠다.
‘이대로라면… 며칠 버티기 힘들 거야.’
심장이 쿵, 하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수련자의 몸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생존의 법칙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영약이나 단약은 꿈같은 이야기였고, 그저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모든 정신이 소모되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운의 눈빛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 속에는 작지만 굳건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난 이레 동안 그를 이끌어온 것은 바로 한 줄기 희미한 영기였다. 그것은 이 황폐한 대지에 홀로 피어난, 아주 귀한 영약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 기운의 근원을 쫓았다. 혹시… ‘화안초(火眼草)’라면?
그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다시금 도는 듯했다. 화안초는 영기가 고갈된 이 황무지에서도 가끔 발견되는 기묘한 영약이었다. 붉은 눈동자처럼 생긴 꽃잎이 특징인데, 극심한 상처 회복과 미미하게나마 영기를 보충해주는 효능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지금의 운에게는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렴풋한 기운을 쫓아 도착한 곳은 과거 번성했던 어느 선문(仙門)의 잔해였다. ‘청운문(靑雲門)’이라 불리던 곳이었다는 것을 잊혀진 비석의 희미한 글귀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거대한 문파였을 터, 지금은 거대한 돌기둥과 부서진 기와 조각들이 쓸쓸히 쌓여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었다. 영기 고갈로 인해 무너진 수많은 선문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오히려 이런 곳이 더 위험했다. 과거의 영기가 남아있는 곳에는 으레 변이된 영수(靈獸)들이 서식하기 마련이었으니까.
“후우….”
운은 숨을 고르며 폐허 깊숙이 발을 들였다. 공기 자체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삭막한 황무지의 공기와 달리, 이곳은 미약하지만 희미한 생명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기운은 운의 굶주린 오감을 자극했다. 그는 마치 늑대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부서진 전각의 잔해를 지나, 흙먼지가 쌓인 뜰을 가로질렀다. 거대한 본당이었을 곳의 문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그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색을 운은 놓치지 않았다.
‘저것은…!’
심장이 발작하듯 격렬하게 뛰었다. 폐허의 중심, 빛이 거의 들지 않는 어두컴컴한 구석. 그곳에 정말로 ‘화안초’가 피어 있었다. 마치 작은 횃불처럼 붉은 꽃잎이 어둠 속에서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정말 미약하지만 달콤한 영기가 공기 중에 퍼져 있었다. 운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동시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한 기척을 감지했다.
화안초 주변의 바닥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바위 조각 같았지만, 분명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쉬이이익…*
낮게 깔리는 비늘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흙먼지 낀 바위 조각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거대한 뱀이었다. 몸통은 바위처럼 단단한 회색 비늘로 덮여 있었고, 핏발 선 노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길이는 족히 두 아름에 달했고, 머리에는 기괴하게도 두 개의 뿔이 솟아 있었다. 녀석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낮은 울음을 토하며 운을 노려봤다.
‘철피독사(鐵皮毒蛇)… 그것도 변이된 개체인가?’
운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철피독사는 원래도 강력한 영수였다. 단단한 비늘은 웬만한 검으로는 상처 하나 낼 수 없었고, 맹독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영기가 고갈된 시대에 살아남아 변이까지 거쳤으니, 그 힘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저 정도면 자신의 미약한 영력으로는 상대하기 버거울 터였다.
하지만 물러설 수는 없었다. 화안초는 그의 생명이었다.
운은 주머니에서 낡은 단검을 꺼내 들었다. 녹슬고 끝이 무뎌진 물건이었지만, 그에게는 유일한 무기였다. 왼손으로는 등 뒤에 묶어둔 얇은 천 조각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남은 희망이자 비장의 수였다.
“하아….”
가슴을 짓누르는 공포를 애써 억누르고, 운은 낮은 자세를 취했다. 그의 몸에서 희미한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얼마 남지 않은 영기였다. 그것은 푸른색 기운으로 그의 팔과 다리를 감쌌다. 비록 약했지만, 그의 움직임에 조금이나마 속도와 힘을 더해주는 정도였다.
