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오컬트 호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어둠의 뿌리

    ### 1화. 밤안개골의 그림자

    밤안개골은 이름처럼 항상 어둑했다. 낮에도 햇빛 한 줌 제대로 들지 않는 깊은 골짜기, 낡고 기이한 전설들이 마치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곳. 지도에도 희미하게 점만 찍혀 있을 뿐, 외지인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나는 고색창연한 이 마을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어떤 예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던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나는 민속학과 고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었다. 내 연구 주제는 ‘멸실된 고대 신앙의 흔적과 그 변용’이었고, 밤안개골은 교수님의 비공개 자료에서 발견한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존재를 숭배하는 원시적 의식이 남아있다는 기록이 있었다. 비록 단 두 줄뿐인 짧은 메모였지만, 나는 그 문장에서 형언할 수 없는 이끌림을 느꼈다.

    마을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낡은 한옥 지붕 위로는 검은 이끼가 뒤덮여 있었고, 굽이진 돌담길 사이로는 희미한 안개가 끊임없이 흘렀다. 스산한 바람이 불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속삭이는 것 같았다. 드문드문 보이는 주민들의 얼굴에는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나를 노골적으로 피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경계하는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닭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오직 어른들의 묵묵한 시선만이 존재하는 곳.

    가장 오래된 집 중 하나를 임시 거처로 정했다. 흙벽에 스며든 서늘함은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오한을 느끼게 했다. 낡은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 아래, 나는 가져온 자료들을 펼쳤다. 교수님의 메모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밤안개골, 숲의 경계에 이르면 결코 뒤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그곳에는 어둠의 뿌리가 잠들어 있다.’

    어둠의 뿌리. 그 기이한 표현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뿌리라니. 거대한 나무의 뿌리일까, 아니면 더 형이상학적인 어떤 존재를 뜻하는 것일까. 밤이 깊어질수록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를 짓눌렀다. 창밖에서는 숲의 그림자가 짙고 검게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안에서 마치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며칠 동안 나는 마을을 조사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숲에 대한 질문을 꺼낼 때마다 그들은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거나,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자리를 피했다. 젊은이들은 모두 마을을 떠났고, 남은 노인들은 입버릇처럼 ‘숲의 주인’이나 ‘옛것’에 대한 모호한 경고만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아가씨,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마소. 옛것은… 옛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법이여. 건드리면 안 되는 것이지.”
    어느 날, 유일하게 나에게 말을 걸어주던 할머니가 잔뜩 주름진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할머니의 눈빛에는 깊은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체념이 섞여 있었다.

    결국 나는 내 발로 숲을 찾아 나섰다. 주민들이 그렇게 경고하던 ‘숲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다.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들은 하늘을 가려 낮인데도 불구하고 어두컴컴했다. 땅은 습하고 질척거렸으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축한 흙이 신발에 달라붙었다. 공기 중에는 흙과 썩어가는 나뭇잎 냄새,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비릿한 향이 뒤섞여 있었다.

    숲은 소리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새들의 지저귐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내 발소리와 거칠어지는 숨소리만이 고요를 깨뜨렸다. 길을 잃은 지 오래였다. 나침반은 제멋대로 돌아갔고, 스마트폰은 먹통이 된 지 오래였다. 나는 당황했지만,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강렬한 희열을 느꼈다. 바로 이것이었다. 내가 찾아 헤매던 미지의 감각.

    얼마나 헤매었을까. 발밑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나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진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검은 돌덩이였다. 아니, 돌덩이라기에는 너무나 매끄럽고, 동시에 어딘가 꿈틀거리는 듯한 생명감이 느껴졌다. 뿌리처럼 땅속 깊이 박혀 있었지만, 그 표면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홀린 듯 손을 뻗어 그 표면을 만졌다.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은 단순한 돌의 차가움이 아니었다. 어떤 거대한 존재의 본질적인 냉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묘한 진동.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이 거대한 ‘뿌리’와 연결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숲의 어둠이 더욱 짙어지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한번 발길이 닿았던 곳을 등지자, 기이한 현상이 시작되었다. 숲의 경계를 벗어나 마을로 향하는 길 내내, 나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떨칠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눈동자가 나를 쫓아오는 것처럼.

    밤안개골의 내 방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온몸에 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피곤함보다는 기묘한 흥분감이 더 크게 밀려왔다. 그 ‘뿌리’의 감촉, 그 냉기, 그 진동이 잊히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돌이 아니었다. 분명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그날 밤,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드넓고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하늘도 땅도 없는, 그저 무한한 검은 심연. 그런데 그 심연 속에서, 수없이 많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크기도 모양도 다른 무수한 눈동자들. 어떤 눈은 한없이 깊고 고요했으며, 어떤 눈은 섬뜩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그 모든 눈동자들은 한결같이 나를 향해 있었다. 나를, 마치 가장 오래된 기억처럼, 가장 간절한 갈망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두려움에 떨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눈동자들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내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욕망들,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또 다른 그림자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 그 존재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소리 없이, 하지만 뼛속까지 울리는 목소리로.

    *오랜 시간… 기다렸다… 나의… 조각이여…*

    그 목소리는 내 언어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조각. 내가 이 존재의 일부라는 뜻인가? 혹은 내가 이 존재에게 필요한 조각이라는 뜻인가?

    나는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희미한 새벽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온몸에 닭살이 돋아 있었고, 심장은 광란하듯 뛰어댔다. 꿈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선명해서 현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창가에 놓인 낡은 탁자를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내가 어젯밤 가져다 놓았던 작은 꽃병이 있었다. 꽃병 옆, 희미한 달빛이 닿는 곳에, 작은 물방울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투명한 물방울은 아니었다. 옅은 검은빛이 감도는, 마치 농밀한 먹물처럼 보이는 액체. 그리고 그 옆에는, 내가 본 적 없는 형태의 꽃잎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밤하늘의 어둠을 닮은 검은색. 매끄럽고 부드러운 질감. 그리고 은은하게 풍겨오는, 어젯밤 숲 속에서 맡았던 그 비릿하고도 알 수 없는 향기. 그것은 분명 숲의 ‘뿌리’가 나에게 보낸 답장이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요동쳤다. 이성이 경고했지만, 내 안의 어떤 미지의 감각이 환호했다. 이것은 위험하다. 이 존재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불길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그것에게 강렬하게 이끌렸다. 마치 태초부터 이어져 온 인연처럼, 거부할 수 없는 숙명처럼.

    나는 손을 뻗어 그 검은 꽃잎을 집어 들었다. 차가웠다. 하지만 그 차가움은 이상하게도 포근했다. 손가락 끝으로 꽃잎의 부드러운 표면을 쓸어내리자, 은은한 향기가 더욱 진하게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때, 닫혀 있던 방문이 *스윽* 하고 천천히 열렸다.
    복도 저편, 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형체가 없었지만, 분명히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검은 숲의 뿌리가, 이제는 내 침실까지 발을 들인 것이다.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동시에 그 존재에게 매료되고 있었다.
    금지된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문턱을 넘어선 뒤였다.

  • 스페이스 오페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7화: 그림자 속의 강철 심장

    암흑 성운 ‘카리돈의 숨결’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했다. 거대한 먼지 구름과 셀 수 없는 소행성들이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침묵 속에서 유영했고, 그 중심 어딘가에 자리 잡은 반군 기지는 그 어떤 제국의 감시망도 피해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낡은 폐기물 처리장의 잔해를 개조한 격납고 안, ‘망치’라 불리는 낡은 수송선 주위로 모인 대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세이라의 손끝에서 홀로그램 지도가 우주 공간에 떠올랐다. 거대한 가스 행성 ‘크로노스’의 일곱 번째 위성, 그중에서도 희귀 광물 ‘오리하르콘’을 정련하는 제국군 핵심 정련소의 윤곽이 붉게 빛났다. 그 주변을 겹겹이 두른 방어막과 순찰 경로가 섬뜩할 정도로 정밀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목표는 저기다.” 세이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홀로그램 지도를 꿰뚫어 볼 듯 날카로웠다.

    젊은 파일럿, 카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직 스물 남짓이었지만, 함선 조종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정련소는 제국군의 핵심 보급 기지입니다. 병력도 상상을 초월하고, 방어막도….”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낡은 작업복 차림의 릭이 렌치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한때 제국군 공학자였으나, 제국의 잔혹함에 환멸을 느끼고 반군에 합류한 베테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대체할 곳이 없어. 저기서 나오는 오리하르콘 광물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거니까. 무기 제조에 필수적이야.”

    세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하지만 제국의 탐욕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어. 크로노스 VII 정련소는 광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우리 민족이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다.” 그녀의 목소리에 분노의 감정이 스쳤다. “우리는 자원을 확보하고, 동시에 저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무모합니다.” 카이가 반대했다.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특히 저곳은 제국군 제3함대가 주둔하는….”

    “가능성은 1%라도 있다면, 해야 한다.” 세이라가 카이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시선은 확고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저항이다. 우리에게 더는 물러설 곳은 없어. 준비해. ‘그림자 호’를 타고 잠입한다.”

    **

    ‘그림자 호’는 낡은 화물선처럼 위장된 반군의 기함이었다. 제국군의 표준 함선 규격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배였지만, 릭이 직접 개조한 은폐 장치와 특수 엔진 덕분에 제국군 스캔망을 피해 움직일 수 있었다. 카이의 손이 조종간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림자 호는 거대한 소행성대를 뱀처럼 미끄러져 통과했다. 릭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함선의 미세한 진동까지 놓치지 않으며 항로를 보정했다.

