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닫힌 문의 저편
고요한 밤공기를 뚫고 솟아오른 달이 박 저택의 기와지붕 위에서 싸늘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수십 개의 등불이 뿜어내는 어수선한 빛과 그림자들이 저택의 안팎을 오가며 이곳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서재혁은 닳아빠진 갓끈을 만지작거리며 삐걱거리는 대문을 넘어섰다. 그의 낡은 도포자락이 차가운 밤바람에 한 번 휘청거렸지만, 잿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저택의 깊숙한 곳을 향했다. 그의 옆을 따르던 김치수 포도대장이 큼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밤중에 오시게 해서 미안하오, 서 나으리. 허나…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오.”
김 포도대장의 말에는 노련한 수사관의 당혹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재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 미스터리에 대한 미세한 호기심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박영수 상공이… 그리도 허무하게 돌아가실 줄이야.” 김 포도대장이 다시 혀를 찼다.
“어찌 된 일입니까?” 재혁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둘째 딸인 박선아 아씨가 오늘 아침 일찍 발견했소. 박 상공께서 평소에 해가 뜨면 바로 서재로 향하는 분이신데, 오늘따라 식사 시간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는 게지. 걱정이 되어 아씨가 서재로 가보니 문이 굳게 잠겨 있었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더랍니다. 결국 하인들과 문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김 포도대장은 말끝을 흐렸다. 재혁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했다.
“부검은 마쳤습니까?”
“방금 끝났소. 시진은 어젯밤 자정을 전후한 시각이라 하더군. 흉기는 책상 위에 꽂혀 있던 문진으로 밝혀졌소. 머리를 강하게 내리쳐 사망에 이르게 했더군. 더 끔찍한 것은, 박 상공의 재산 목록이 담긴 주요 장부가 모두 훼손된 채 찢겨져 있었다는 거요. 살해 동기가 재물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원한 때문인지….”
재혁은 잠시 멈춰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진으로 살해하고 장부를 훼손했다… 범인이 누구든, 꽤나 감정적이거나 치밀한 자로군요.”
“문제는 말이지요, 서 나으리.” 김 포도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서재 문이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는 거요. 그것도 모자라 안쪽에서 쇠 자물쇠로 이중으로 잠겨 있었다는 게 아니겠소?”
재혁의 잿빛 눈동자에 미세한 빛이 스쳤다. 드디어 본론이었다.
“창문은 어떻습니까?”
“창문은 모두 안에서 걸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쇠창살까지 박혀 있었소. 사람이 드나들 흔적은 전혀 없었지. 굴뚝은 너무 좁아 아이도 드나들 수 없었고, 벽은 튼튼했소. 밀실 살인이라오, 서 나으리. 명백한 밀실 살인.”
재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는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자, 굳게 닫혔던 서재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짝은 뜯겨 나간 자국이 선명했고, 굵은 빗장쇠는 제자리에서 벗어나 축 늘어져 있었다.
방 안에는 몇몇 하인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들의 시선은 방 한가운데 있는 박영수 상공의 시신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시신은 수습되어 나갔지만,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이 그날 밤의 끔찍함을 증언하는 듯했다.
재혁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큼직한 책상 위에는 뒤죽박죽 엉킨 종이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흉기로 쓰인 묵직한 구리 문진이 놓여 있었다. 방 안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재혁은 먼저 부서진 문을 살폈다. 안쪽에서 걸려 있던 빗장쇠는 묵직하고 견고한 것이었다. 그 옆에 있던 쇠 자물쇠도 마찬가지였다. 이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뒤 외부에서 열려고 했다면, 엄청난 힘이 필요했을 터였다. 박선아 아씨의 말대로, 하인들이 달려들어 부수지 않았다면 절대 열리지 않았을 문이었다.
재혁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빗장쇠가 걸려 있던 문턱과 문틈을 유심히 살폈다. 흙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지만, 특별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그는 창문을 확인했다. 쇠창살은 견고했고, 안쪽 걸쇠는 단단히 잠겨 있었다. 창밖은 꽤 높은 곳이었고, 뛰어내렸다 하더라도 무사히 착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흙바닥이 아닌 돌이 깔린 정원이었다.
“살해 시각이 자정 전후라고 했죠?” 재혁이 물었다.
“그렇소.” 김 포도대장이 답했다.
재혁은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인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훼손된 장부 조각들을 뒤적였다. 조심스럽게 조각들을 모아보니, 박 상공의 가장 중요한 거래 내역과 채무 관계가 기록된 부분들이었다.
“장부를 찢은 것은 범인입니까, 아니면 상공 본인입니까?” 재혁이 물었다.