*콰앙!*
철피독사가 먼저 공격해왔다. 바위 같은 몸통을 튕겨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녀석의 송곳니에서 희미한 녹색 독액이 흘러내렸다. 운은 간발의 차이로 독사의 돌진을 피했다. 바닥에 박힌 독사의 머리 때문에 흙먼지가 한바탕 일었다.
‘빠르다… 피하는 것도 힘들어.’
왼쪽 무릎의 통증이 비명을 질렀다. 뼈마디가 삐걱거리는 듯한 아픔이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운은 독사의 머리가 바닥에 박힌 틈을 타, 옆구리를 향해 단검을 내리찍었다.
*쨍그랑!*
마치 돌덩이를 찍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단검의 날이 독사의 단단한 비늘에 부딪히자마자 그대로 튕겨져 나왔다. 상처는커녕, 비늘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젠장!”
철피독사가 성난 울음을 토하며 몸을 휘둘렀다.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와 운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컥!*
갈비뼈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꿰뚫었다. 운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숨이 막혔다. 폐에 차 있던 공기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입가에서 피비린내가 확 올라왔다.
‘끝인가…?’
독사의 거대한 머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노란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운을 응시했다. 독액이 뚝, 뚝, 하고 바닥에 떨어져 흙을 지글거리게 만들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운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때까지 살아남았던 수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굶주림, 추위, 고독, 절망… 그 모든 것을 버텨왔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운은 온몸의 마지막 영기를 짜내어 주먹에 집중했다. 푸른 영기가 그의 손을 감싸며 희미한 빛을 냈다. 그것은 그가 익혔던 가장 기본적인 무공, ‘운천권(雲天拳)’의 한 초식이었다. 비록 조악하고 미약했지만, 그의 모든 것을 담은 일격이었다.
“크아아아악!”
독사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 목을 치켜드는 순간, 운은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독사의 턱 아래, 비늘이 상대적으로 약한 곳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단단한 살에 주먹이 박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푸른 영기가 독사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독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거대한 몸통이 격렬하게 꿈틀거렸다. 독액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운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비장의 수였던 얇은 천 조각을 꺼내, 재빠르게 독사의 입을 향해 던졌다. 천 조각은 그의 미약한 영기로 인해 독사의 턱에 달라붙듯 감겼다.
*크르르르… 으드득!*
독사는 당황한 듯 몸부림쳤지만, 이미 늦었다. 운이 던진 천 조각은 단순한 천이 아니었다. 과거 그의 사부가 영기가 고갈되기 직전, 극독성 영수의 독액을 담아 봉인해두었던, 비록 소량이지만 치명적인 독액이 스며들어 있는 특제 천이었다. 철피독사의 입안에 닿자마자, 독이 녀석의 몸속으로 퍼져 나갔다.
거대한 몸통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독사의 눈동자에 서서히 생기가 사라졌다. 마침내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하아… 하아….”
운은 독사의 시체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전신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통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찌르는 듯했고, 왼쪽 무릎은 감각조차 없었다. 입가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기어가는 듯한 움직임으로, 그는 가까스로 화안초까지 기어갔다.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꽃잎은 마치 자신의 승리를 축하하는 듯했다.
운은 떨리는 손으로 화안초를 뽑아 들었다. 뿌리까지 온전히 뽑아내자, 주변에 감돌던 미약한 영기마저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손에 든 화안초를 그대로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었다.
씁쓸하고도 시큼한 풀 내음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따스한 기운이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마치 오랜 갈증에 시달리던 사막에 한 방울의 이슬비가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상처 부위에서 느껴지던 찌르는 듯한 고통이 거짓말처럼 진정되기 시작했다. 피 흘리던 입가도 서서히 멎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폐허의 차가운 바닥에 등을 기댄 채, 잿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암울한 하늘이었다. 그러나 그의 가슴속에는 방금 얻은 화안초의 따스한 기운처럼, 작지만 꺼지지 않는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아직 살아있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곳에서 안전하게 밤을 보낼 수 있을까.
멀리서, 또 다른 굶주린 짐승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어둠이 천천히 폐허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운은 굳게 눈을 감았다.
내일은 또 다른 지옥이 펼쳐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을 터였다.
반드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