    “제국군 중형 순찰함 접근 중!” 카이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불과 수백 미터 옆을 스쳐 지나가는 제국군 함선의 거대한 그림자가 함교 안으로 드리웠다. 함교 안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젠장, 들킬 뻔했잖아!” 카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손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세이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정면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릭, 방어막 약화 지점은?”

    릭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정문에서 동쪽으로 300미터. 과거 채굴 사고로 생긴 균열이 있어. 하지만 그만큼 불안정할 거야. 정밀하게 접근해야 해.”

    “카이.”

    “알겠습니다.” 카이가 이를 악물고 조종간을 틀었다. 그림자 호는 제국군 정련소의 거대한 방어막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레이저포가 번뜩이는 제국군 방어포탑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지만, 그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거대한 방어막에 부딪히기 직전, 릭이 외쳤다. “지금! 제어장치 과부하! 방어막 개방!”

    카이가 절묘한 타이밍에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렸고, 그림자 호는 마치 거대한 파도를 가르듯 방어막의 미세한 틈을 통과했다. 섬뜩한 경고음이 함교를 가득 채웠지만, 그들은 무사히 안착했다. 제국군 정련소 내부에 침투한 것이다.

    **

    파괴된 방어막 틈으로 진입한 특공대는 정련소 내부의 좁고 어두운 통로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눅눅한 공기에서는 기계 기름과 섞인 역겨운 쇠 비린내가 났다. 목표는 주 제어실. 그곳을 장악해야만 정련소의 모든 기능을 통제하고, 오리하르콘 광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앞쪽에 2인조 순찰조!” 카이가 속삭였다. 그는 세이라 옆에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세이라가 손을 들어올리자 팀원들이 일제히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두 명의 제국군 병사가 무심하게 다가왔고, 이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저항군 대원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미약한 마취 가스 냄새가 공중에 퍼졌다.

    그때였다. 닫힌 철문 너머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릭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었다. 낡은 작업복 차림으로 쇠사슬에 묶인 채 강제로 광물을 캐내고 있는 피골이 상접한 얼굴들. 그들의 눈에는 희망 대신 절망만이 가득했다. 노예였다. 제국이 ‘노동력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끌고 온 행성 주민들이었다.

    “세이라….” 카이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그의 눈은 불타올랐다. 그의 고향도 제국의 착취에 시달렸다.

    세이라의 심장이 아려왔다. 저들은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제국의 횡포에 고통받는.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임무를 수행한다.” 그녀는 짧게 명령했다. “그리고, 저들을 풀어줘라.”

    팀원 중 한 명이 재빨리 제어판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쇠사슬이 풀리고, 사람들의 얼굴에 일말의 혼란과 함께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정련소 전체를 뒤흔드는 비상벨이 울려 퍼졌다. 붉은 경고등이 번쩍였다.

    “젠장! 들켰습니다!” 릭의 다급한 목소리가 통신을 찢었다. “제국군 병력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주 제어실 봉쇄!”

    통신이 끊겼다. 철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라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주 제어실로 향하는 길은 이미 제국군 병력으로 봉쇄되었고, 노예들을 풀어준 통로 역시 제국군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들은 갇혔다.

    “세이라님!” 카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세이라의 얼굴에 차가운 결의가 떠올랐다. 그녀는 허리춤에 찬 블래스터를 뽑아 들었다.

    “물러서지 마라.”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그림자다. 제국에 맞서는 불꽃이다!”

    수십 명의 제국군 병사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정련소의 어둠 속에서, 반군의 작은 불꽃이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회색 먼지가 바람에 실려 흩날렸다. 한때 거대한 빌딩의 잔해였을 콘크리트 기둥들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 그림자 아래, 임시변통으로 쌓아 올린 흙벽과 찢어진 천막들이 위태롭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심판의 아레나’라 불리는 곳이었다. 문명은 무너졌고, 인류는 파편처럼 흩어졌으나, 이 잔혹한 세상에도 변치 않는 진리가 하나 있었다. 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 힘을 가리는 최후의 시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은호는 흙먼지 낀 관중석 한 귀퉁이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백의 눈동자들이 아래의 원형 투기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기대보다는 체념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의 눈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저들이 바로 이 세계의 운명을 짊어진 ‘무림 고수’들이었다.

    “젠장, 또 시작이군.”

    은호의 옆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형인 강민이었다. 강민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지쳐 보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이긴다고 세상이 변할까? 어차피 우린 계속 죽어나갈 텐데.”

    “그렇지 않아, 사형.” 은호는 작게 반박했다. “승자는 ‘새벽의 문’을 열 권한을 얻어. 그곳에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대지가… 인류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있어.”

    강민은 코웃음을 쳤다. “희망? 희망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졌어. 저들 중 누가 이기든 결국은 또 다른 피바람만 불어올 뿐이야.”

    은호는 강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투기장 중앙에 서 있는 두 인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첫 경기의 선수들이었다. 한 명은 잿빛 도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이름은 ‘철권 대사형’. 잊혀진 ‘구문파’의 마지막 계승자로, 강철 같은 주먹으로 모든 것을 부순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검은 가죽 옷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이름은 ‘흑영검’. 고아 출신으로 혼자서 무공을 깨쳤다는데,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차가워서 한 번 휘두르면 상대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할 새도 없이 쓰러진다고 했다.

    “흥, 결국 저런 괴물들의 피 튀기는 싸움인가.” 강민이 또 다시 중얼거렸다. “우린 뭘 할 수 있지?”

    “우린… 그들을 지켜봐야 해.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저곳에 설 준비를 해야지.” 은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주먹은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져 있었다. 그의 작은 문파는 이미 사냥터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새벽의 문’은 은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쉰 목소리의 심판이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경기, 철권 대사형 대 흑영검! 준비, 시작!”

    투기장 주변을 둘러싼 거친 천막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바람은 왠지 모르게 비릿한 피 냄새를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철권 대사형이 먼저 움직였다. 늙었지만 그의 몸놀림은 산처럼 묵직하고, 동시에 대지처럼 견고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투기장의 흙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그는 아무런 기술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주먹을 쥐고, 그 주먹에 모든 기운을 집중시켰을 뿐이었다. 은호는 그것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직 하나의 목적에 집중하는 무공.

    반면 흑영검은 한 줄기 그림자 같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이미 철권 대사형의 사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검은 번개처럼 뽑혔다. 쉭,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신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명확한 궤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잔상만이 그의 움직임을 간신히 뒤쫓을 뿐이었다.

    “저게 흑영검의 ‘무영검(無影劍)’이군.” 강민이 숨을 들이켰다. “말 그대로 그림자조차 없는 검이라더니… 정말 보이는 게 없어.”

    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은 흑영검의 미세한 근육 움직임과 철권 대사형의 숨겨진 기운 흐름을 동시에 쫓으려 애썼다. 흑영검의 검은 철권 대사형의 묵직한 방어를 비집고 들어가 그의 빈틈을 노렸다. 날카로운 검기가 늙은 도포 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앙!

    철권 대사형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한 주먹질이었으나, 그 안에는 산을 부술 듯한 엄청난 내공이 담겨 있었다. 흑영검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으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에 휘말려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철권 대사형은 다시 한 발짝 내딛으며 흑영검의 경로를 차단했다.

    “저게 바로 ‘파산권(破山拳)’이야. 모든 것을 정면으로 부수는 권법.” 은호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눈앞의 대결에서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흑영검은 자신의 검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검을 허리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철권 대사형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것은 순식간에 차가운 안개처럼 변하여 투기장을 뒤덮었다.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무슨 짓이지? 저건… 무공이 아닌데?” 강민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은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것은 무공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 재앙의 시대에 발견된, 오염된 기운을 변형시켜 사용하는 사악한 기술들 중 하나였다. 이른바 ‘변이 기술’.

    철권 대사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시야가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기척과 흐름에 의지하여 움직였다. 주먹을 쥐고, 마치 거대한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처럼 투기장 한가운데에 버티고 섰다.

    흑영검은 그 안개 속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더욱 예측 불가능해졌고, 안개 속에서 그의 검은 마치 수십 자루가 동시에 번뜩이는 환영처럼 보였다. 챙! 챙! 챙!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흑영검의 검이 철권 대사형의 팔뚝, 어깨, 옆구리를 쉼 없이 노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공격은 늙은 대사형의 단단한 피부에 막히거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의 방어막에 튕겨져 나갔다.

    “저 노인… 저런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어!” 강민이 경악하며 말했다.

    은호는 숨을 멈췄다. 철권 대사형의 몸은 마치 살아있는 강철 같았다. 그의 무공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온몸을 거대한 방패로 바꾸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안개 속에서 흑영검의 움직임이 잠시 주춤했다. 그는 분명히 지쳐가고 있었다. 변이 기술은 사용자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은호는 알고 있었다. 흑영검은 초조해 보였다.

    그 순간, 철권 대사형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안개 속에서도 흑영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듯했다. 늙은 노인의 입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두 손을 모아 가슴팍에 붙였다가, 마치 거대한 종을 치듯 양손을 동시에 벌렸다.

    콰아아앙!

