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1화. 심연의 발자국
철컥, 철컥.
진호의 낡은 보행 보조 장치가 얼어붙은 흙바닥을 밟는 소리가 폐허가 된 던전 복도를 가득 채웠다. 간간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그 단조로운 리듬을 깨뜨릴 뿐이었다. 손에 들린 램프의 희미한 불빛은 그저 발밑 몇 걸음 앞을 비출 뿐, 양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은 단순한 지하 통로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삼켜진 세상의 핏줄이자,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입과도 같았다.
“진호 오빠…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서연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지쳐서일까, 아니면 이 끝없는 어둠에 대한 본능적인 공포 때문일까. 열여덟 살 소녀에게 이 던전의 심연은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이었다. 얼굴에 묻은 흙먼지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려 희미한 램프 불빛에 반짝였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지도에 따르면 이 구역을 지나면 임시 안전 지대가 나온다고 했으니…”
진호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제멋대로 요동치고 있었다. 지도는 낡고, 이 던전은 시시각각 변했다. ‘안전 지대’라는 말은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지도 모른다. 그가 기댈 수 있는 건 오직 램프의 불빛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믿음뿐이었다.
“너무 어둡고, 축축해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뭔가 계속 제 발목을 잡는 것 같아요.”
서연이 몸을 웅크렸다. 그녀의 손이 진호의 재킷 끝자락을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진호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램프 불빛이 서연의 겁에 질린 눈망울을 비췄다.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은 소녀의 몸에서는 미약한 떨림이 전해졌다.
“괜찮아. 내가 앞장설게. 발밑만 잘 보고 따라와. 서두르지 마.”
진호는 위로의 말을 건네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사실 그의 시야 역시 암흑 속에서 흐릿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감각이 날카로워질수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것들의 존재감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저벅저벅, 진호의 발소리가 다시금 어둠을 가르고 나아갔다.
그때였다.
쉬이익–
귓가를 스치는 섬뜩한 소리. 마치 거대한 뱀이 몸을 비트는 듯한 마찰음이었다. 진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발걸음이 멈췄고,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무슨 소리예요?” 서연의 목소리는 속삭임에 가까웠다.
진호는 램프를 천천히 들어 올려 주변을 비췄다. 램프의 좁은 시야에 들어온 것은, 고대 유적의 벽면을 뒤덮은 이끼와 곰팡이, 그리고 툭 불거진 돌기뿐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더 문제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바람 소리일 거야.”
그는 일부러 크게 말하며 서연을 안심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의 나이프 자루를 쥐고 있었다. 바람? 던전 깊숙한 곳에서 바람이 불어올 리가 없었다. 그것은 명백히 ‘무언가’가 만들어낸 소리였다.
쉬이익–
이번에는 훨씬 가까이서 들렸다. 램프 불빛이 미처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움직이는 듯한 희미한 기척. 쿵, 쿵, 진호의 심장이 북처럼 울렸다. 이곳 던전에는 그림자를 먹고 사는 짐승이 있었다. 빛을 싫어하고, 소리에 민감하며, 인간의 그림자에 숨어들어 순식간에 목덜미를 물어뜯는 ‘야영추적자’.
“서연아, 내 등 뒤에 바짝 붙어.”
진호는 목소리를 낮춰 경고했다. 서연은 말없이 그의 등 뒤로 완전히 몸을 숨겼다. 그녀의 가는 어깨가 진호의 등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진호는 램프를 비스듬히 기울여 주변을 훑었다. 불빛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벽에 길게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림자. 그래, 바로 저것이었다. 빛이 닿지 않는 곳, 빛이 만들어내는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것.
“젠장…”
낮은 욕설이 진호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지금 상대하기엔 너무나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낡은 램프는 언제 꺼질지 모르는 상태였고, 야영추적자는 빛이 없는 곳에서 압도적인 강함을 자랑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쉬이익– 쿠궁!
갑작스러운 진동과 함께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돌덩이가 램프 불빛이 비추는 바로 그 앞을 덮쳤다. 진호는 순간적으로 서연을 끌어당겨 뒤로 물러섰다. 먼지가 뿌옇게 일었고, 흙과 돌 부스러기가 비 오듯 쏟아졌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졌다.
“쿨럭! 진호 오빠!”
서연의 기침 소리와 함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호는 고통스러운 기침을 뱉어내면서도 서연을 감싸 안은 손을 풀지 않았다. 먼지가 걷히기를 기다릴 틈도 없었다. 천장이 무너진 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닐 수도 있었다. 야영추적자가 고의로 낙석을 유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녀석들은 똑똑했다.
불현듯, 그의 손에 들린 램프가 불안하게 깜빡였다. 빛이 희미해졌다. 배터리가 거의 소진된 것이다.
“안 돼…!”
진호의 눈이 크게 뜨였다. 램프가 꺼지면, 그들은 완벽한 어둠 속에서 맹인과 다름없었다. 그건 죽음을 의미했다.
그 순간, 먼지 구름 저편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을 발했다. 빛에 노출되기를 극도로 꺼리는 야영추적자였지만, 사냥감이 눈앞에 있을 때는 잠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했다. 녀석은 굶주린 짐승처럼 낮은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크아아아-!
