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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둠이 우릴 삼키고 있었다. 눅눅하고 끈적한 공기는 폐 속까지 스며들어 축축한 이끼 냄새를 풍겼다. 강도윤은 손목의 홀로그램 스캐너를 힐끗 보았다. ‘심연의 유적’이라 불리는 이곳의 제7구역으로 진입한 지 벌써 세 시간째. 돔형 천장은 어둠 속에 잠겨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었고, 고대 문양들이 새겨진 벽면은 우리의 탐조등 불빛 아래에서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윤 씨, 이쪽 벽면의 에너지 흐름이 이상합니다.”

    뒤따르던 박선우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젊은 과학자답게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선우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실려 있었다. 강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선우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탐조등을 비췄다. 벽면의 특정 부위가 미약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확인됐어. 기존 데이터에 없던 패턴이야. 활성화된 건가?”

    “아니요, 활성화라기보다는… 마치 거대한 동맥이 뛰고 있는 것처럼 불규칙적인 진동을 보입니다. 내부에서 뭔가가 에너지를 끌어당기고 있어요.”

    선우의 말에 강도윤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유적의 모든 곳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7구역은 달랐다. 이곳으로 들어선 순간부터 심장이 웅크러드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대한 존재의 숨결 같은 것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했다.

    “드론을 더 깊이 보내봐. 내부 구조를 파악해야 해.”

    강도윤의 지시에 선우는 팔뚝에 부착된 제어기로 소형 탐사 드론을 작동시켰다. 윙- 하는 낮은 모터 소리와 함께 드론이 푸른빛 벽면을 따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몇 초 후, 선우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드론이 전송하는 영상이 나타났다.

    **_지이잉- 지직…_**

    화면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영상 속에는 드론의 탐조등이 비추는 거대한 공간이 펼쳐졌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 우뚝 솟아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이전에는 본 적 없는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약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지?” 선우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강도윤은 스크린으로 몸을 바싹 기울였다. 저 구조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고도로 정교하게 설계된, 어떤 목적을 가진 장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목적은, 분명 평범하지 않을 터였다.

    그때, 드론의 영상이 격렬하게 일렁이더니 갑자기 뚝 끊겼다.

    “선우! 무슨 일이야?”

    “드론과의 연결이 끊겼습니다! 외부 간섭이 너무 강력해요! 비상 프로토콜도 작동하지 않아요!”

    선우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강도윤은 허리에 찬 광선총을 꺼내 들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심연의 유적은 알려진 위험 외에도 미지의 변수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다.

    **_우우웅- 쿵!_**

    바닥이 흔들렸다. 강력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온몸을 뒤흔들었다. 천장의 어둠 속에서 먼지 덩어리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동굴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도윤 씨! 진동의 근원지가… 저 원형 구조물입니다!” 선우가 외쳤다.

    강도윤은 망설일 틈도 없이 진동이 시작된 방향, 즉 드론이 마지막으로 영상을 보냈던 곳으로 탐조등을 비췄다. 거대한 원형 구조물에서 발산되던 미약한 빛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강해지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눈을 찌르는 듯한 강렬한 보라색으로 변하며 공간을 가득 채웠다.

    **_지지직! 퍼엉!_**

    우리 주변의 벽면을 감싸고 있던 고대 문양들이 보라색 섬광과 함께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회로가 연결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굉음과 함께 공기 중에 알 수 없는 압력이 가해졌다. 폐 속의 공기가 쥐어짜지는 듯한 고통에 강도윤은 숨을 헐떡였다.

    “젠장…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강도윤의 스캐너가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에너지 과부하’, ‘미확인 파장’, ‘생체 위험’ 등 온갖 경고 메시지가 홀로그램 화면에 점멸했다.

    “선우! 뒤로 물러나! 이대로는 위험해!”

    하지만 선우는 이미 무언가에 홀린 듯 눈을 부릅뜨고 원형 구조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라색 빛으로 물들어 섬뜩하게 보였다.

    “저거… 도윤 씨, 보세요! 저기에… 저기에 뭔가 나타나고 있어요!”

    선우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원형 구조물의 중심부였다. 격렬한 보라색 빛의 폭풍 속에서, 거대한 구조물의 표면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봉인을 이루는 조각들이었고, 그 조각들이 지각 변동처럼 움직이며 내부의 무언가를 드러내고 있었다.

    **_크르르르릉-!_**

    귀를 찢을 듯한 쇳소리와 함께, 구조물의 상단부가 위로 치솟아 오르고 하단부가 아래로 가라앉았다. 거대한 기계 장치가 깨어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드러난 것은…

    강도윤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구조물의 중심부에서 어둠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공간 그 자체가 일그러지고 왜곡되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검은 구멍이었다. 블랙홀처럼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그 구멍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촉수 같기도 하고, 혹은 수천 개의 뱀이 뒤얽힌 것 같기도 한 기괴한 형체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어떤 것의 일부인 양, 시공간의 법칙을 거부하는 듯한 이질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_철썩- 철썩-_**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액체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도윤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직감했다. 이곳에서 깨어난 것은 단순한 기계 장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대 유적이 숨기고 있던,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그때, 그림자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 눈은 수만 년의 세월을 응시해온 듯한 깊이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차가운 지성을 담고 있었다.

    “도망쳐…!”

    강도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비명은 이미 늦었다. 붉은 눈이 우리를 똑바로 응시하는 순간, 공간을 가득 채웠던 보라색 빛이 갑자기 꺼지며 모든 것이 다시 암흑에 잠겼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붉은 눈만이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도윤의 머릿속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희는… 너무 깊이 들어왔다.”**

    그것은 귀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영혼의 심층부를 직접 뒤흔드는 듯한, 차갑고도 절대적인 존재의 울림이었다. 강도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의 손에 들린 광선총은 무의미한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이 천천히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 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휘감은 지하 미궁의 심장부, 붉은 마력이 번득이는 수정 기둥 아래 이진우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격렬했던 전투의 잔흔이 공간에 가득했다. 거대한 석상 괴물의 부서진 파편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그의 발밑에는 검붉은 피 웅덩이가 스며들고 있었다. 한때 감히 침범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감히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못 했던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진우는 손에 든 검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검날에 희미하게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차가울 정도로 무심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지옥 같은 갈증.