    공기조차 휘어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파가 투기장 전체를 강타했다. 철권 대사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내공이 안개를 산산조각 내며 사방으로 흩뿌렸다. 흑영검의 변이 기술이 무력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내공의 폭풍에 휘말린 흑영검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된 듯 보였다. 철권 대사형의 공격은 물리적인 타격만이 아니었다. 그의 파산권은 상대의 내공 흐름을 뒤흔들어 놓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흑영검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다시 검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팍을 긋더니, 붉은 피를 검신에 발랐다. 그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크윽…! 저건… 금지된 술법이잖아!” 강민이 경악했다.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서 힘을 끌어내는 주술!”

    흑영검의 검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이전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강력해 보였다. 그는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철권 대사형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검은 한 줄기 붉은 섬광이 되어,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철권 대사형의 심장을 노렸다.

    “하아압!”

    철권 대사형은 묵묵히 그 공격을 받아냈다. 그의 두 주먹이 흑영검의 검과 충돌했다. 붉은 검기가 그의 육신을 꿰뚫으려 했으나, 늙은 노인의 몸은 마지막 남은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버텨내고 있었다. 피가 튀었다. 늙은 대사형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철권 대사형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흑영검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그 충격은 흑영검의 어깨를 그대로 강타했다.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투기장에 울려 퍼졌다. 흑영검의 몸은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그의 붉게 물들었던 눈빛은 다시 공허한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검은 손에서 떨어져 나와 차가운 흙바닥에 박혔다.

    심판의 쉰 목소리가 투기장을 갈랐다. “승자, 철권 대사형!”

    환호성은 없었다. 그저 무거운 침묵만이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치열하고 잔혹한 싸움은 그들의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는 것 같았다. 승리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서 있었고, 패배자는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철권 대사형의 강함은 경이로웠으나, 흑영검의 처절한 투혼 또한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이 싸움은 단순한 무공 대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의 신념과 생존을 건 처절한 절규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수많은 고수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은호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과연 이 잔혹한 아레나에서 살아남아 ‘새벽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 SF (공상과학)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피소드 1: 밤의 흔적

    **장면 1**

    **[1컷]**
    * **배경:** 한밤중, 도시의 고층 아파트.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이 별처럼 흩어져 있다. 아파트 내부, 거실 겸 작업실. 세련된 인테리어지만 어딘가 어지럽게 놓인 스케치와 태블릿, 그리고 모니터들이 현실감을 더한다.
    * **인물:** 이지아 (20대 후반). 트레이닝복 차림에 머리는 대충 묶었다. 안경을 쓰고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은 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하지만, 모니터에서 반사되는 빛이 그녀의 눈을 빛나게 한다.
    * **지아 (내레이션):** 마감은 언제나 내 목을 조르지. 특히 이렇게 창밖이 까만 새벽은 더. 시안 수정 요청이 너무 많잖아, 대체!
    * **SFX:** (키보드 탁탁탁)

    **[2컷]**
    * **배경:** 지아의 책상 위. 컵과 연필꽂이, 레퍼런스북 등이 놓여 있다.
    * **연출:** 책상 한쪽 끝에 놓여 있던 빈 커피잔이 아주 미세하게, 정말 아주 미세하게 안쪽으로 스르륵 움직인다. 육안으로는 거의 알아채기 힘든 정도.
    * **지아 (내레이션):** (하품) 흐음… 집중이 안 되네. 기분 탓인가. 왠지 모르게 한기가 도는 것 같기도 하고.
    * **SFX:** (아주 희미하게, 유리컵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 – 스윽…)

    **[3컷]**
    * **배경:** 여전히 모니터에 집중하는 지아. 그녀의 등 뒤, 거실 한쪽 벽에 걸린 그림 액자가 아주 살짝 기울어져 있다. 얇은 실크 스카프가 걸려 있던 벽걸이 후크도 흔들리는 듯하다.
    * **지아 (대사):** 아, 진짜. 이대로 가다간 날 새겠네. 차라리 밤샘하고 낮에 쉬는 게 낫겠다.
    * **SFX:** (키보드 탁탁탁) (아주 작은, 나무 액자가 흔들리는 소리 – 톡)

    **[4컷]**
    * **연출:** 지아가 고개를 돌려 액자를 쳐다본다.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다.
    * **지아 (내레이션):** 잠깐 멍 때렸네. 피곤하긴 피곤한가 보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장면 2**

    **[5컷]**
    * **배경:** 시간은 조금 흘러 새벽 3시 20분. 여전히 지아는 작업 중이다. 이제는 모니터 여러 개를 띄워놓고 씨름하고 있다. 눈이 충혈된 그녀의 얼굴이 화면 빛에 번들거린다.
    * **연출:** 지아가 물을 마시려 손을 뻗는 순간, 옆에 두었던 유리 물병이 저절로 콰당! 하고 쓰러진다. 물이 쏟아지며 책상 위 서류를 적신다.
    * **지아 (대사):** 으앗! 뭐야?!
    * **SFX:** (유리병이 쓰러지는 소리 – 콰당!) (물 쏟아지는 소리 – 촤아악)

    **[6컷]**
    * **연출:** 지아가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쓰러진 물병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움직인 것은 물병뿐.
    * **지아 (내레이션):** 내가 건드렸나? 아니, 손도 안 댔는데…
    * **지아 (대사):** (혼잣말) 아,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 **SFX:**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 쿵, 쿵)

    **[7컷]**
    * **배경:** 지아가 젖은 서류를 수습하는 동안, 거실 천장의 스탠드 조명이 깜빡인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 **연출:** 지아의 시선이 조명으로 향한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간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는 표정.
    * **지아 (대사):** (작게) 뭐야, 왜 이래…?
    * **SFX:** (형광등 깜빡이는 소리 – 찌이익, 찌이익)

    **[8컷]**
    * **배경:** 지아가 불안한 눈으로 조명을 응시한다. 조명이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그녀의 심장 박동도 그 속도에 맞춰 빨라진다.
    * **연출:** 그녀의 시선이 조명을 따라가다가, 문득 벽 한쪽의 선반으로 향한다. 선반 위에 놓여있던 두꺼운 전공 서적이 스르륵 밀려 나오더니, 이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책장이 펄럭이며 먼지가 흩날린다.
    * **지아 (내레이션):** 설마… 지진? 아니, 진동은 없는데.
    * **지아 (대사):** (공포에 질린 목소리) 이게… 뭐야…?
    * **SFX:** (책 떨어지는 소리 – 쿵!) (지아의 거친 숨소리 – 허억, 허억)

    **장면 3**

    **[9컷]**
    * **배경:**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 조명은 여전히 미친 듯이 깜빡인다. 지아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 숨을 고른다.
    * **연출:** 공포에 질린 지아의 얼굴 클로즈업.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그녀의 눈은 불안하게 좌우를 살핀다.
    * **지아 (내레이션):** 꿈일 거야. 제발 꿈이어야 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제발…
    * **SFX:**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 – 쿵쾅, 쿵쾅!)

    **[10컷]**
    * **배경:** 지아의 눈앞, 거실 한가운데. 바닥에 놓여있던 작은 스탠드 램프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불은 꺼져 있지만, 그 존재감이 뚜렷하다. 마치 무중력 상태가 된 것처럼 부드럽게 상승한다.
    * **연출:** 지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입이 떡 벌어진다. 턱이 미세하게 떨린다.
    * **지아 (대사):** (쉰 목소리) 거짓말…
    * **SFX:** (정적을 깨는, 작은 진동 소리 – 즈즈즈… (아주 미세하게 울리는))

    **[11컷]**
    * **연출:** 스탠드 램프가 허공에 뜬 채로, 마치 누군가 조종하는 것처럼 지아의 방향으로 천천히,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불빛이 깜빡이는 속도와 비슷하게, 램프도 주기적으로 흔들린다. 램프의 그림자가 벽에 일렁인다.
    * **지아 (내레이션):** 이건… 꿈이 아니야. 누가 장난치는 것도 아냐. 내 눈앞에서… 지금…
    * **SFX:** (램프가 움직이는 공기 소리 – 스으읍) (주변의 작은 물체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 – 쨍글…)

    **[12컷]**
    * **배경:** 지아의 침실 문. 잠겨있던 문고리가 스스로 덜컥! 하고 돌아간다. 이내 문이 천천히, 마치 누군가 미는 것처럼 스르륵 열린다. 안쪽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다.
    * **연출:** 어두운 침실 안에서, 정체 모를 검은 그림자가 언뜻 비친다. 빛의 잔상처럼 흐릿하게,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문틈 너머로 어른거린다.
    * **지아 (대사):** (비명) 으아아아악!!!
    * **SFX:**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 – 덜컥!) (문 열리는 소리 – 끼이이익) (지아의 절규)

    **[13컷]**
    * **연출:** 공중에 떠 있던 램프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산산조각 난다. 동시에 거실의 모든 불빛이 완전히 꺼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지아의 비명만이 울려 퍼진다.
    * **지아 (내레이션):** 도망쳐야 해.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 **SFX:** (유리 깨지는 소리 – 쨍그랑!) (전등이 나가는 소리 – 퍽!) (지아의 흐느끼는 숨소리 – 흐읍, 흐읍)

    **[14컷] (마지막 컷)**
    * **배경:** 완전히 어두워진 아파트 거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
    * **연출:**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지아를 감싸는 듯한 느낌.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녀에게 다가서는 것처럼,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 **지아 (내레이션):** (공포에 질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살려줘…
    * **SFX:** (정적.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주 낮고 기계적인, 알 수 없는 소리 – 삐이이이… 칙… 삐이이이…)
    * **텍스트:** 다음 화에 계속…

  • 스페이스 오페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7화: 그림자 속의 강철 심장

    암흑 성운 ‘카리돈의 숨결’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했다. 거대한 먼지 구름과 셀 수 없는 소행성들이 태곳적부터 이어져 온 침묵 속에서 유영했고, 그 중심 어딘가에 자리 잡은 반군 기지는 그 어떤 제국의 감시망도 피해 그림자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낡은 폐기물 처리장의 잔해를 개조한 격납고 안, ‘망치’라 불리는 낡은 수송선 주위로 모인 대원들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세이라의 손끝에서 홀로그램 지도가 우주 공간에 떠올랐다. 거대한 가스 행성 ‘크로노스’의 일곱 번째 위성, 그중에서도 희귀 광물 ‘오리하르콘’을 정련하는 제국군 핵심 정련소의 윤곽이 붉게 빛났다. 그 주변을 겹겹이 두른 방어막과 순찰 경로가 섬뜩할 정도로 정밀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목표는 저기다.” 세이라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홀로그램 지도를 꿰뚫어 볼 듯 날카로웠다.