야영추적자가 포효하며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녀석의 윤곽이 드러났다. 검고 날렵한 몸체, 길고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무엇보다 어둠 그 자체인 듯한 피부색이 공포를 자아냈다. 녀석은 진호를 향해 돌진했다.
진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서연을 등 뒤로 더 깊숙이 숨겼다. 그리고 손에 쥔 나이프를 앞으로 내질렀다. 램프의 불빛이 완전히 꺼지는 동시에, 그는 자신이 무엇을 베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콰앙!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진호는 강한 충격을 느끼며 벽으로 나동그라졌다. 폐를 짓누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서연의 비명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오빠! 오빠!”
진호는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왼쪽 어깨를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야영추적자의 발톱에 스친 것 같았다. 뼈가 부러진 것은 아닐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진호는 오직 서연의 목소리에만 의지했다.
“서연아…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네, 네… 오빠는요?!”
“괜찮아… 걱정 마.”
괜찮기는 개뿔. 이미 피가 흐르고 있는 어깨를 애써 짓눌렀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녀석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시각을 잃은 대신, 청각과 후각이 극한으로 날카로워졌다.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풍겼다. 자신의 피였다.
쉬이익…
녀석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훨씬 가까이서, 마치 바로 코앞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진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녀석은 어둠 속에 완벽하게 녹아들어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진호는 죽음의 문턱에서 발악하는 짐승처럼 이를 악물었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작은 주머니로 향했다. 그 안에는 고작 두 개 남은 섬광탄이 들어 있었다. 녀석은 빛에 약했다. 하지만 던전의 어둠은 너무나도 광활했고, 섬광탄의 효과는 찰나에 불과했다.
“서연아, 내 말 잘 들어.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막아. 알았지?”
진호는 극도의 긴장감 속에서도 차분하게 지시했다. 서연은 대답 대신 진호의 등에 얼굴을 파묻는 것으로 동의를 표했다.
쉬이익… 녀석의 숨소리가 그의 바로 등 뒤에서 들렸다.
진호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하나… 둘… 셋!”
그는 온몸의 힘을 모아 뒤를 돌아보며 섬광탄을 녀석의 예상 위치에 던졌다. 동시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팟-!
어둠을 찢는 강렬한 섬광이 던전 복도를 일순간 하얗게 물들였다. 눈을 감았는데도 불구하고 시야가 타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강력한 빛이었다.
크아아아악!
섬광과 동시에, 야영추적자의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던전을 뒤흔들었다. 빛을 싫어하는 녀석에게 섬광탄은 치명적인 고문과도 같았다.
진호는 빛이 사라지는 찰나의 순간, 눈을 번쩍 떴다. 녀석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섬광으로 인해 방향 감각을 잃고 비틀거리는 모습이었다. 지금이다.
“뛰어!”
진호는 서연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섬광탄이 터진 곳의 반대 방향으로 전력 질주했다. 어깨의 통증이 비명을 질렀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그들이 갈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앞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넘어지면 끝장이었다.
덜커덩!
진호의 발이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순간, 서연이 그의 팔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 덕분에 진호는 완전히 넘어지지 않고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서연의 손아귀는 작았지만, 그 속에 담긴 절박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예요! 오빠!”
서연의 눈에 번뜩이는 희망의 빛. 그녀가 가리킨 곳은 램프 불빛이 겨우 닿는, 벽면에 숨겨진 작은 틈새였다. 너무나도 좁아서 성인 남자가 들어가기엔 버거워 보였다.
진호는 망설일 틈도 없이 그 틈새로 몸을 던졌다. 찢어지는 어깨의 고통은 이미 감각 바깥의 일이었다. 흙먼지와 잔해들이 쏟아져 내리는 틈새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갔다.
“서연아! 빨리!”
그의 뒤로 서연이 몸을 구겨 넣었다. 몸이 절반쯤 들어섰을 때, 뒤에서 다시 야영추적자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은 이미 섬광의 충격에서 벗어나 그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진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서연을 안으로 밀어 넣고, 자신도 간신히 몸을 밀어 넣었다. 틈새가 너무 좁아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겨우 몸을 돌려 틈새 입구를 바라보자, 섬뜩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이 틈새 입구를 긁는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울렸다.
쉬이익- 긁적, 긁적…
흙먼지가 틈새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야영추적자는 끈질겼다. 녀석은 작은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거대한 몸집이 틈새에 걸려 더 이상 들어오지 못했지만, 녀석의 앞발톱은 이미 틈새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있었다.
진호는 온몸으로 틈새 입구를 막아섰다. 그의 등 뒤로 서연의 떨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숨 막히는 정적 속, 붉은 눈동자가 틈새 안의 그들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녀석은 포기하지 않을 터였다. 틈새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였고, 그들의 식량과 물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호는 어둠 속에서 피가 솟구치는 어깨를 부여잡았다. 생존은, 한순간도 쉬지 않는 악몽이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 내일은 존재할까?
밖은 여전히 어둡고, 녀석의 숨소리는 틈새를 통해 끊임없이 들려왔다.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