    “크윽….”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몸의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진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고통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재확인시켜주는 표식처럼 느껴졌다. 손목의 ‘각인’이 희미하게 빛나며 승리의 대가를 알렸다.

    [고유 스킬 ‘어둠 포식자’가 레벨 업했습니다.]
    [잠재된 힘의 봉인이 일부 해제됩니다.]
    [새로운 특성 ‘심연의 추적자’가 활성화됩니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심연의 추적자’. 이 능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얼마나 많은 증오를 양분 삼아 여기까지 왔던가. 이제는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박강민.”

    나직이 읊조린 이름에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진우의 뇌리에는 선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믿음과 배신이 교차하던 그 날의 기억. 환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감싸 안던 친구의 얼굴, 그리고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칼날.

    * * *

    “진우야, 믿어줘. 넌 내 유일한 친구잖아.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해야지!”

    박강민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눈은 진심으로 가득 차 보였고, 그의 목소리는 강렬한 설득력을 지녔었다. 진우는 강민의 말에 속았다. 아니, 정확히는 속아 넘어갔다기보다는, 믿고 싶었다. 그를 의심하는 일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질 만큼, 강민은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위험한 던전의 최심부. 숨 막히는 마력의 압박 속에, 진우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미궁의 핵을 붙잡았다. 온몸의 마나가 뒤틀리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강민이 뒤에서 다가왔다. 진우는 그가 자신을 격려해주리라 믿었다. 함께 이 위업을 달성한 기쁨을 나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진우야.”

    그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고, 너무나 냉정했다. 이어 등 뒤에서 느껴진 것은, 심장을 꿰뚫는듯한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자신의 모든 마나를 바쳐 핵을 붙들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진우는, 강민이 휘두른 칼에 그대로 관통당했다.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피가 울컥 솟구치며 입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통보다 더 큰 충격이 진우의 영혼을 강타했다.

    “강… 민… 아….”

    애써 그를 돌아본 진우의 눈에 비친 것은, 탐욕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강민의 얼굴이었다. 그의 눈은 이미 자신의 것으로 만든 미궁의 핵을 향해 번득이고 있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이 모든 걸 차지할 수 있어. 모든 영광은 나의 것이 되겠지. 넌… 그냥 버려진 돌멩이일 뿐이야. 미안하지만, 재능 없는 네가 그걸 이해할 필요는 없어.”

    강민은 진우의 몸에서 칼을 뽑아냈다. 진우는 미궁의 핵과 함께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차가운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죽음보다 더 깊은 배신의 늪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절규했다. ‘강민아, 어떻게….’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는 끝내 죽지 않았다. 미궁의 핵이 그를 죽음의 끝에서 붙잡아 두었고,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영혼을 새로운 육체에 새겨 넣었다. 이세계. 과거의 그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지옥 같은 복수심뿐이었다.

    * * *

    “심연의 추적자….”

    진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푸른 섬광이 그의 눈동자를 스쳤다. 과거의 기억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제 추적자였다. 심연의 끝까지, 지옥의 문턱까지라도 쫓아가 기어코 대가를 받아낼 추적자.

    그는 손을 들어 붉은 수정 기둥을 만졌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이 수정은 이 미궁의 심장이자, 강민이 과거에 탐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마나 핵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것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나를 흘려보내 흡수했다. 거대한 수정 기둥에서 붉은 마력이 물결치며 진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궁의 심장 ‘마나 핵’을 흡수했습니다.]
    [잠재된 힘이 각성합니다.]
    [고유 스킬 ‘어둠 포식자’가 진화합니다.]
    [스킬 ‘공허의 계약’이 발동됩니다.]
    [대상: 박강민. 존재 각인 완료.]

    “흐음….”

    진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공허의 계약’. 이 스킬은 자신을 배신한 자의 영혼과 깊이 연결되어, 그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궁극의 복수 스킬이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저 멀리, 이세계의 번화한 수도. 화려한 궁정에서 귀족들의 환대를 받으며, 영웅이라 칭송받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박강민이었다. 그는 진우의 시신을 밟고 올라선 그 자리에서, 영광과 부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진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부서진 석상과 핏자국만이 남았다. 그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강민아.”

    진우의 목소리는 지하 미궁의 끝없는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기다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되찾아갈 거야. 네 영광, 네 웃음, 네 삶….”

    그의 발소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맹렬한 복수심에 타오르는 그의 심장은, 이세계의 심장부로 향하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피로 물들 핏빛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열리려 하고 있었다.

  • 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휘감은 지하 미궁의 심장부, 붉은 마력이 번득이는 수정 기둥 아래 이진우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격렬했던 전투의 잔흔이 공간에 가득했다. 거대한 석상 괴물의 부서진 파편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그의 발밑에는 검붉은 피 웅덩이가 스며들고 있었다. 한때 감히 침범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감히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못 했던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진우는 손에 든 검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검날에 희미하게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차가울 정도로 무심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지옥 같은 갈증.

    “크윽….”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몸의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진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고통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재확인시켜주는 표식처럼 느껴졌다. 손목의 ‘각인’이 희미하게 빛나며 승리의 대가를 알렸다.

    [고유 스킬 ‘어둠 포식자’가 레벨 업했습니다.]
    [잠재된 힘의 봉인이 일부 해제됩니다.]
    [새로운 특성 ‘심연의 추적자’가 활성화됩니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심연의 추적자’. 이 능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얼마나 많은 증오를 양분 삼아 여기까지 왔던가. 이제는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박강민.”

    나직이 읊조린 이름에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진우의 뇌리에는 선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믿음과 배신이 교차하던 그 날의 기억. 환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감싸 안던 친구의 얼굴, 그리고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칼날.

    * * *

    “진우야, 믿어줘. 넌 내 유일한 친구잖아.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해야지!”

    박강민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눈은 진심으로 가득 차 보였고, 그의 목소리는 강렬한 설득력을 지녔었다. 진우는 강민의 말에 속았다. 아니, 정확히는 속아 넘어갔다기보다는, 믿고 싶었다. 그를 의심하는 일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질 만큼, 강민은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위험한 던전의 최심부. 숨 막히는 마력의 압박 속에, 진우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미궁의 핵을 붙잡았다. 온몸의 마나가 뒤틀리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강민이 뒤에서 다가왔다. 진우는 그가 자신을 격려해주리라 믿었다. 함께 이 위업을 달성한 기쁨을 나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진우야.”