    젊은 파일럿, 카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아직 스물 남짓이었지만, 함선 조종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정련소는 제국군의 핵심 보급 기지입니다. 병력도 상상을 초월하고, 방어막도….”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낡은 작업복 차림의 릭이 렌치를 만지작거렸다. 그는 한때 제국군 공학자였으나, 제국의 잔혹함에 환멸을 느끼고 반군에 합류한 베테랑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대체할 곳이 없어. 저기서 나오는 오리하르콘 광물은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거니까. 무기 제조에 필수적이야.”

    세이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하지만 제국의 탐욕을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어. 크로노스 VII 정련소는 광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우리 민족이 강제 노동에 시달리는 지옥과도 같은 곳이다.” 그녀의 목소리에 분노의 감정이 스쳤다. “우리는 자원을 확보하고, 동시에 저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무모합니다.” 카이가 반대했다.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특히 저곳은 제국군 제3함대가 주둔하는….”

    “가능성은 1%라도 있다면, 해야 한다.” 세이라가 카이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시선은 확고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저항이다. 우리에게 더는 물러설 곳은 없어. 준비해. ‘그림자 호’를 타고 잠입한다.”

    **

    ‘그림자 호’는 낡은 화물선처럼 위장된 반군의 기함이었다. 제국군의 표준 함선 규격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배였지만, 릭이 직접 개조한 은폐 장치와 특수 엔진 덕분에 제국군 스캔망을 피해 움직일 수 있었다. 카이의 손이 조종간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였다. 그림자 호는 거대한 소행성대를 뱀처럼 미끄러져 통과했다. 릭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함선의 미세한 진동까지 놓치지 않으며 항로를 보정했다.

    “제국군 중형 순찰함 접근 중!” 카이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렸다. 불과 수백 미터 옆을 스쳐 지나가는 제국군 함선의 거대한 그림자가 함교 안으로 드리웠다. 함교 안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젠장, 들킬 뻔했잖아!” 카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손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세이라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정면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릭, 방어막 약화 지점은?”

    릭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정문에서 동쪽으로 300미터. 과거 채굴 사고로 생긴 균열이 있어. 하지만 그만큼 불안정할 거야. 정밀하게 접근해야 해.”

    “카이.”

    “알겠습니다.” 카이가 이를 악물고 조종간을 틀었다. 그림자 호는 제국군 정련소의 거대한 방어막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레이저포가 번뜩이는 제국군 방어포탑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지만, 그들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거대한 방어막에 부딪히기 직전, 릭이 외쳤다. “지금! 제어장치 과부하! 방어막 개방!”

    카이가 절묘한 타이밍에 엔진 출력을 최대로 올렸고, 그림자 호는 마치 거대한 파도를 가르듯 방어막의 미세한 틈을 통과했다. 섬뜩한 경고음이 함교를 가득 채웠지만, 그들은 무사히 안착했다. 제국군 정련소 내부에 침투한 것이다.

    **

    파괴된 방어막 틈으로 진입한 특공대는 정련소 내부의 좁고 어두운 통로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눅눅한 공기에서는 기계 기름과 섞인 역겨운 쇠 비린내가 났다. 목표는 주 제어실. 그곳을 장악해야만 정련소의 모든 기능을 통제하고, 오리하르콘 광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앞쪽에 2인조 순찰조!” 카이가 속삭였다. 그는 세이라 옆에서 어둠 속을 응시했다.

    세이라가 손을 들어올리자 팀원들이 일제히 벽 뒤로 몸을 숨겼다. 두 명의 제국군 병사가 무심하게 다가왔고, 이내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저항군 대원들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했다. 미약한 마취 가스 냄새가 공중에 퍼졌다.

    그때였다. 닫힌 철문 너머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릭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십 명의 사람들이었다. 낡은 작업복 차림으로 쇠사슬에 묶인 채 강제로 광물을 캐내고 있는 피골이 상접한 얼굴들. 그들의 눈에는 희망 대신 절망만이 가득했다. 노예였다. 제국이 ‘노동력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끌고 온 행성 주민들이었다.

    “세이라….” 카이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그의 눈은 불타올랐다. 그의 고향도 제국의 착취에 시달렸다.

    세이라의 심장이 아려왔다. 저들은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제국의 횡포에 고통받는.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임무를 수행한다.” 그녀는 짧게 명령했다. “그리고, 저들을 풀어줘라.”

    팀원 중 한 명이 재빨리 제어판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쇠사슬이 풀리고, 사람들의 얼굴에 일말의 혼란과 함께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 순간, 정련소 전체를 뒤흔드는 비상벨이 울려 퍼졌다. 붉은 경고등이 번쩍였다.

    “젠장! 들켰습니다!” 릭의 다급한 목소리가 통신을 찢었다. “제국군 병력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주 제어실 봉쇄!”

    통신이 끊겼다. 철문이 닫히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이라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스캔했다. 주 제어실로 향하는 길은 이미 제국군 병력으로 봉쇄되었고, 노예들을 풀어준 통로 역시 제국군 병사들이 달려오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들은 갇혔다.

    “세이라님!” 카이가 다급하게 외쳤다.

    세이라의 얼굴에 차가운 결의가 떠올랐다. 그녀는 허리춤에 찬 블래스터를 뽑아 들었다.

    “물러서지 마라.”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그림자다. 제국에 맞서는 불꽃이다!”

    수십 명의 제국군 병사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정련소의 어둠 속에서, 반군의 작은 불꽃이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회색 먼지가 바람에 실려 흩날렸다. 한때 거대한 빌딩의 잔해였을 콘크리트 기둥들이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 그림자 아래, 임시변통으로 쌓아 올린 흙벽과 찢어진 천막들이 위태롭게 늘어서 있었다. 이곳은 ‘심판의 아레나’라 불리는 곳이었다. 문명은 무너졌고, 인류는 파편처럼 흩어졌으나, 이 잔혹한 세상에도 변치 않는 진리가 하나 있었다. 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 힘을 가리는 최후의 시험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은호는 흙먼지 낀 관중석 한 귀퉁이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백의 눈동자들이 아래의 원형 투기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희망보다는 절망이, 기대보다는 체념이 더 짙게 배어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의 눈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저들이 바로 이 세계의 운명을 짊어진 ‘무림 고수’들이었다.

    “젠장, 또 시작이군.”

    은호의 옆에서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형인 강민이었다. 강민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지쳐 보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이긴다고 세상이 변할까? 어차피 우린 계속 죽어나갈 텐데.”

    “그렇지 않아, 사형.” 은호는 작게 반박했다. “승자는 ‘새벽의 문’을 열 권한을 얻어. 그곳에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대지가… 인류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있어.”

    강민은 코웃음을 쳤다. “희망? 희망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썩어 문드러졌어. 저들 중 누가 이기든 결국은 또 다른 피바람만 불어올 뿐이야.”

    은호는 강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투기장 중앙에 서 있는 두 인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첫 경기의 선수들이었다. 한 명은 잿빛 도포를 걸친 노인이었다. 이름은 ‘철권 대사형’. 잊혀진 ‘구문파’의 마지막 계승자로, 강철 같은 주먹으로 모든 것을 부순다고 했다. 다른 한 명은 검은 가죽 옷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이름은 ‘흑영검’. 고아 출신으로 혼자서 무공을 깨쳤다는데,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차가워서 한 번 휘두르면 상대는 자신의 죽음을 인지할 새도 없이 쓰러진다고 했다.

    “흥, 결국 저런 괴물들의 피 튀기는 싸움인가.” 강민이 또 다시 중얼거렸다. “우린 뭘 할 수 있지?”

    “우린… 그들을 지켜봐야 해.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저곳에 설 준비를 해야지.” 은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주먹은 자신도 모르게 꽉 쥐어져 있었다. 그의 작은 문파는 이미 사냥터에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그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새벽의 문’은 은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쉰 목소리의 심판이 경기의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경기, 철권 대사형 대 흑영검! 준비, 시작!”