“아씨의 증언으로는 박 상공은 자신의 장부에 매우 집착했다고 합니다. 살해당하기 직전에 찢었을 리 만무하고… 범인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이 집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었다.
재혁은 책상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방 안의 공기, 냄새, 모든 것을 감각으로 흡수하려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떴다. 잿빛 눈동자에 어딘가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이 집사, 어젯밤 박 상공의 마지막 행적을 알려주십시오.”
“어젯밤, 박 상공께서는 저녁 식사를 마치시고 평소처럼 서재로 향하셨습니다. 잠시 후 아씨께서 상공께 드릴 따뜻한 차를 가져다드리려 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상공께서는 안에서 차분하게 ‘됐다’고 말씀하셨고, 아씨께서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이 박 상공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문은 이미 잠겨 있었군요.” 재혁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나갔을까….”
재혁은 갑자기 허리를 숙여 책상 밑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 벽, 그리고 천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을 훑었다. 김 포도대장과 이 집사는 재혁의 기이한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재혁의 시선이 방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낡은 족자를 향했다. 평범한 산수화가 그려진 족자였지만, 다른 장식들과 달리 유독 그 족자 아래쪽 벽면에만 미세한 먼지가 쌓여 있지 않았다. 마치 얼마 전 누군가 그곳을 쓸고 지나간 듯한 자국이었다.
재혁은 족자를 걷어냈다.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흙벽돌 벽이었다. 김 포도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다른 것은 없어 보입니다만….”
재혁은 말없이 족자 주변의 벽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무가 벽을 타고 올라가는 듯한, 미세한 떨림이 그의 손끝에 전달되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벽은… 나무로 된 벽이군요. 아니, 정확히는 벽 안쪽에 나무 기둥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 족자가 걸려 있던 곳을 보세요. 다른 벽면보다 유독 깨끗합니다. 마치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주기적으로 쓸어냈던 것처럼.”
그의 손가락이 벽의 한 부분을 짚었다. 아주 미세한 틈이었다. 거의 보이지 않는 얇은 선이 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재혁이 나직이 말했다. “이 벽은 열리는 문입니다.”
김 포도대장과 이 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이라니요? 저희는 단 한 번도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김 포도대장이 놀라 소리쳤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벽처럼 보이지만, 안쪽에서 조작하면 열리는 비밀 문입니다. 저택의 주인인 박 상공은 분명 이 문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중요한 문서나 귀한 물품을 숨기기 위한 용도였겠죠.” 재혁이 설명했다.
“하지만, 서 나으리! 만약 그곳이 문이었다고 해도, 범인이 그곳을 통해 나가 밀실을 만든 것이라면… 그 문도 안에서 잠겨야 할 텐데, 그럼 결국 범인은 어떻게 나갔다는 말입니까?” 김 포도대장이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재혁은 족자 아래의 벽을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밀실의 트릭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범인은 이 문을 통해 침입했고, 박 상공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 서재의 유일한 출입구인 저 문을 안에서 잠가버린 겁니다. 자물쇠와 빗장까지 완벽하게.”
그의 시선이 다시 부서진 서재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서, 범인은 바로 이 비밀 문을 통해 유유히 빠져나간 것입니다. 이 문은 밖에서는 열 수 없지만, 안에서는 열 수 있도록 만들어졌을 테니까요. 박 상공을 살해한 뒤, 그는 서재의 정문을 걸어 잠가 완벽한 밀실을 연출했습니다. 아무도 그가 이 비밀 문을 통해 나갔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김 포도대장은 숨을 들이켰다. 이 집사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박 상공의 저택 구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자라는 말이 되는군요!” 김 포도대장이 외쳤다. “이 비밀 문의 존재를 아는 자는 박 상공 외에 그리 많지 않을 터….”
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 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박 상공과의 신뢰가 깊거나… 혹은 박 상공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자.”
그는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갑고도 예리했다.
“밀실의 트릭은 깨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누가 박 상공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의 비밀 문까지 알고 있었는지 밝혀내는 것입니다. 김 포도대장, 이 벽을 뜯어내 보십시오. 분명 안쪽에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장치가 있을 겁니다.”
김 포도대장은 즉시 하인들에게 벽을 뜯어낼 것을 명했다. 쿵, 쿵, 쿵. 둔탁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재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서재 중앙에 놓인 묵직한 문진을 집어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밀실의 트릭은 밝혀졌으나, 진정한 그림자는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과연 박 상공의 은밀한 비밀을 알고 있던 자는 누구이며, 그는 왜 상공을 죽이고 장부를 훼손했던 것일까. 밤은 아직 길었다. 재혁의 잿빛 눈동자가 미세한 전율로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