    그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고, 너무나 냉정했다. 이어 등 뒤에서 느껴진 것은, 심장을 꿰뚫는듯한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자신의 모든 마나를 바쳐 핵을 붙들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진우는, 강민이 휘두른 칼에 그대로 관통당했다.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피가 울컥 솟구치며 입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통보다 더 큰 충격이 진우의 영혼을 강타했다.

    “강… 민… 아….”

    애써 그를 돌아본 진우의 눈에 비친 것은, 탐욕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강민의 얼굴이었다. 그의 눈은 이미 자신의 것으로 만든 미궁의 핵을 향해 번득이고 있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이 모든 걸 차지할 수 있어. 모든 영광은 나의 것이 되겠지. 넌… 그냥 버려진 돌멩이일 뿐이야. 미안하지만, 재능 없는 네가 그걸 이해할 필요는 없어.”

    강민은 진우의 몸에서 칼을 뽑아냈다. 진우는 미궁의 핵과 함께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차가운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죽음보다 더 깊은 배신의 늪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절규했다. ‘강민아, 어떻게….’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는 끝내 죽지 않았다. 미궁의 핵이 그를 죽음의 끝에서 붙잡아 두었고,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영혼을 새로운 육체에 새겨 넣었다. 이세계. 과거의 그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지옥 같은 복수심뿐이었다.

    * * *

    “심연의 추적자….”

    진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푸른 섬광이 그의 눈동자를 스쳤다. 과거의 기억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제 추적자였다. 심연의 끝까지, 지옥의 문턱까지라도 쫓아가 기어코 대가를 받아낼 추적자.

    그는 손을 들어 붉은 수정 기둥을 만졌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이 수정은 이 미궁의 심장이자, 강민이 과거에 탐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마나 핵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것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나를 흘려보내 흡수했다. 거대한 수정 기둥에서 붉은 마력이 물결치며 진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궁의 심장 ‘마나 핵’을 흡수했습니다.]
    [잠재된 힘이 각성합니다.]
    [고유 스킬 ‘어둠 포식자’가 진화합니다.]
    [스킬 ‘공허의 계약’이 발동됩니다.]
    [대상: 박강민. 존재 각인 완료.]

    “흐음….”

    진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공허의 계약’. 이 스킬은 자신을 배신한 자의 영혼과 깊이 연결되어, 그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궁극의 복수 스킬이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저 멀리, 이세계의 번화한 수도. 화려한 궁정에서 귀족들의 환대를 받으며, 영웅이라 칭송받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박강민이었다. 그는 진우의 시신을 밟고 올라선 그 자리에서, 영광과 부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진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부서진 석상과 핏자국만이 남았다. 그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강민아.”

    진우의 목소리는 지하 미궁의 끝없는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기다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되찾아갈 거야. 네 영광, 네 웃음, 네 삶….”

    그의 발소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맹렬한 복수심에 타오르는 그의 심장은, 이세계의 심장부로 향하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피로 물들 핏빛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열리려 하고 있었다.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긁었다. 낡은 증기 배관이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 통로. 녹슨 철제 이음새 곳곳에서 증기가 피식거리며 새어 나왔고, 희미한 기름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독특한 악취를 풍겼다.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응결수가 떨어져 바닥의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위로 가끔씩 쥐들이 재빠르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아는 낡은 작업등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진 야생동물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볼품없는 회색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 옷 아래 단련된 몸은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탁자 위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도시 외곽의 지도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황제국의 주력 병기인 자동기계병들의 생산 및 보수 시설, ‘강철의 심장’ 공장. 그들의 다음 목표였다.

    “황제국 놈들은 우리가 이런 곳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거야.”

    묵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카인이었다. 강철 톱니바퀴 조각을 엮어 만든 방어구가 어깨에 걸쳐 있었고, 닳고 닳은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은 평생 무언가를 쥐거나 고치거나 때려 부수며 살아온 사람의 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는 강철 같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카인.” 시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지도의 특정 구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난번 ‘푸른 연기’ 작전에서 놈들은 우리를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추격했어. 뭔가 정보가 새는 곳이 있거나, 아니면… 놈들의 기술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정보가 샌다고? 설마 우리 중에 배신자라도 있다는 말이냐?” 레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이는 아직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뜨거운 불꽃을 닮아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찬 증기식 권총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모인 동지들 아닙니까?”

    시아는 레오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배신자가 있다고 단정할 순 없어. 하지만 가능성은 항상 열어둬야 해. 제국은 우리 같은 하층민들에게 온갖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며 이간질을 시도할 테니까. 그게 놈들이 해 온 방식이지.”

    카인이 탁자 위 지도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의 말이 맞아. 황제국은 이 거대한 도시의 모든 증기 압력, 모든 톱니바퀴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과 다름없어.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강철의 심장’은 달라. 그곳은 놈들의 힘의 근원이야. 그곳을 파괴할 수 있다면, 자동기계병들의 보급이 끊기고, 도시 외곽의 수많은 노동자가 강제 징발에서 해방될 거야.”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벌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시아가 덧붙였다. 그녀는 다시 지도에 집중했다. “강철의 심장은 거대한 벙커 형태로 설계되어 있어. 외부 방어는 삼엄하고, 내부에는 최신형 감지기와 무장한 자동기계병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어 있지. 정면 돌파는 자살 행위야.”

    레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냥 손 놓고 당해야 합니까? 우리 구역의 아이들은 오늘도 굶주림에 쓰러지고 있고, 제국은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 증기 압축기를 강제로 돌리고 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은 매일 기계 톱니에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황제 놈들은 매일 밤 화려한 연회에서 배를 채우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자, 시아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래서 계획을 짜는 거야, 레오. 우리는 무모하게 달려들 것이 아니라, 똑똑하게 싸워야 해.” 그녀는 지도의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이 오래된 배수관 시스템에 주목하고 있어. 예전에 도시를 건설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

    카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수관이라고? 그 미로 같은 곳을? 자칫하다간 길을 잃거나, 아니면 쏟아지는 오물에 파묻힐 수도 있어. 게다가 강철의 심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은 아주 낮을 텐데.”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아. 하지만, 이 배수관이 공장 지하의 폐증기 처리 시스템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시아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주 오래된 설계도를 겨우 찾아냈지. 완벽하진 않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해.”