    투기장 주변을 둘러싼 거친 천막들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 바람은 왠지 모르게 비릿한 피 냄새를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철권 대사형이 먼저 움직였다. 늙었지만 그의 몸놀림은 산처럼 묵직하고, 동시에 대지처럼 견고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투기장의 흙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그는 아무런 기술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주먹을 쥐고, 그 주먹에 모든 기운을 집중시켰을 뿐이었다. 은호는 그것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라는 것을 알았다. 모든 잡념을 버리고, 오직 하나의 목적에 집중하는 무공.

    반면 흑영검은 한 줄기 그림자 같았다. 그는 움직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이미 철권 대사형의 사각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검은 번개처럼 뽑혔다. 쉭,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검신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명확한 궤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잔상만이 그의 움직임을 간신히 뒤쫓을 뿐이었다.

    “저게 흑영검의 ‘무영검(無影劍)’이군.” 강민이 숨을 들이켰다. “말 그대로 그림자조차 없는 검이라더니… 정말 보이는 게 없어.”

    은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은 흑영검의 미세한 근육 움직임과 철권 대사형의 숨겨진 기운 흐름을 동시에 쫓으려 애썼다. 흑영검의 검은 철권 대사형의 묵직한 방어를 비집고 들어가 그의 빈틈을 노렸다. 날카로운 검기가 늙은 도포 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콰앙!

    철권 대사형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한 주먹질이었으나, 그 안에는 산을 부술 듯한 엄청난 내공이 담겨 있었다. 흑영검은 재빨리 뒤로 물러났으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파동에 휘말려 순간적으로 자세가 흐트러졌다.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철권 대사형은 다시 한 발짝 내딛으며 흑영검의 경로를 차단했다.

    “저게 바로 ‘파산권(破山拳)’이야. 모든 것을 정면으로 부수는 권법.” 은호는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눈앞의 대결에서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못했다.

    흑영검은 자신의 검이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듯, 검을 허리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철권 대사형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그것은 순식간에 차가운 안개처럼 변하여 투기장을 뒤덮었다. 시야가 급격히 흐려졌다.

    “무슨 짓이지? 저건… 무공이 아닌데?” 강민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은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것은 무공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 재앙의 시대에 발견된, 오염된 기운을 변형시켜 사용하는 사악한 기술들 중 하나였다. 이른바 ‘변이 기술’.

    철권 대사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시야가 가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기척과 흐름에 의지하여 움직였다. 주먹을 쥐고, 마치 거대한 파도를 막아내는 방파제처럼 투기장 한가운데에 버티고 섰다.

    흑영검은 그 안개 속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더욱 예측 불가능해졌고, 안개 속에서 그의 검은 마치 수십 자루가 동시에 번뜩이는 환영처럼 보였다. 챙! 챙! 챙!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흑영검의 검이 철권 대사형의 팔뚝, 어깨, 옆구리를 쉼 없이 노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공격은 늙은 대사형의 단단한 피부에 막히거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의 방어막에 튕겨져 나갔다.

    “저 노인… 저런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내고 있어!” 강민이 경악하며 말했다.

    은호는 숨을 멈췄다. 철권 대사형의 몸은 마치 살아있는 강철 같았다. 그의 무공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 온몸을 거대한 방패로 바꾸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안개 속에서 흑영검의 움직임이 잠시 주춤했다. 그는 분명히 지쳐가고 있었다. 변이 기술은 사용자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은호는 알고 있었다. 흑영검은 초조해 보였다.

    그 순간, 철권 대사형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안개 속에서도 흑영검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듯했다. 늙은 노인의 입에서 낮은 으르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두 손을 모아 가슴팍에 붙였다가, 마치 거대한 종을 치듯 양손을 동시에 벌렸다.

    콰아아앙!

    공기조차 휘어지는 듯한 엄청난 충격파가 투기장 전체를 강타했다. 철권 대사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내공이 안개를 산산조각 내며 사방으로 흩뿌렸다. 흑영검의 변이 기술이 무력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내공의 폭풍에 휘말린 흑영검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이미 승패는 결정된 듯 보였다. 철권 대사형의 공격은 물리적인 타격만이 아니었다. 그의 파산권은 상대의 내공 흐름을 뒤흔들어 놓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흑영검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다시 검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가슴팍을 긋더니, 붉은 피를 검신에 발랐다. 그의 눈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크윽…! 저건… 금지된 술법이잖아!” 강민이 경악했다. “자신의 생명력을 태워서 힘을 끌어내는 주술!”

    흑영검의 검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이전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강력해 보였다. 그는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철권 대사형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검은 한 줄기 붉은 섬광이 되어,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하게 철권 대사형의 심장을 노렸다.

    “하아압!”

    철권 대사형은 묵묵히 그 공격을 받아냈다. 그의 두 주먹이 흑영검의 검과 충돌했다. 붉은 검기가 그의 육신을 꿰뚫으려 했으나, 늙은 노인의 몸은 마지막 남은 내공을 모두 끌어올려 버텨내고 있었다. 피가 튀었다. 늙은 대사형의 어깨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내, 철권 대사형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그의 주먹이 흑영검의 검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그 충격은 흑영검의 어깨를 그대로 강타했다.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투기장에 울려 퍼졌다. 흑영검의 몸은 허수아비처럼 쓰러졌다. 그의 붉게 물들었던 눈빛은 다시 공허한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검은 손에서 떨어져 나와 차가운 흙바닥에 박혔다.

    심판의 쉰 목소리가 투기장을 갈랐다. “승자, 철권 대사형!”

    환호성은 없었다. 그저 무거운 침묵만이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모두가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치열하고 잔혹한 싸움은 그들의 마음속에 무거운 돌덩이를 올려놓는 것 같았다. 승리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겨우 서 있었고, 패배자는 미동도 없이 쓰러져 있었다.

    은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철권 대사형의 강함은 경이로웠으나, 흑영검의 처절한 투혼 또한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이 싸움은 단순한 무공 대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각자의 신념과 생존을 건 처절한 절규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수많은 고수들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은호는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리고 그가 과연 이 잔혹한 아레나에서 살아남아 ‘새벽의 문’을 열 수 있을까.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 SF (공상과학)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피소드 1: 밤의 흔적

    **장면 1**

    **[1컷]**
    * **배경:** 한밤중, 도시의 고층 아파트.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이 별처럼 흩어져 있다. 아파트 내부, 거실 겸 작업실. 세련된 인테리어지만 어딘가 어지럽게 놓인 스케치와 태블릿, 그리고 모니터들이 현실감을 더한다.
    * **인물:** 이지아 (20대 후반). 트레이닝복 차림에 머리는 대충 묶었다. 안경을 쓰고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은 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하지만, 모니터에서 반사되는 빛이 그녀의 눈을 빛나게 한다.
    * **지아 (내레이션):** 마감은 언제나 내 목을 조르지. 특히 이렇게 창밖이 까만 새벽은 더. 시안 수정 요청이 너무 많잖아, 대체!
    * **SFX:** (키보드 탁탁탁)

    **[2컷]**
    * **배경:** 지아의 책상 위. 컵과 연필꽂이, 레퍼런스북 등이 놓여 있다.
    * **연출:** 책상 한쪽 끝에 놓여 있던 빈 커피잔이 아주 미세하게, 정말 아주 미세하게 안쪽으로 스르륵 움직인다. 육안으로는 거의 알아채기 힘든 정도.
    * **지아 (내레이션):** (하품) 흐음… 집중이 안 되네. 기분 탓인가. 왠지 모르게 한기가 도는 것 같기도 하고.
    * **SFX:** (아주 희미하게, 유리컵 바닥이 마찰하는 소리 – 스윽…)

    **[3컷]**
    * **배경:** 여전히 모니터에 집중하는 지아. 그녀의 등 뒤, 거실 한쪽 벽에 걸린 그림 액자가 아주 살짝 기울어져 있다. 얇은 실크 스카프가 걸려 있던 벽걸이 후크도 흔들리는 듯하다.
    * **지아 (대사):** 아, 진짜. 이대로 가다간 날 새겠네. 차라리 밤샘하고 낮에 쉬는 게 낫겠다.
    * **SFX:** (키보드 탁탁탁) (아주 작은, 나무 액자가 흔들리는 소리 – 톡)

    **[4컷]**
    * **연출:** 지아가 고개를 돌려 액자를 쳐다본다. 그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다.
    * **지아 (내레이션):** 잠깐 멍 때렸네. 피곤하긴 피곤한가 보다. 잠이 부족해서 그런가.

    **장면 2**

    **[5컷]**
    * **배경:** 시간은 조금 흘러 새벽 3시 20분. 여전히 지아는 작업 중이다. 이제는 모니터 여러 개를 띄워놓고 씨름하고 있다. 눈이 충혈된 그녀의 얼굴이 화면 빛에 번들거린다.
    * **연출:** 지아가 물을 마시려 손을 뻗는 순간, 옆에 두었던 유리 물병이 저절로 콰당! 하고 쓰러진다. 물이 쏟아지며 책상 위 서류를 적신다.
    * **지아 (대사):** 으앗! 뭐야?!
    * **SFX:** (유리병이 쓰러지는 소리 – 콰당!) (물 쏟아지는 소리 – 촤아악)

    **[6컷]**
    * **연출:** 지아가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쓰러진 물병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움직인 것은 물병뿐.
    * **지아 (내레이션):** 내가 건드렸나? 아니, 손도 안 댔는데…
    * **지아 (대사):** (혼잣말) 아,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 **SFX:**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 – 쿵, 쿵)

    **[7컷]**
    * **배경:** 지아가 젖은 서류를 수습하는 동안, 거실 천장의 스탠드 조명이 깜빡인다. 한두 번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 **연출:** 지아의 시선이 조명으로 향한다.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간다.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하는 표정.
    * **지아 (대사):** (작게) 뭐야, 왜 이래…?
    * **SFX:** (형광등 깜빡이는 소리 – 찌이익, 찌이익)

    **[8컷]**
    * **배경:** 지아가 불안한 눈으로 조명을 응시한다. 조명이 깜빡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그녀의 심장 박동도 그 속도에 맞춰 빨라진다.
    * **연출:** 그녀의 시선이 조명을 따라가다가, 문득 벽 한쪽의 선반으로 향한다. 선반 위에 놓여있던 두꺼운 전공 서적이 스르륵 밀려 나오더니, 이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책장이 펄럭이며 먼지가 흩날린다.
    * **지아 (내레이션):** 설마… 지진? 아니, 진동은 없는데.
    * **지아 (대사):** (공포에 질린 목소리) 이게… 뭐야…?
    * **SFX:** (책 떨어지는 소리 – 쿵!) (지아의 거친 숨소리 – 허억, 허억)

    **장면 3**

    **[9컷]**
    * **배경:**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 조명은 여전히 미친 듯이 깜빡인다. 지아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벌벌 떨고 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겨우 숨을 고른다.
    * **연출:** 공포에 질린 지아의 얼굴 클로즈업.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그녀의 눈은 불안하게 좌우를 살핀다.
    * **지아 (내레이션):** 꿈일 거야. 제발 꿈이어야 해.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라고… 제발…
    * **SFX:** (점점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 – 쿵쾅, 쿵쾅!)

    **[10컷]**
    * **배경:** 지아의 눈앞, 거실 한가운데. 바닥에 놓여있던 작은 스탠드 램프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른다. 불은 꺼져 있지만, 그 존재감이 뚜렷하다. 마치 무중력 상태가 된 것처럼 부드럽게 상승한다.
    * **연출:** 지아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입이 떡 벌어진다. 턱이 미세하게 떨린다.
    * **지아 (대사):** (쉰 목소리) 거짓말…
    * **SFX:** (정적을 깨는, 작은 진동 소리 – 즈즈즈… (아주 미세하게 울리는))

    **[11컷]**
    * **연출:** 스탠드 램프가 허공에 뜬 채로, 마치 누군가 조종하는 것처럼 지아의 방향으로 천천히,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불빛이 깜빡이는 속도와 비슷하게, 램프도 주기적으로 흔들린다. 램프의 그림자가 벽에 일렁인다.
    * **지아 (내레이션):** 이건… 꿈이 아니야. 누가 장난치는 것도 아냐. 내 눈앞에서… 지금…
    * **SFX:** (램프가 움직이는 공기 소리 – 스으읍) (주변의 작은 물체들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소리 – 쨍글…)

    **[12컷]**
    * **배경:** 지아의 침실 문. 잠겨있던 문고리가 스스로 덜컥! 하고 돌아간다. 이내 문이 천천히, 마치 누군가 미는 것처럼 스르륵 열린다. 안쪽은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다.
    * **연출:** 어두운 침실 안에서, 정체 모를 검은 그림자가 언뜻 비친다. 빛의 잔상처럼 흐릿하게,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문틈 너머로 어른거린다.
    * **지아 (대사):** (비명) 으아아아악!!!
    * **SFX:**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 – 덜컥!) (문 열리는 소리 – 끼이이익) (지아의 절규)

    **[13컷]**
    * **연출:** 공중에 떠 있던 램프가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산산조각 난다. 동시에 거실의 모든 불빛이 완전히 꺼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지아의 비명만이 울려 퍼진다.
    * **지아 (내레이션):** 도망쳐야 해. 당장… 여기서… 벗어나야…
    * **SFX:** (유리 깨지는 소리 – 쨍그랑!) (전등이 나가는 소리 – 퍽!) (지아의 흐느끼는 숨소리 – 흐읍, 흐읍)

    **[14컷] (마지막 컷)**
    * **배경:** 완전히 어두워진 아파트 거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화면.
    * **연출:**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차가운 기운이 지아를 감싸는 듯한 느낌.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녀에게 다가서는 것처럼,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 **지아 (내레이션):** (공포에 질려,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살려줘…
    * **SFX:** (정적.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아주 낮고 기계적인, 알 수 없는 소리 – 삐이이이… 칙… 삐이이이…)
    * **텍스트:** 다음 화에 계속…

  • 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고요하고 깊은 밤, 천암산맥의 심장부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별들이 보석처럼 박힌 하늘 아래, 인적 없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신선한 영기(靈氣)가 흐르는 이 신비로운 땅은 오랫동안 수많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이한 것은, 가끔씩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둔탁한 맥동이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쉬지 않고 뛰는 듯한 그 소리는, 오직 영민한 소수의 수련자들만이 감지할 수 있었다.

    연호(延皓) 역시 그 소수를 이루는 젊은 수련자 중 하나였다. 그는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도를 닦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의 몸에는 세속적인 번뇌 대신 끝없는 탐구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랏빛 새벽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는 그의 소박한 암자에서, 연호는 며칠 밤낮으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영시(靈識)는 땅속 깊은 곳, 태고의 시간마저 잊힌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에 이끌리고 있었다.

    “점점 강해지고 있어… 단순한 지맥의 변화가 아니다.”

    연호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암자를 나섰다.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천암산맥의 가장 깊고 음침한 곳, 일명 ‘화석림(化石林)’이라 불리는 숲이었다. 오래전, 알 수 없는 대재앙으로 인해 모든 나무가 살아있는 돌이 되어버렸다는 기이한 곳. 그곳은 영험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동시에 죽은 듯 고요한,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화석림 깊숙이 들어서자,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거대한 석목(石木)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형형색색의 돌나무들은 기이하게 뒤틀린 형태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사이를 지나는 바람조차 한숨처럼 들렸다. 연호는 감각을 한껏 곤두세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영기가 심장이 뛰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숲의 한가운데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다른 석목들보다 훨씬 거대하고 검푸른 기둥이 홀로 서 있었는데, 그 기둥의 한 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석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문은 마치 땅속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입구처럼 보였다.

    “이것이… 설마 전설 속의 ‘심연의 서고(深淵의 書庫)’인가?”

    연호는 숨을 들이켰다. 전설에 따르면, 이 땅 아래에는 태고 시대의 지혜가 봉인된 거대한 지하 유적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입구를 찾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유적의 존재 자체도 이제는 희미한 옛이야기로 치부되었다.

    석문은 어떤 흔적도 없이 완벽하게 닫혀 있었다. 연호는 손을 들어 석문에 가볍게 가져다 댔다. 차갑고 단단한 돌덩이 속에서, 잊혔던 영기가 그에게 울림을 보내왔다. 그는 자신의 영기를 조심스럽게 석문으로 불어넣었다. 그러자 석문에 새겨진 문자들이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유려하게 이어지며 석문 전체를 휘감았고, 이내 웅장한 기계음과 함께 석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과연…”

    석문 너머에는 끝없이 펼쳐진 암흑만이 존재했다. 연호는 주저 없이 발을 내디뎠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사방에서 수백 개의 영등(靈燈)이 동시에 밝아지며 그의 앞을 비췄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통로였다. 천장은 아득히 높아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처럼 영롱한 광석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고대 문명의 역사를 담은 듯한 거대한 벽화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벽화에는 하늘을 나는 용들과 빛을 뿜는 신선들, 그리고 알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 묘사되어 있었다. 통로의 공기는 맑고 서늘했으며, 태고의 영기가 물처럼 흘렀다.

    연호는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비로운 영음(靈音)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통로 곳곳에는 정교한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갑자기 솟아나는 독안개, 허공에서 나타나는 환영들, 그리고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는 통로까지. 그러나 연호는 탁월한 영시와 기지를 발휘하여 모든 함정을 무사히 통과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통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으로 변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영기의 밀도는 더욱 짙어졌다. 마침내, 그는 거대한 원형 광장에 도달했다.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그 기둥 안에는 마치 은하수를 응축시켜 놓은 듯한 영롱한 빛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수정 기둥 앞에는 누군가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형상의 석상이 있었다. 연호가 다가가자, 석상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랜 세월이 흘렀군… 새로운 탐구자인가?”

    연호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답했다. “감히 이곳에 발을 들였습니다. 당신은… 이 유적의 수호자이십니까?”

    “수호자이자, 기록자이자, 그리고… 마지막 증인.” 석상의 목소리는 오래된 바람 소리처럼 쓸쓸했다. “이곳은 태고의 지혜를 담은 ‘원천의 서고(源泉의 書庫)’. 우리 문명은 세상을 이루는 근본적인 힘, 즉 원천의 지혜를 탐구하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 지혜는 너무나 거대하여, 결국 우리 문명마저 감당하지 못할 재앙을 불러왔지.”

    석상은 긴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우리는 깨달았다. 우주의 모든 것은 순환하며, 어떤 지혜는 특정 시대에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던 지혜의 진실을 여기에 봉인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지혜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나길 기다렸지.”

    “그 지혜란 무엇입니까?” 연호의 목소리에 갈망이 스쳤다.