    레오는 다시금 희망에 찬 눈빛을 빛냈다. “그럼 그걸 통해 잠입하자는 겁니까? 제국의 눈을 피해?”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세 팀으로 나눌 거야. 첫 번째 팀은 폐증기 처리 시스템의 압력 밸브를 조작하여 공장 내부의 감지 시스템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킬 거야. 두 번째 팀은 그 틈을 타 공장 중앙의 주동력로를 직접 타격해야 해. 그리고 세 번째 팀은…”

    그녀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멀리서 둔탁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하 배관을 타고 올라오는 증기 기계의 소음이었다. 낡은 작업등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아, 카인, 레오의 얼굴에는 동시에 긴장감이 스쳤다.

    “저건… 제국의 순찰대 기계견이군.” 카인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거친 칼날로 향했다. “아직 멀리 있지만, 이 지하 통로를 감지하고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빌어먹을!” 레오가 욕설을 내뱉었다. “벌써 이만큼 가까이 온 겁니까? 우리가 회합을 자주 갖는다는 걸 눈치챈 건가?”

    시아는 침착하게 일어섰다. 그녀의 눈은 번뜩였다. “아니,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어. 아니면, 우리의 존재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이 구역을 수색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게 둘 수는 없어.”

    그녀는 탁자 위 지도에 마지막으로 손을 짚었다. “계획은 이것으로 확정한다. 우리는 오늘 밤 자정, 이 배수관 입구에서 모인다. 준비물은 각자 알아서 챙기고, 불필요한 장비는 최소한으로 줄여. 목표는 강철의 심장, 제국의 동맥을 끊는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단단한 강철 같았다. 레오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카인의 눈빛은 다시 한번 흔들림 없는 강철로 변했다.

    “성공하면, 우리는 이 썩어빠진 제국의 심장에 첫 번째 쐐기를 박는 거야.” 시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실패하면… 우리가 이 지하에 묻히는 거고.”

    그녀는 작업등을 끄고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깊은 지하 통로의 음습한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견의 둔탁한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험난한 길이, 그리고 제국의 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뼈대만 남은 유령처럼 솟아 있었다. 굉음은 없었다. 오직 고요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했고,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신음소리가 그 침묵을 불길하게 갈랐다. 김도현은 찌푸린 미간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삐걱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활기 넘치던 도시의 거리는 이제 죽음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낮게 읊조린 욕설은 입안에서 맴돌다 흩어졌다.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찢어진 천 조각이 덧대어져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끈적한 피는 이미 말라붙어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며칠 전의 기억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 * *

    “도현아! 이쪽이야! 빨리!”
    이지훈의 목소리는 언제나 희망처럼 들렸었다. 아니, 적어도 도현에게는 그랬다.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 이후, 지훈은 도현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생존의 이유였다. 놈이 먼저 발견한 슈퍼마켓의 뒷문으로 뛰어들 때까지도, 도현은 지훈의 등만 굳게 믿고 따랐다.

    “젠장, 놈들이 너무 많잖아!”
    지훈의 얼굴이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서 일그러졌다. 창고 안은 이미 좀비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한 마리가 지척까지 다가왔고, 도현은 반사적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박살냈다. 끈적한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는 안 돼… 도현아, 어서!”
    지훈은 비좁은 선반 사이를 헤치며 다른 출구를 찾았다. 도현은 지훈의 뒤를 엄호하며 덮쳐오는 좀비들을 막아냈다. 그때였다. 지훈이 발견한 작은 창문으로 먼저 몸을 던지려던 순간,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하는 것을 도현은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던 그 차가운 시선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처음 보는 낯선 이처럼 낯설었다.

    “미안하다, 도현아.”

    지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친 손길이 도현의 등 뒤를 밀쳤다. 선반에 박혀있던 뾰족한 철근이 허벅지를 깊숙이 꿰뚫고 지나가는 통증보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친구의 차가운 손바닥이 더 끔찍했다. 비명조차 지를 새 없이, 도현은 쏟아져 들어오는 좀비들 한가운데로 고꾸라졌다.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손에는, 둘이서 힘들게 모았던 배낭이 들려 있었다.

    * * *

    피로 물든 기억은 생생했지만, 몸은 이제 더 이상 그 통증에 익숙해져 있었다. 허벅지의 상처는 곪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좀비에게 물린 상처는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도현은 벽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굶주림과 갈증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크르르륵…”

    멀지 않은 곳에서 끈적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움찔하며 주머니에서 녹슨 칼을 꺼내 들었다. 칼날은 이미 무뎌진 지 오래였지만, 없느니보다는 나았다. 놈은 천천히,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썩어가는 살점과 피 냄새가 역겨웠다. 도현은 놈의 텅 빈 눈을 노려보았다.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지훈.

    그 이름이 뇌리에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했던 존재의 등 돌림. 놈에게 버려진 순간의 절망이 다시금 도현의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절망은 없었다. 그의 안에 남은 것은 오직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뿐이었다.

    놈이 손을 뻗는 순간, 도현은 온몸의 무게를 실어 돌진했다. 허벅지의 고통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칼날은 놈의 턱 밑을 파고들었고, 그대로 위로 쳐올리자 놈의 머리가 뒤로 꺾이며 비명을 질렀다. 놈은 잠시 휘청거리다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도현은 놈의 머리를 다시 한번 짓밟아 확인사살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목적이 생겼다. 지훈을 찾아야 했다. 놈의 눈을 똑바로 보고, 왜 그랬는지 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그 과정이 아무리 끔찍하고 처절할지라도, 그는 기어코 지훈의 목숨을 끊어놓고야 말 것이다.

    도현은 피 묻은 칼날을 대충 옷에 닦아 넣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허벅지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차갑고 날카로운 섬광만이 번뜩였다. 세상이 온통 죽음으로 물들었지만, 그의 심장은 이제 복수라는 이름의 불꽃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다려, 이지훈.”