    “그것은 곧, 존재의 이유, 생성과 소멸의 법칙, 그리고 영기의 근원에 대한 모든 것이다.” 석상의 시선이 수정 기둥을 향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했던 것은, 그 지혜를 통해 무한한 힘을 탐했던 오만함이었다. 원천은 단순히 힘이 아니라 균형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은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망각했지.”

    수정 기둥 속의 빛이 더욱 강렬하게 맥동했다. 석상은 연호를 향해 손짓했다. “이제 네가 이 지혜를 깨달을 때다. 그러나 명심해라. 이 지혜는 너에게 거대한 힘을 줄 수도, 혹은 거대한 짐이 될 수도 있다. 오직 너의 마음만이 그 길을 정할 것이다.”

    연호는 수정 기둥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모든 영기를 모아 기둥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수정 표면을 통해,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고대의 지혜가 그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거대한 우주의 흐름, 영기의 탄생과 소멸, 생명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그의 영혼에 각인되는 듯했다.

    그 순간, 연호는 자신이 미약한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우주와 연결된 거대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의 육체는 빛으로 변하는 듯했고, 그의 의식은 무한히 확장되었다. 그동안 그가 수련하며 얻었던 모든 지식과 경험은 새로운 관점에서 재정의되었다. 무수히 많은 의문들이 마치 실타래 풀리듯 해소되었고, 그의 영혼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온함과 맑음으로 가득 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연호는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깊고 투명해져 있었다. 수정 기둥 속의 빛은 여전히 영롱했지만, 더 이상 격렬하게 맥동하지 않고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깨달았는가?” 석상의 목소리는 더욱 희미해져 있었다.

    “네… 저는… 원천의 지혜를 감히 엿보았습니다.” 연호는 숙연하게 답했다. 그는 더 이상 이 지혜를 개인적인 힘으로 사용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세상의 균형에 기여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좋다… 이제 나의 역할도 끝났으니…” 석상은 마지막 말을 남기듯 속삭였다. “기억해라, 젊은 수련자여. 진정한 힘은 파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순응에 있다는 것을.”

    석상은 천천히 먼지로 변하며 사라졌다. 거대한 수정 기둥 역시 빛을 잃어가더니, 이내 투명한 수정의 잔해만 남긴 채 부서져 내렸다. 유적 전체가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드는 것처럼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연호는 조용히 돌아서서 유적의 출구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그의 영혼은 태고의 지혜로 더욱 충만해져 있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유적의 입구를 뒤로하고, 연호는 다시 천암산맥의 품으로 돌아왔다.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연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잊혀진 고대 지하 유적의 비밀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그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상의 혼란 속에서, 그는 조용히 원천의 지혜를 따르며, 때가 되면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지혜는 그의 심장 속에서 영원히 맥동할 것이었다.

  • 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고요하고 깊은 밤, 천암산맥의 심장부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별들이 보석처럼 박힌 하늘 아래, 인적 없는 산봉우리들 사이로 신선한 영기(靈氣)가 흐르는 이 신비로운 땅은 오랫동안 수많은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이한 것은, 가끔씩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둔탁한 맥동이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쉬지 않고 뛰는 듯한 그 소리는, 오직 영민한 소수의 수련자들만이 감지할 수 있었다.

    연호(延皓) 역시 그 소수를 이루는 젊은 수련자 중 하나였다. 그는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고 홀로 도를 닦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의 몸에는 세속적인 번뇌 대신 끝없는 탐구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보랏빛 새벽안개가 산허리를 감싸는 그의 소박한 암자에서, 연호는 며칠 밤낮으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영시(靈識)는 땅속 깊은 곳, 태고의 시간마저 잊힌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운에 이끌리고 있었다.

    “점점 강해지고 있어… 단순한 지맥의 변화가 아니다.”

    연호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망설임 없이 암자를 나섰다.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천암산맥의 가장 깊고 음침한 곳, 일명 ‘화석림(化石林)’이라 불리는 숲이었다. 오래전, 알 수 없는 대재앙으로 인해 모든 나무가 살아있는 돌이 되어버렸다는 기이한 곳. 그곳은 영험한 기운이 넘치면서도 동시에 죽은 듯 고요한,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화석림 깊숙이 들어서자,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거대한 석목(石木)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형형색색의 돌나무들은 기이하게 뒤틀린 형태로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사이를 지나는 바람조차 한숨처럼 들렸다. 연호는 감각을 한껏 곤두세우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영기가 심장이 뛰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숲의 한가운데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다른 석목들보다 훨씬 거대하고 검푸른 기둥이 홀로 서 있었는데, 그 기둥의 한 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석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석문은 마치 땅속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입구처럼 보였다.

    “이것이… 설마 전설 속의 ‘심연의 서고(深淵의 書庫)’인가?”

    연호는 숨을 들이켰다. 전설에 따르면, 이 땅 아래에는 태고 시대의 지혜가 봉인된 거대한 지하 유적이 잠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입구를 찾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고, 유적의 존재 자체도 이제는 희미한 옛이야기로 치부되었다.

    석문은 어떤 흔적도 없이 완벽하게 닫혀 있었다. 연호는 손을 들어 석문에 가볍게 가져다 댔다. 차갑고 단단한 돌덩이 속에서, 잊혔던 영기가 그에게 울림을 보내왔다. 그는 자신의 영기를 조심스럽게 석문으로 불어넣었다. 그러자 석문에 새겨진 문자들이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은 유려하게 이어지며 석문 전체를 휘감았고, 이내 웅장한 기계음과 함께 석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과연…”

    석문 너머에는 끝없이 펼쳐진 암흑만이 존재했다. 연호는 주저 없이 발을 내디뎠다.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사방에서 수백 개의 영등(靈燈)이 동시에 밝아지며 그의 앞을 비췄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웅장했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통로였다. 천장은 아득히 높아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처럼 영롱한 광석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벽면에는 고대 문명의 역사를 담은 듯한 거대한 벽화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벽화에는 하늘을 나는 용들과 빛을 뿜는 신선들, 그리고 알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이 묘사되어 있었다. 통로의 공기는 맑고 서늘했으며, 태고의 영기가 물처럼 흘렀다.

    연호는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 걸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비로운 영음(靈音)이 그의 귀를 간지럽혔다. 통로 곳곳에는 정교한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갑자기 솟아나는 독안개, 허공에서 나타나는 환영들, 그리고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는 통로까지. 그러나 연호는 탁월한 영시와 기지를 발휘하여 모든 함정을 무사히 통과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통로는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으로 변했고,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영기의 밀도는 더욱 짙어졌다. 마침내, 그는 거대한 원형 광장에 도달했다.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그 기둥 안에는 마치 은하수를 응축시켜 놓은 듯한 영롱한 빛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수정 기둥 앞에는 누군가 무릎 꿇고 앉아 있는 형상의 석상이 있었다. 연호가 다가가자, 석상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랜 세월이 흘렀군… 새로운 탐구자인가?”

    연호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답했다. “감히 이곳에 발을 들였습니다. 당신은… 이 유적의 수호자이십니까?”

    “수호자이자, 기록자이자, 그리고… 마지막 증인.” 석상의 목소리는 오래된 바람 소리처럼 쓸쓸했다. “이곳은 태고의 지혜를 담은 ‘원천의 서고(源泉의 書庫)’. 우리 문명은 세상을 이루는 근본적인 힘, 즉 원천의 지혜를 탐구하고 기록했다. 그러나 그 지혜는 너무나 거대하여, 결국 우리 문명마저 감당하지 못할 재앙을 불러왔지.”

    석상은 긴 침묵 끝에 말을 이었다. “우리는 깨달았다. 우주의 모든 것은 순환하며, 어떤 지혜는 특정 시대에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었던 지혜의 진실을 여기에 봉인했다. 그리고 언젠가 이 지혜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나길 기다렸지.”

    “그 지혜란 무엇입니까?” 연호의 목소리에 갈망이 스쳤다.

    “그것은 곧, 존재의 이유, 생성과 소멸의 법칙, 그리고 영기의 근원에 대한 모든 것이다.” 석상의 시선이 수정 기둥을 향했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했던 것은, 그 지혜를 통해 무한한 힘을 탐했던 오만함이었다. 원천은 단순히 힘이 아니라 균형 그 자체이며, 모든 것은 순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망각했지.”

    수정 기둥 속의 빛이 더욱 강렬하게 맥동했다. 석상은 연호를 향해 손짓했다. “이제 네가 이 지혜를 깨달을 때다. 그러나 명심해라. 이 지혜는 너에게 거대한 힘을 줄 수도, 혹은 거대한 짐이 될 수도 있다. 오직 너의 마음만이 그 길을 정할 것이다.”

    연호는 수정 기둥 앞으로 다가섰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모든 영기를 모아 기둥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수정 표면을 통해,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고대의 지혜가 그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었다. 거대한 우주의 흐름, 영기의 탄생과 소멸, 생명의 본질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그의 영혼에 각인되는 듯했다.

    그 순간, 연호는 자신이 미약한 한 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동시에 우주와 연결된 거대한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의 육체는 빛으로 변하는 듯했고, 그의 의식은 무한히 확장되었다. 그동안 그가 수련하며 얻었던 모든 지식과 경험은 새로운 관점에서 재정의되었다. 무수히 많은 의문들이 마치 실타래 풀리듯 해소되었고, 그의 영혼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온함과 맑음으로 가득 찼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연호는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깊고 투명해져 있었다. 수정 기둥 속의 빛은 여전히 영롱했지만, 더 이상 격렬하게 맥동하지 않고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깨달았는가?” 석상의 목소리는 더욱 희미해져 있었다.

    “네… 저는… 원천의 지혜를 감히 엿보았습니다.” 연호는 숙연하게 답했다. 그는 더 이상 이 지혜를 개인적인 힘으로 사용하겠다는 오만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세상의 균형에 기여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좋다… 이제 나의 역할도 끝났으니…” 석상은 마지막 말을 남기듯 속삭였다. “기억해라, 젊은 수련자여. 진정한 힘은 파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화와 순응에 있다는 것을.”

    석상은 천천히 먼지로 변하며 사라졌다. 거대한 수정 기둥 역시 빛을 잃어가더니, 이내 투명한 수정의 잔해만 남긴 채 부서져 내렸다. 유적 전체가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드는 것처럼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연호는 조용히 돌아서서 유적의 출구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그의 영혼은 태고의 지혜로 더욱 충만해져 있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유적의 입구를 뒤로하고, 연호는 다시 천암산맥의 품으로 돌아왔다.

    밤하늘의 별들이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연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잊혀진 고대 지하 유적의 비밀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고, 그는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세상의 혼란 속에서, 그는 조용히 원천의 지혜를 따르며, 때가 되면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 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거대한 지혜는 그의 심장 속에서 영원히 맥동할 것이었다.

  • 던전 탐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 137화: 검은 심장부의 그림자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낡은 철제 복도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심장박동처럼 울렸다. 강하준은 숨을 죽인 채 손목에 찬 조악한 야광석 나침반을 응시했다. 제국력 503년, 수도 아델라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대제국 ‘아스타르’는 이제 끝없는 탐욕과 부패로 곪아 터진 거대한 시체나 다름없었다. 평민들의 고혈을 빨아 지은 황궁의 금빛 지붕 아래, 수많은 이들이 굶주리고 죽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체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하준님, 이쪽입니다.”

    앞서가던 이설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그녀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불과 스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설아는 붉은 새벽의 가장 유능한 척후병이었다. 타고난 은신술과 예리한 감각은 우리가 이 지옥 같은 곳을 헤쳐 나가는 유일한 길잡이였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제국이 수십 년 전 봉인했던 고대 유적, ‘검은 심장부’라 불리는 던전의 최하층이었다. 겉으로는 단순한 폐광처럼 보였지만, 이곳은 한때 제국의 잔혹한 실험과 기밀 병기 개발이 이루어지던 비밀 연구 시설이었다. 반란군 ‘붉은 새벽’이 이곳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제국의 숨겨진 치명적인 약점, 혹은 그들의 기반을 뒤흔들 만한 기밀 문서가 이곳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다.

    “복도 끝에 감지 장치 잔해가 보입니다. 작동하진 않는 것 같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설아의 말에 뒤따르던 박웅철이 묵직한 거한의 몸을 낮췄다. 한때 제국군의 강철 방패로 불렸던 그는, 자신의 상관이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는 제국에 등을 돌렸다. 그 후 붉은 새벽의 가장 강력한 창이자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양날 도끼는 녹슬었지만, 여전히 위압적인 기운을 풍겼다.

    “젠장, 여기 공기는 여전히 지독하군. 쇠 냄새에… 뭔가 타는 듯한 냄새까지.”

    웅철이 낮게 투덜거렸다. 그 냄새는 단순히 녹슨 철의 냄새가 아니었다. 낡은 전선이 타는 듯한 고약한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과거 이곳에서 희생된 수많은 생명들의 잔재일까.

    하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제국의 최신 병기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구식 무기였지만,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그의 손에 완벽하게 길들여진 친구였다.

    “발소리 조심해. 아무리 폐쇄된 곳이라지만, 제국 놈들이 이곳을 완전히 포기했을 리 없어. 분명히 뭔가 남겨두었을 거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서가던 설아가 멈칫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끼이익…… 철컹.’
    어둠 속에서 희미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 같았다.

    “어… 움직입니다. 복도 저편에서.” 설아의 목소리에 미약한 떨림이 섞였다.

    하준은 재빨리 몸을 벽에 붙였다. 웅철 역시 그의 거대한 도끼를 앞으로 내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다가오는 그림자. 점차 형태를 갖춰가는 그것은 제국의 자동 방어 병기인 ‘철혈 감시병’이었다. 녹슬고 낡았지만, 여전히 두 개의 붉은 센서 눈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철혈 감시병.’ 과거 제국이 반란군 토벌에 사용했던 무인 기동 병기다. 단단한 강철 장갑과 팔에 달린 기관총은 웬만한 보병 분대를 단숨에 갈아버릴 수 있었다. 이곳에 이렇게 낡은 구형 병기가 아직 남아있을 줄이야.

    “망할, 작동 정지된 줄 알았는데!” 웅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감시병의 붉은 눈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우리 쪽으로 고정되었다. 이내 경고음이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이- 위협 감지. 제거 프로토콜 가동.’
    기계적인 목소리가 음산하게 복도를 울렸다.

    “젠장! 설아, 후퇴 준비!” 하준이 외쳤다. “웅철, 시선 끌어! 내가 약점 노린다!”

    웅철은 이미 망설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철혈 감시병의 주의를 끌었다.
    “이 망할 깡통! 죽은 지 수십 년은 되었어야지!”
    웅철의 도끼가 감시병의 강철 장갑에 부딪히며 ‘꽝!’ 하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감시병은 미동도 없이 팔을 들어 올렸다. ‘드르륵륵!’ 기관총 포구가 회전하며 불을 뿜으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 하준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탕! 탕!’ 연속된 총성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하준이 노린 곳은 철혈 감시병의 붉은 센서 눈이었다. 두 발의 총알이 정확히 센서 눈을 꿰뚫었다.

    ‘지이잉- 에러 발생. 시야 손실.’

    감시병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붉은 눈이 사라진 자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시야를 잃은 감시병은 마치 짐승처럼 무작위로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관총이 웅철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웅철이 간발의 차이로 몸을 숙였다.

    “하준님, 이쪽입니다! 비상 통로!”

    설아가 복도 벽에 숨겨져 있던 낡은 철문 하나를 찾아냈다. 녹슬었지만, 제국군 비상 탈출 표식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준은 남은 총알 두 발을 감시병의 동체 중앙, 낡은 전원 코어로 보이는 부분에 박아 넣었다. ‘팟!’ 하는 짧은 폭발음과 함께 감시병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스으으….’ 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빨리! 시간 없어!”

    셋은 재빨리 비상 통로로 몸을 피했다. 철문이 ‘쾅!’ 하고 닫히자, 바깥의 소음이 아득해졌다. 복도 안은 훨씬 좁고, 더욱 깊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공기는 여전히 축축하고 답답했다. 이곳은 비상 통로라기보다는 단순한 환기구에 가까웠다.

    “휴…… 망할. 이런 낡은 것까지 작동하고 있을 줄이야.” 웅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댔다.

    “제국은 망해가도, 그들이 만든 살상 병기는 끈질기게 살아남는군요.” 설아가 씁쓸하게 말했다.

    하준은 권총의 탄창을 교체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 비상 통로는 완만한 경사를 따라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전에 우리가 파악했던 지도에는 없는 길이었다.
    “이쪽이 더 깊은 곳으로 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 설아, 탐지.”

    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닥에 웅크려 앉아 작은 광물을 내려놓았다. 광물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의 공간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대 유물을 분석해 만든 탐지석으로, 미약한 마력이나 에너지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래쪽에서 강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이전에 감지된 반응과는 다른 종류의 에너지입니다.” 설아가 눈을 감고 탐지석의 파동에 집중하며 말했다. “지… 지상에서 감지된 제국의 마력로는 아닙니다. 훨씬 오래되고, 강력한… 하지만 어딘가 뒤틀린.”

    하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전에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알려진 것은 ‘문서’였다. 하지만 설아가 감지한 것은 ‘에너지’. 게다가 ‘뒤틀렸다’는 표현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뒤틀렸다니? 위험한 건가?” 웅철이 물었다.

    설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명백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생명체와 기계의 혼합체 같은 느낌입니다. 이전에 제국이 생체 실험을 했다는 보고가 있었죠… 혹시 이 아래에.”

    “제국은 늘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을 탐했지.” 하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평민들을 쥐어짜 실험 대상으로 삼고, 금지된 지식에 손을 댔어. 어쩌면 우리가 찾던 것이 단순한 문서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들의 시선은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비상 통로의 끝을 향했다. 미지의 위협, 그리고 반란의 희망이 공존하는 그곳.
    우리는 과연 이 검은 심장부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그리고 그 발견은, 과연 붉은 새벽에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하준은 권총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망설일 틈은 없었다.

    “가자.”

    나직이 내뱉은 그의 말에, 셋은 다시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지만, 그들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제국의 심장을 파헤쳐, 세상을 뒤바꿀 그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들의 어깨에는 굶주린 백성들의 절규와 피 묻은 희망이 짊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그것은 제국의 마지막 비밀이자, 동시에 그들의 가장 잔혹한 함정일 수도 있었다.
    통로 끝에서, 섬뜩한 붉은빛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피 묻은 제국의 눈동자처럼,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