    도현은 텅 빈 도시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널 찾을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긁었다. 낡은 증기 배관이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 통로. 녹슨 철제 이음새 곳곳에서 증기가 피식거리며 새어 나왔고, 희미한 기름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독특한 악취를 풍겼다.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응결수가 떨어져 바닥의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위로 가끔씩 쥐들이 재빠르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아는 낡은 작업등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진 야생동물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볼품없는 회색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 옷 아래 단련된 몸은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탁자 위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도시 외곽의 지도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황제국의 주력 병기인 자동기계병들의 생산 및 보수 시설, ‘강철의 심장’ 공장. 그들의 다음 목표였다.

    “황제국 놈들은 우리가 이런 곳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거야.”

    묵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카인이었다. 강철 톱니바퀴 조각을 엮어 만든 방어구가 어깨에 걸쳐 있었고, 닳고 닳은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은 평생 무언가를 쥐거나 고치거나 때려 부수며 살아온 사람의 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는 강철 같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카인.” 시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지도의 특정 구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난번 ‘푸른 연기’ 작전에서 놈들은 우리를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추격했어. 뭔가 정보가 새는 곳이 있거나, 아니면… 놈들의 기술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정보가 샌다고? 설마 우리 중에 배신자라도 있다는 말이냐?” 레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이는 아직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뜨거운 불꽃을 닮아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찬 증기식 권총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모인 동지들 아닙니까?”

    시아는 레오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배신자가 있다고 단정할 순 없어. 하지만 가능성은 항상 열어둬야 해. 제국은 우리 같은 하층민들에게 온갖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며 이간질을 시도할 테니까. 그게 놈들이 해 온 방식이지.”

    카인이 탁자 위 지도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의 말이 맞아. 황제국은 이 거대한 도시의 모든 증기 압력, 모든 톱니바퀴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과 다름없어.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강철의 심장’은 달라. 그곳은 놈들의 힘의 근원이야. 그곳을 파괴할 수 있다면, 자동기계병들의 보급이 끊기고, 도시 외곽의 수많은 노동자가 강제 징발에서 해방될 거야.”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벌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시아가 덧붙였다. 그녀는 다시 지도에 집중했다. “강철의 심장은 거대한 벙커 형태로 설계되어 있어. 외부 방어는 삼엄하고, 내부에는 최신형 감지기와 무장한 자동기계병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어 있지. 정면 돌파는 자살 행위야.”

    레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냥 손 놓고 당해야 합니까? 우리 구역의 아이들은 오늘도 굶주림에 쓰러지고 있고, 제국은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 증기 압축기를 강제로 돌리고 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은 매일 기계 톱니에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황제 놈들은 매일 밤 화려한 연회에서 배를 채우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자, 시아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래서 계획을 짜는 거야, 레오. 우리는 무모하게 달려들 것이 아니라, 똑똑하게 싸워야 해.” 그녀는 지도의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이 오래된 배수관 시스템에 주목하고 있어. 예전에 도시를 건설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

    카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수관이라고? 그 미로 같은 곳을? 자칫하다간 길을 잃거나, 아니면 쏟아지는 오물에 파묻힐 수도 있어. 게다가 강철의 심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은 아주 낮을 텐데.”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아. 하지만, 이 배수관이 공장 지하의 폐증기 처리 시스템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시아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주 오래된 설계도를 겨우 찾아냈지. 완벽하진 않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해.”

    레오는 다시금 희망에 찬 눈빛을 빛냈다. “그럼 그걸 통해 잠입하자는 겁니까? 제국의 눈을 피해?”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세 팀으로 나눌 거야. 첫 번째 팀은 폐증기 처리 시스템의 압력 밸브를 조작하여 공장 내부의 감지 시스템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킬 거야. 두 번째 팀은 그 틈을 타 공장 중앙의 주동력로를 직접 타격해야 해. 그리고 세 번째 팀은…”

    그녀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멀리서 둔탁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하 배관을 타고 올라오는 증기 기계의 소음이었다. 낡은 작업등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아, 카인, 레오의 얼굴에는 동시에 긴장감이 스쳤다.

    “저건… 제국의 순찰대 기계견이군.” 카인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거친 칼날로 향했다. “아직 멀리 있지만, 이 지하 통로를 감지하고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빌어먹을!” 레오가 욕설을 내뱉었다. “벌써 이만큼 가까이 온 겁니까? 우리가 회합을 자주 갖는다는 걸 눈치챈 건가?”

    시아는 침착하게 일어섰다. 그녀의 눈은 번뜩였다. “아니,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어. 아니면, 우리의 존재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이 구역을 수색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게 둘 수는 없어.”

    그녀는 탁자 위 지도에 마지막으로 손을 짚었다. “계획은 이것으로 확정한다. 우리는 오늘 밤 자정, 이 배수관 입구에서 모인다. 준비물은 각자 알아서 챙기고, 불필요한 장비는 최소한으로 줄여. 목표는 강철의 심장, 제국의 동맥을 끊는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단단한 강철 같았다. 레오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카인의 눈빛은 다시 한번 흔들림 없는 강철로 변했다.

    “성공하면, 우리는 이 썩어빠진 제국의 심장에 첫 번째 쐐기를 박는 거야.” 시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실패하면… 우리가 이 지하에 묻히는 거고.”

    그녀는 작업등을 끄고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깊은 지하 통로의 음습한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견의 둔탁한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험난한 길이, 그리고 제국의 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뼈대만 남은 유령처럼 솟아 있었다. 굉음은 없었다. 오직 고요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했고,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신음소리가 그 침묵을 불길하게 갈랐다. 김도현은 찌푸린 미간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삐걱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활기 넘치던 도시의 거리는 이제 죽음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낮게 읊조린 욕설은 입안에서 맴돌다 흩어졌다.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찢어진 천 조각이 덧대어져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끈적한 피는 이미 말라붙어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며칠 전의 기억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 * *

    “도현아! 이쪽이야! 빨리!”
    이지훈의 목소리는 언제나 희망처럼 들렸었다. 아니, 적어도 도현에게는 그랬다.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 이후, 지훈은 도현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생존의 이유였다. 놈이 먼저 발견한 슈퍼마켓의 뒷문으로 뛰어들 때까지도, 도현은 지훈의 등만 굳게 믿고 따랐다.

    “젠장, 놈들이 너무 많잖아!”
    지훈의 얼굴이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서 일그러졌다. 창고 안은 이미 좀비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한 마리가 지척까지 다가왔고, 도현은 반사적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박살냈다. 끈적한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는 안 돼… 도현아, 어서!”
    지훈은 비좁은 선반 사이를 헤치며 다른 출구를 찾았다. 도현은 지훈의 뒤를 엄호하며 덮쳐오는 좀비들을 막아냈다. 그때였다. 지훈이 발견한 작은 창문으로 먼저 몸을 던지려던 순간,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하는 것을 도현은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던 그 차가운 시선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처음 보는 낯선 이처럼 낯설었다.

    “미안하다, 도현아.”

    지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친 손길이 도현의 등 뒤를 밀쳤다. 선반에 박혀있던 뾰족한 철근이 허벅지를 깊숙이 꿰뚫고 지나가는 통증보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친구의 차가운 손바닥이 더 끔찍했다. 비명조차 지를 새 없이, 도현은 쏟아져 들어오는 좀비들 한가운데로 고꾸라졌다.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손에는, 둘이서 힘들게 모았던 배낭이 들려 있었다.

    * * *

    피로 물든 기억은 생생했지만, 몸은 이제 더 이상 그 통증에 익숙해져 있었다. 허벅지의 상처는 곪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좀비에게 물린 상처는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도현은 벽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굶주림과 갈증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크르르륵…”

    멀지 않은 곳에서 끈적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움찔하며 주머니에서 녹슨 칼을 꺼내 들었다. 칼날은 이미 무뎌진 지 오래였지만, 없느니보다는 나았다. 놈은 천천히,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썩어가는 살점과 피 냄새가 역겨웠다. 도현은 놈의 텅 빈 눈을 노려보았다.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지훈.

    그 이름이 뇌리에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했던 존재의 등 돌림. 놈에게 버려진 순간의 절망이 다시금 도현의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절망은 없었다. 그의 안에 남은 것은 오직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뿐이었다.

    놈이 손을 뻗는 순간, 도현은 온몸의 무게를 실어 돌진했다. 허벅지의 고통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칼날은 놈의 턱 밑을 파고들었고, 그대로 위로 쳐올리자 놈의 머리가 뒤로 꺾이며 비명을 질렀다. 놈은 잠시 휘청거리다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도현은 놈의 머리를 다시 한번 짓밟아 확인사살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목적이 생겼다. 지훈을 찾아야 했다. 놈의 눈을 똑바로 보고, 왜 그랬는지 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그 과정이 아무리 끔찍하고 처절할지라도, 그는 기어코 지훈의 목숨을 끊어놓고야 말 것이다.

    도현은 피 묻은 칼날을 대충 옷에 닦아 넣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허벅지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차갑고 날카로운 섬광만이 번뜩였다. 세상이 온통 죽음으로 물들었지만, 그의 심장은 이제 복수라는 이름의 불꽃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다려, 이지훈.”

    도현은 텅 빈 도시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널 찾을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 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휘감은 지하 미궁의 심장부, 붉은 마력이 번득이는 수정 기둥 아래 이진우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격렬했던 전투의 잔흔이 공간에 가득했다. 거대한 석상 괴물의 부서진 파편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고, 그의 발밑에는 검붉은 피 웅덩이가 스며들고 있었다. 한때 감히 침범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감히 존재하리라고 상상조차 못 했던 미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진우는 손에 든 검을 내려다보았다. 날카로운 검날에 희미하게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차가울 정도로 무심한 눈동자,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지옥 같은 갈증.

    “크윽….”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몸의 모든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진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고통이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재확인시켜주는 표식처럼 느껴졌다. 손목의 ‘각인’이 희미하게 빛나며 승리의 대가를 알렸다.

    [고유 스킬 ‘어둠 포식자’가 레벨 업했습니다.]
    [잠재된 힘의 봉인이 일부 해제됩니다.]
    [새로운 특성 ‘심연의 추적자’가 활성화됩니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심연의 추적자’. 이 능력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얼마나 많은 증오를 양분 삼아 여기까지 왔던가. 이제는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박강민.”

    나직이 읊조린 이름에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진우의 뇌리에는 선명한 영상이 떠올랐다. 믿음과 배신이 교차하던 그 날의 기억. 환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감싸 안던 친구의 얼굴, 그리고 그 웃음 뒤에 숨겨진 칼날.

    * * *

    “진우야, 믿어줘. 넌 내 유일한 친구잖아. 이 위기를 함께 극복해야지!”

    박강민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의 눈은 진심으로 가득 차 보였고, 그의 목소리는 강렬한 설득력을 지녔었다. 진우는 강민의 말에 속았다. 아니, 정확히는 속아 넘어갔다기보다는, 믿고 싶었다. 그를 의심하는 일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질 만큼, 강민은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

    위험한 던전의 최심부. 숨 막히는 마력의 압박 속에, 진우는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미궁의 핵을 붙잡았다. 온몸의 마나가 뒤틀리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그때 강민이 뒤에서 다가왔다. 진우는 그가 자신을 격려해주리라 믿었다. 함께 이 위업을 달성한 기쁨을 나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달콤한 속삭임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진우야.”

    그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고, 너무나 냉정했다. 이어 등 뒤에서 느껴진 것은, 심장을 꿰뚫는듯한 날카로운 고통이었다. 자신의 모든 마나를 바쳐 핵을 붙들고 있던 무방비 상태의 진우는, 강민이 휘두른 칼에 그대로 관통당했다. 온몸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피가 울컥 솟구치며 입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통보다 더 큰 충격이 진우의 영혼을 강타했다.

    “강… 민… 아….”

    애써 그를 돌아본 진우의 눈에 비친 것은, 탐욕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강민의 얼굴이었다. 그의 눈은 이미 자신의 것으로 만든 미궁의 핵을 향해 번득이고 있었다.

    “네가 없으면 내가 이 모든 걸 차지할 수 있어. 모든 영광은 나의 것이 되겠지. 넌… 그냥 버려진 돌멩이일 뿐이야. 미안하지만, 재능 없는 네가 그걸 이해할 필요는 없어.”

    강민은 진우의 몸에서 칼을 뽑아냈다. 진우는 미궁의 핵과 함께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차가운 어둠이 그를 집어삼켰다. 죽음보다 더 깊은 배신의 늪에서, 그는 마지막까지 절규했다. ‘강민아, 어떻게….’

    하지만 어둠 속에서, 그는 끝내 죽지 않았다. 미궁의 핵이 그를 죽음의 끝에서 붙잡아 두었고,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영혼을 새로운 육체에 새겨 넣었다. 이세계. 과거의 그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지옥 같은 복수심뿐이었다.

    * * *

    “심연의 추적자….”

    진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푸른 섬광이 그의 눈동자를 스쳤다. 과거의 기억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제 추적자였다. 심연의 끝까지, 지옥의 문턱까지라도 쫓아가 기어코 대가를 받아낼 추적자.

    그는 손을 들어 붉은 수정 기둥을 만졌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이 수정은 이 미궁의 심장이자, 강민이 과거에 탐냈던 것과 동일한 종류의 마나 핵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것을 파괴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나를 흘려보내 흡수했다. 거대한 수정 기둥에서 붉은 마력이 물결치며 진우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미궁의 심장 ‘마나 핵’을 흡수했습니다.]
    [잠재된 힘이 각성합니다.]
    [고유 스킬 ‘어둠 포식자’가 진화합니다.]
    [스킬 ‘공허의 계약’이 발동됩니다.]
    [대상: 박강민. 존재 각인 완료.]

    “흐음….”

    진우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공허의 계약’. 이 스킬은 자신을 배신한 자의 영혼과 깊이 연결되어, 그가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든 추적할 수 있게 해주는 궁극의 복수 스킬이었다. 마침내 모든 준비가 끝났다.

    저 멀리, 이세계의 번화한 수도. 화려한 궁정에서 귀족들의 환대를 받으며, 영웅이라 칭송받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박강민이었다. 그는 진우의 시신을 밟고 올라선 그 자리에서, 영광과 부를 한껏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진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부서진 석상과 핏자국만이 남았다. 그의 그림자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강민아.”

    진우의 목소리는 지하 미궁의 끝없는 어둠 속으로 울려 퍼졌다.

    “기다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되찾아갈 거야. 네 영광, 네 웃음, 네 삶….”

    그의 발소리는 점차 멀어져갔다. 맹렬한 복수심에 타오르는 그의 심장은, 이세계의 심장부로 향하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피로 물들 핏빛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열리려 하고 있었다.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긁었다. 낡은 증기 배관이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 통로. 녹슨 철제 이음새 곳곳에서 증기가 피식거리며 새어 나왔고, 희미한 기름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독특한 악취를 풍겼다.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응결수가 떨어져 바닥의 웅덩이를 만들었고, 그 위로 가끔씩 쥐들이 재빠르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아는 낡은 작업등이 드리운 그림자 속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진 야생동물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볼품없는 회색 작업복을 입었지만, 그 옷 아래 단련된 몸은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듯했다. 탁자 위에는 정교하게 그려진 도시 외곽의 지도 한 장이 펼쳐져 있었다. 황제국의 주력 병기인 자동기계병들의 생산 및 보수 시설, ‘강철의 심장’ 공장. 그들의 다음 목표였다.

    “황제국 놈들은 우리가 이런 곳에 숨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거야.”

    묵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렸다. 카인이었다. 강철 톱니바퀴 조각을 엮어 만든 방어구가 어깨에 걸쳐 있었고, 닳고 닳은 가죽 장갑을 낀 그의 손은 평생 무언가를 쥐거나 고치거나 때려 부수며 살아온 사람의 손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는 강철 같았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야, 카인.” 시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지도의 특정 구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지난번 ‘푸른 연기’ 작전에서 놈들은 우리를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추격했어. 뭔가 정보가 새는 곳이 있거나, 아니면… 놈들의 기술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거나 둘 중 하나겠지.”

    “정보가 샌다고? 설마 우리 중에 배신자라도 있다는 말이냐?” 레오가 불쑥 끼어들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이는 아직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았지만, 눈빛만은 뜨거운 불꽃을 닮아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 찬 증기식 권총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모인 동지들 아닙니까?”

    시아는 레오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배신자가 있다고 단정할 순 없어. 하지만 가능성은 항상 열어둬야 해. 제국은 우리 같은 하층민들에게 온갖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며 이간질을 시도할 테니까. 그게 놈들이 해 온 방식이지.”

    카인이 탁자 위 지도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의 말이 맞아. 황제국은 이 거대한 도시의 모든 증기 압력, 모든 톱니바퀴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것과 다름없어.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강철의 심장’은 달라. 그곳은 놈들의 힘의 근원이야. 그곳을 파괴할 수 있다면, 자동기계병들의 보급이 끊기고, 도시 외곽의 수많은 노동자가 강제 징발에서 해방될 거야.”

    “그게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벌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시아가 덧붙였다. 그녀는 다시 지도에 집중했다. “강철의 심장은 거대한 벙커 형태로 설계되어 있어. 외부 방어는 삼엄하고, 내부에는 최신형 감지기와 무장한 자동기계병들이 빈틈없이 배치되어 있지. 정면 돌파는 자살 행위야.”

    레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냥 손 놓고 당해야 합니까? 우리 구역의 아이들은 오늘도 굶주림에 쓰러지고 있고, 제국은 더 많은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 증기 압축기를 강제로 돌리고 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은 매일 기계 톱니에 팔다리가 잘려나가고, 황제 놈들은 매일 밤 화려한 연회에서 배를 채우고 있는데!”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자, 시아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그래서 계획을 짜는 거야, 레오. 우리는 무모하게 달려들 것이 아니라, 똑똑하게 싸워야 해.” 그녀는 지도의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이 오래된 배수관 시스템에 주목하고 있어. 예전에 도시를 건설할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지.”

    카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배수관이라고? 그 미로 같은 곳을? 자칫하다간 길을 잃거나, 아니면 쏟아지는 오물에 파묻힐 수도 있어. 게다가 강철의 심장과 직접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은 아주 낮을 텐데.”

    “직접 연결되어 있지는 않아. 하지만, 이 배수관이 공장 지하의 폐증기 처리 시스템과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어.” 시아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주 오래된 설계도를 겨우 찾아냈지. 완벽하진 않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해.”

    레오는 다시금 희망에 찬 눈빛을 빛냈다. “그럼 그걸 통해 잠입하자는 겁니까? 제국의 눈을 피해?”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는 세 팀으로 나눌 거야. 첫 번째 팀은 폐증기 처리 시스템의 압력 밸브를 조작하여 공장 내부의 감지 시스템을 일시적으로 무력화시킬 거야. 두 번째 팀은 그 틈을 타 공장 중앙의 주동력로를 직접 타격해야 해. 그리고 세 번째 팀은…”

    그녀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멀리서 둔탁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하 배관을 타고 올라오는 증기 기계의 소음이었다. 낡은 작업등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아, 카인, 레오의 얼굴에는 동시에 긴장감이 스쳤다.

    “저건… 제국의 순찰대 기계견이군.” 카인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손은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거친 칼날로 향했다. “아직 멀리 있지만, 이 지하 통로를 감지하고 내려오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빌어먹을!” 레오가 욕설을 내뱉었다. “벌써 이만큼 가까이 온 겁니까? 우리가 회합을 자주 갖는다는 걸 눈치챈 건가?”

    시아는 침착하게 일어섰다. 그녀의 눈은 번뜩였다. “아니, 어쩌면 우연일 수도 있어. 아니면, 우리의 존재를 어렴풋이 짐작하고 이 구역을 수색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게 둘 수는 없어.”

    그녀는 탁자 위 지도에 마지막으로 손을 짚었다. “계획은 이것으로 확정한다. 우리는 오늘 밤 자정, 이 배수관 입구에서 모인다. 준비물은 각자 알아서 챙기고, 불필요한 장비는 최소한으로 줄여. 목표는 강철의 심장, 제국의 동맥을 끊는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단단한 강철 같았다. 레오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카인의 눈빛은 다시 한번 흔들림 없는 강철로 변했다.

    “성공하면, 우리는 이 썩어빠진 제국의 심장에 첫 번째 쐐기를 박는 거야.” 시아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실패하면… 우리가 이 지하에 묻히는 거고.”

    그녀는 작업등을 끄고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세 사람의 그림자가 깊은 지하 통로의 음습한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견의 둔탁한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험난한 길이, 그리고 제국의 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뼈대만 남은 유령처럼 솟아 있었다. 굉음은 없었다. 오직 고요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했고,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신음소리가 그 침묵을 불길하게 갈랐다. 김도현은 찌푸린 미간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삐걱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활기 넘치던 도시의 거리는 이제 죽음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낮게 읊조린 욕설은 입안에서 맴돌다 흩어졌다.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찢어진 천 조각이 덧대어져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끈적한 피는 이미 말라붙어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며칠 전의 기억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 * *

    “도현아! 이쪽이야! 빨리!”
    이지훈의 목소리는 언제나 희망처럼 들렸었다. 아니, 적어도 도현에게는 그랬다.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 이후, 지훈은 도현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생존의 이유였다. 놈이 먼저 발견한 슈퍼마켓의 뒷문으로 뛰어들 때까지도, 도현은 지훈의 등만 굳게 믿고 따랐다.

    “젠장, 놈들이 너무 많잖아!”
    지훈의 얼굴이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서 일그러졌다. 창고 안은 이미 좀비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한 마리가 지척까지 다가왔고, 도현은 반사적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박살냈다. 끈적한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는 안 돼… 도현아, 어서!”
    지훈은 비좁은 선반 사이를 헤치며 다른 출구를 찾았다. 도현은 지훈의 뒤를 엄호하며 덮쳐오는 좀비들을 막아냈다. 그때였다. 지훈이 발견한 작은 창문으로 먼저 몸을 던지려던 순간,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하는 것을 도현은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던 그 차가운 시선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처음 보는 낯선 이처럼 낯설었다.

    “미안하다, 도현아.”

    지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친 손길이 도현의 등 뒤를 밀쳤다. 선반에 박혀있던 뾰족한 철근이 허벅지를 깊숙이 꿰뚫고 지나가는 통증보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친구의 차가운 손바닥이 더 끔찍했다. 비명조차 지를 새 없이, 도현은 쏟아져 들어오는 좀비들 한가운데로 고꾸라졌다.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손에는, 둘이서 힘들게 모았던 배낭이 들려 있었다.

    * * *

    피로 물든 기억은 생생했지만, 몸은 이제 더 이상 그 통증에 익숙해져 있었다. 허벅지의 상처는 곪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좀비에게 물린 상처는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도현은 벽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굶주림과 갈증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크르르륵…”

    멀지 않은 곳에서 끈적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움찔하며 주머니에서 녹슨 칼을 꺼내 들었다. 칼날은 이미 무뎌진 지 오래였지만, 없느니보다는 나았다. 놈은 천천히,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썩어가는 살점과 피 냄새가 역겨웠다. 도현은 놈의 텅 빈 눈을 노려보았다.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지훈.

    그 이름이 뇌리에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했던 존재의 등 돌림. 놈에게 버려진 순간의 절망이 다시금 도현의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절망은 없었다. 그의 안에 남은 것은 오직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뿐이었다.

    놈이 손을 뻗는 순간, 도현은 온몸의 무게를 실어 돌진했다. 허벅지의 고통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칼날은 놈의 턱 밑을 파고들었고, 그대로 위로 쳐올리자 놈의 머리가 뒤로 꺾이며 비명을 질렀다. 놈은 잠시 휘청거리다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도현은 놈의 머리를 다시 한번 짓밟아 확인사살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목적이 생겼다. 지훈을 찾아야 했다. 놈의 눈을 똑바로 보고, 왜 그랬는지 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그 과정이 아무리 끔찍하고 처절할지라도, 그는 기어코 지훈의 목숨을 끊어놓고야 말 것이다.

    도현은 피 묻은 칼날을 대충 옷에 닦아 넣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허벅지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차갑고 날카로운 섬광만이 번뜩였다. 세상이 온통 죽음으로 물들었지만, 그의 심장은 이제 복수라는 이름의 불꽃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다려, 이지훈.”

    도현은 텅 빈 도시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널 찾을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